21세기 개명 천지에 이 나라 국민을 쇄국·위정척사를 바탕으로 한 망국의 길로 이끌고 가려는 어둠의 세력에게 월계관을 씌워주는 얼빠진 나라, 그 나라 이름이 대한민국이다.
#. 일제 시절 한국인의 국적 논란
최근 들어 일제 시절 한국인의 국적 문제, 윤석열 정부가 독도를 팔아먹느니 마느니 운운하며 시끌벅적한 논란이 벌어졌다. 이 참혹한 현상을 목격하면서 일부 국수주의에 쩔어버린 한국인의 역사 인식이 반일 종족주의 차원을 넘어 심각한 치료를 요하는 반일 정신질환으로 변이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좌익 종북을 기치로 하는 정치세력의 망동이 여과 없이 좌파 언론을 통해 증폭되고 있고, 엉터리 주장에 대한 방화벽 역할을 해야 할 학자나 정상적인 언론은 침묵하는 현상이 반복된다. 그러는 사이 반일 종족주의가 국수적 민족주의로 돌연변이를 일으킨 것이다.
이런 저질스런 논란을 분개하기에 앞서, 대한제국이 국권을 상실할 무렵 외국 언론이 이 나라 상황을 어떻게 보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이 급선무일 것 같다. 영국의 권위 있는 경제잡지 「이코노미스트」는 “조선은 차라리 외국으로부터 현대적 행정 시스템의 도움을 받는 것이 조선 국민들의 이익에 도움이 될 것”(1909년 10월 30일자)이라고 보도했다.
병합이 이루어진 직후에는 “일본이 한반도를 완전 지배하면 대한제국 황제는 권력 남용해서 국민을 착취하지 못하게 된다. 양반들도 더 이상 백성을 착취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합병되면 조선은 없어지지만, 조선 국민들은 일본 지배 하에서 더 잘 살게 될 것”이라고 보다 직설적인 보도를 했다(1910년 8월 27일).
#. 국적이 한국이었다면 왜 창씨개명을?
일본 통치 시절 국적 운운하는데, 그 시절 국적이 한국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섬망 질환(delirium)이 의심되니 빠른 시간 내에 가까운 정신과 전문의 찾아가 진료를 받으시기 바란다. 조선총독부 통치 하의 한국인 국적이 ‘조선(한국)’이었다면 김영삼은 왜 가네무라 고유(金村康右)로 개명했으며, 김대중은 왜 도요타 다이쥬(豊田大中)로, 박정희는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로 창씨개명을 했을까?
반면에 소설가 박완서, 화신백화점 대표 박흥식, 일본군 육군 중장에까지 올랐던 홍사익 장군 등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도 아무 일 없이 무사히 잘 살았다. 이 점이 궁금하신 분은 박완서 선생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꼭 읽어보시길 권한다.
1931년생 박완서는 학창 시절 창씨개명을 갈망했으나 할아버지의 강력한 반대로 창씨개명을 못했다.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박완서가 친일파여서 창씨를 학수고대했을까? 당시 많은 조선인들이 창씨개명을 원했고, 자발적으로 일본식으로 개명했으며, 창씨개명을 하지 않아도 어떤 제재나 차별을 받지 않았음을 이 책은 담담하게 고백하고 있다.
만약에 그 시절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의 국적이 ‘한국’이었다면 왜 수많은 청년들이 육군특별지원병이 되어 일본군에 자발적으로 입대했을까? 일본군이 되기 위해 몰려든 조선 청년들이 하도 많아서 1939년 20.5대 1, 1940년 28.1대 1, 1941년 48.2대 1, 1942년 56.5대 1, 1943년 45.9대 1의 경쟁을 뚫어야만 합격할 수 있었던 사실을 무엇으로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 조선인은 대일본제국의 2등 국민이었다
일본은 합방 이후 조선에 일본 제도를 이식하고 조선과 일본을 동질화하여 일본의 한 지방으로 편입시켰다. 이 방침을 그들은 조선의 시고쿠(四國)화, 큐슈(九州)화라 표현했다. 조선이 일본에 병합되었으므로 조선인에게도 일본인과 동일한 국민의 지위를 부여해야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일본은 그렇게 하지 않고 차별했다. 다 같은 대일본제국 소속 인민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조선인에게는 일본인에게 주어진 선거권·피선거권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억압·차별이 존재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므로 이를 근거로 입에 거품을 물고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기 바쁜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인류 역사는 차별의 역사다. 망국의 국민이 무슨 권리로 승전한 일본인과 동등한 권리를 주장한단 말인가.
