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 15일 화요일

마음이 먼저 늙어간다는 걸 알았다

 


나이라는 걸 굳이 정의하자면, 그냥 시간의 흐름 속에 물처럼 흘러가는 것이라 말하고 싶다. 너무 집착할 것도, 억지로 거슬러보려 애쓸 것도 없다. 인생이란 어차피 반전도 없고, 정지 버튼으로 멈출 수도 없는, 그저 흘러가는 흐름일 뿐이다. 어느 노래 가사에는 '우리는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다'라고 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받아들일 줄 아는 자기 마음의 평화이다.


젊은 날엔 '나이를 먹는다'는 말을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십 년에 한 번씩 숫자가 바뀔 때면 묘한 기분이 들긴 했지만, 몇 달이 지나면 곧 익숙해져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곤 했다. 주름이 생기고 머리카락에 새치가 보이고 조금 빠져도, 그저 중년이 찾아오는 시기쯤으로 여겼다. 그 변화를 중년의 자연스러운 중후함으로 느끼고, 오히려 즐기기까지 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가 내 생애 가장 빛나던 시절이었다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사람마다 제일 좋았던 시기는 다르겠지만, 나에게는 사십 대부터 오십 대 초반까지가 제일 좋았던 시기로 기억한다,

중년을 보내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었다. 그러던 어느 날, 거울 속 낯선 얼굴과 마주한 순간이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내가 낯설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순간, 나는 내가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인정했고, 서서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주름은 더 깊어졌고, 새치는 염색 없이는 감춰지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이는 단순한 숫자가 아닌, 하나의 ‘현상’으로 다가왔다. 시력은 흐릿해지고, 잘 들리던 소리도 가끔 겹쳐 들렸다.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고, 감기 한 번 앓고 나면 며칠씩 회복이 더뎠다. “좀 쉬어야겠네”라는 말이 하루 중 어느 순간 불쑥 튀어나왔고, 잠시 앉았다 일어설 때면 한숨이 먼저 나왔다.

몸보다 더 낯선 건 마음의 변화였다. 나도 모르게 가랑비에 옷 젖듯 성격이 나도 모르게 바뀌어 갔다. 예전 같으면 웃고 넘겼을 말이 어느 순간 가슴에 박히고 오래 남았다. 무심한 말 한마디에도 서운하고, 겉으론 괜찮다 웃어넘겼지만, 밤이 되면 혼자 곱씹었다. 사소한 일에도 괜히 노여움이 치밀고, 별것도 아닌 일에 에너지를 쏟