억울하신가? 그렇다면 우리가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지 말았어야 한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라. 우리가 힘이 막강해서 일본을 흡수 합병했다고 치자. 이때 일본인들이 “우리에게도 한국인과 동등한 법적 권리를 달라”고 요구하면 귀하라면 그 요구를 수용했을까? 그 따위 거지발싸개만도 못한 쪽발이 왜놈들에게 한국인과 동등한 법적 지위를 보장한다? 그런 것을 인정할 한국인이 있었다고 보시는가?
한 마디로 조선인들은 일제의 신민(臣民)이 되었지만, 일본 국민과는 차별화 된 존재였다. 조선인은 참정권과 병역의무가 없는 2등 국민으로 일본에 편입된 것이다.
#. 조선인을 일본군으로 입대시켜라
일본 입장에서 볼 때 조선인을 일본군에 입대시켜 군사훈련을 시킨다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만약 이들에게 무기를 쥐어주고 훈련시킬 경우 무슨 일을 벌일지 예측불가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민족감정에 투철한 조선 병사가 같은 내무반의 일본군을 쏴 죽이거나, 훈련받은 조선인 병사를 규합하여 반란을 일으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여러 고민 끝에 일본 정부는 1938년 2월 23일부터 육군특별지원병 제도를 통해 조선 청년을 일본군으로 받아들여 이들의 동태를 분석해 보았다. 그 결과 조선 청년은 병사로서의 근무 성적을 비롯하여 명령 복종, 임무 수행 능력, 체력 면에서 일본인보다 훨씬 우수한 자질을 보유하고 있고, 일본이 염려했던 대로 일본에 총부리를 들이대는 일도 없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의 전황이 악화되자 일본은 1943년 10월 20일, 조선인학도지원병제도를 공포한다. 이는 일본에 유학중인 조선 학생, 조선 내에서 고급 교육을 받고 있는 조선 청년을 대상으로 일본군 입대를 지원하도록 하는 제도였다. 지원자 중 합격자는 육군 지원자 훈련소 입소하여 훈련 받고 자대 배치하는 제도다. 이것이 이른바 학병이다.
그런데 김성수·여운형·장덕수·안재홍·이광수·유진오·최남선 등이 조선 학생들의 학병 지원을 권유하는 글과 강연을 했다 하여 친일파로 단죄하는 소동이 일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조선 청년을 사지로 몰아넣는 망동적 행위를 한 것일까? 감성적 선동이 아닌, 이성적 시각으로 냉정하게 그 시대를 들여다보면 다음과 같은 사실이 발견된다.
일제 말 거의 대부분의 지식인이나 독립 운동가들은 조선이 자력으로 일본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독립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한다. 그들이 고뇌 끝에 내린 결론은 조선인이 완전한 일본 시민이 되어 차별 대우를 받지 말자, 일본인과 동등한 법적 권리를 가진 존재가 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지름길이라고 판단했다.
이들은 조선 청년들이 일본군으로 입대하여 일본을 위해 피를 흘리고 있으니, 그 대가로 참정권을 요구하는 운동을 벌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결론에 도달한 조선 지식인의 대표가 최남선과 이광수였다. 일군의 조선 지식인들은 조선 청년들에게 학병 권유 운동에 앞장서게 된다.
그런데 지원병 적격자 6,101명 중 실제로 지원한 사람은 4,610명(76%)이었고, 1,491명(24%)은 지원하지 않았다. 또 지원자 중 적성검사를 받은 사람은 4,217명이었고, 이들 중 합격자는 3,117명이었다. 이들 중 질병 및 기타사유로 입영하지 않은 67명을 제외하고 실제 일본군에 입영한 사람은 1944년 1월 20일 현재 3,050명이었다. 학도지원병제는 강제 동원이 아니었음을 입증하는 증거물이다.
#. 조선인 징병 대가로 참정권 허용
조선 청년들의 육군특별지원병, 학도지원병 입대에도 불구하고 전황이 크게 불리해져 보다 많은 병력이 필요해진 일본 정부는 1944년부터 조선 청년을 그들 의사와는 관계없이 강제로 징병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44년부터 종전까지 조선 청년 21만여 명이 일본 육·해군으로 징병되어 그 중 6,400여 명이 전사했다.
조선의 지식인들에 이어 조선총독부는 조선 청년들이 자발적·비자발적으로 일본군에 입대하자 그에 대한 응분의 대가로 조선인에게 참정권을 제공하라고 일본 정부에 요구했다. 이 문제는 대단히 민감한 사안이어서 일본 정부는 이를 허가하지 않았다.
이 와중에 조선 총독으로 재임했던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가 1944년 일본 총리에 취임하게 된다. 그는 총리 취임 직후 조선인을 일본군에 동원하고 있으니, 그에 대한 대가로 참정권을 허용해야 한다고 강력 주장했다. 그의 노력으로 조선인에게 참정권을 허용하는 선거법 개정이 이루어졌다.
1945년 4월 1일 중의원 의원 선거법 중 개정법률 및 귀족원령 개정 내용이 공포되었다. 이 법에 의하면 조선인은 일본을 위해 피를 흘려주는 대가로 귀족원(상원)의 경우 7석, 중의원(하원) 23석이 배정되었다. 조선인도 제국의회 진출 문호가 활짝 열린 것이다. 조선인 중의원 선출을 위한 선거권은 국세 15원 이상 납세자에게 주어지기로 결정되었다.
개정된 선거법에 의해 일본 제국의회는 1945년 4월 3일 귀족원(상원) 의원으로 김명준·박상준·박중양·송종헌·윤치호·이진용·한상룡 등 조선인 7명을 선임했다. 중의원 23명은 차기 선거부터 선출키로 법안에 명기했다. 그런데 총선이 시행되기 전에 일본이 패망했다. 덕분에 조선 지식인들이 고뇌 끝에 조선의 앞날을 위해 일본을 위해 피를 흘려주는 대가로 참정권을 얻어내자는 운동은 실효적 효과를 보지 못했다. 그들의 활동은 친일 행위로 주홍글씨가 새겨지게 되었다.
#. 창씨개명은 언제 무효화되었나?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항복하여 조선은 해방되었으나, 곧바로 독립하여 주권을 행사한 것은 아니다. 해방 후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까지 미군정 통치가 시행되었다. 통치의 주체가 일본에서 미국으로 전환된 것이다.
그렇다면 1940년 2월 11일부터 시행되었던 창씨개명이 법적으로 폐기되어 조선 이름을 되찾은 시기는 언제였을까? 1946년 10월 23일, 미군정은 군정법령 제122호로 조선 성명 복구령을 공포했다. 이 법령 덕분에 일본 통치시대의 창씨 제도에 의해 일본식 씨명으로 변경된 조선 성명은 본인의 신고 없이 직권으로 복구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일본식 씨명으로 변경된 호적부 기재가 무효화 되었고, 창씨개명 이전의 조선 식 이름으로 법적 복구가 정식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문제는 1940년 이후 출생자 중 일본식 이름만 가지고 있는 사례가 많았다. 이들의 경우 6개월 이내에 신고하면 개명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런 절차를 모르는 사람이 많아 일본인풍 이름을 가진 사람이 상당수에 달하게 되었다.
미군정 법령에 의해 조선 식 성명 복구 작업이 진행되어 1947년 말 38선 이남에 거주하는 281만 호의 1,647만 명이 갖고 있던 창씨명이 완전히 제거되어 본래의 이름을 되찾았다.
이 사례에서 보듯 해방 직전까지 조선인은 거의 대부분 일본인으로 동화되어 갔다. 학교에 가면 국어 시간에 한글 대신 일본어를 배웠고, 일본어로 말하고 쓰도록 강제되었으며, 국기에 대한 경례는 태극기 대신 히노마루를 향해 했다.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했을 때 그의 이름은 손기테이로 표기되었고, 일본 국가대표로서 가슴에 히노마루를 달고 뛰어야 했다. 그가 우승했을 때 베를린 스타디움에는 태극기 대신 일장기가 올랐고, 애국가 대신 기미가요(君が代)가 연주되었다.
좋든 싫든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었고, 역사의 참모습이었다. 그렇게 일본인으로 동화되어 살아가던 상황에서 느닷없이 일본이 망하고 해방이 되었다. 어느 날부터 “다꽝이니 벤또니 하는 일본어 쓰지 마라”, “일장기 대신 태극기 달아라”, “우리의 국가는 기미가요가 아니라 애국가”라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상이 닥쳤다.
일본인으로서의 아이덴티티에 젖어 살던 사람들을 재빨리 한국인으로의 정체성을 바꿔치기하기 위해 국수적 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광범위한 반일 교육이 시행되었다. 모래알처럼 흩어진 민초들을 하나로 규합하여 한민족의 의식을 갖도록 하기 위해 민족주의가 대폭발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 신채호의 ‘한놈 정신’ 부활하다
민족주의가 기승을 부리다보니 국수주의(Ultranationalism)로 발전했고, 그것이 급기야 반일 정신질환으로 돌연변이를 일으켜 이 나라는 지금 국뽕 쇼비니즘(Chauvinism)의 광분 현상에 직면했다.
이런 국뽕 쇼비니즘이 갈 길은 뻔히 정해져 있다. 바로 신채호가 열렬히 외친 ‘한놈 정신의 길’이다. 나라를 잃고 중국으로 망명하여 사회주의, 아나키즘, 공산주의 이념으로 무장하고 민중직접혁명론을 주창한 신채호는 1916년 단편소설 『꿈하늘』을 썼다. 이 소설의 주인공 이름이 ‘한놈’이다.
‘한놈’은 신채호가 꿈꾼 독립운동가의 표상이다. 전 인민이 ‘한놈’이 되어 죽기 살기로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여 무한 투쟁을 반복하는 존재다. 투쟁 과정에서 동지가 배반하면 동지를 죽이고, 부모가 배반하면 부모도 서슴없이 죽인다. 왼팔이 배반하면 왼팔을 베고, 오른팔이 배반하면 오른팔마저 베어 몸뚱이 데굴데굴 굴려가며 투쟁한다.
신채호는 1923년 김원봉의 부탁을 받고 의열단 선언문인 ‘조선혁명선언’을 썼다. 이 글에서 신채호는 “조선인 한 사람이 일본인 한 사람씩을 죽이다 보면 언젠가는 일본인이 전멸할 것”이라고 외쳤다. 문제는 일본 인구가 조선보다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이다. 사정이 이렇게 되고 보면 조선인 한 사람이 일본인 한 사람씩을 죽이다 보면 조선인이 먼저 전멸할 수도 있음을 신채호는 알았을까, 몰랐을까?
이런 극한적 투쟁을 강조하다보니 그가 어떤 활동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는다. 이왕 그의 이야기를 거론한 김에 한 마디 거든다면, 그는 좌익들이 그토록 숭고한 존재로 떠받드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개똥으로 알고 해체를 주장한 사람이다.
그는 실증을 중시한 사학자로 높은 평가를 받아 국사학계의 거목, 파이오니어로 떠받들고 있다. 그런데 그가 쓴 역사책들은 주관적이고 독선적인 사료 분석, 사료에 대한 자의적 해석으로 떡칠이 되어 있다. 솔직히 말하면 ‘있는 그대로의 역사’가 아니라 ‘자기 입맛에 맞도록 재창작한 역사’를 써냈으니, 신채호는 사학자가 아니라 소설가란 평이 어울리는 사람이다.
#. 아나키스트 신채호가 나라 되찾기 위해 독립운동?
신채호는 자타가 공인하는 아나키스트다. 아나키스트의 학문적 정의는 “사회를 아나키의 상태로 만들려는 정치적·철학적 사상”이다. 그렇다면 아나키 상태란 뭘까?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지배자가 없는 상태”를 뜻한다. 다시 말하면 정부·국가·자본·종교·도덕·성·인종 등의 지배자, 억압자를 거부하는 사상이다.
신채호를 열렬 흠모하는 학자·지식인·언론인들은 그가 투철한 아나키스트였음을 대단히 높이 평가한다. 그렇다면 그들에게 묻는다. 아나키스트 신채호는 정부·국가를 없애려고 열과 성을 다 바친 사람이다. 그런 희대의 천재적 아나키스트가 국가를 되찾기 위해 일제와 투쟁을 했다고?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엉터리 주장 아닌가? 이 논리는 아나키스트 이회영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마지막으로 주목할 점은 신채호가 어떤 죄목으로 감옥에 가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밝히려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왜 그럴까? 무슨 말 못할 사연이라도 있는 것일까?
사회주의에 심취했던 신채호는 누구도 못 말리는 아나키스트로 전향하게 되었다. 1928년 4월 그는 베이징에서 열린 무정부주의동방연맹 대회에 참석한다. 이 대회에서 자금 마련을 위해 위조 외국환을 제조하기로 결의한다. 다시 말하면 신채호는 무슨 숭고한 항일 애국 독립운동이 아니라, 국제 위조지폐 제조에 가담한 죄로 일본 경찰에 체포된 것이다.
신채호는 1930년 7월 9일 치안유지법 위반과 유가증권 위조 죄명으로 10년 형을 선고받고 뤼순감옥에 수감되었고, 1936년 2월 18일 뇌일혈로 옥사했다.
신채호의 투쟁사관은 한 마디로 개항기에 도끼 들고 쇄국·위정척사를 외쳤던 주자성리학 원리주의자의 전형이다. 이런 사람에게 박정희 군사혁명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나아가 2021년 9월 28일에 진수된 대한민국 해군의 3천 톤 급 잠수함의 3번함(SS-086)을 신채호 함으로 명명했다.
21세기 개명 천지에 이 나라 국민을 쇄국·위정척사를 바탕으로 한 망국의 길로 이끌고 가려는 어둠의 세력에게 월계관을 씌워주는 얼빠진 나라, 그 나라 이름이 대한민국이다.
김용삼 대기자 dragon003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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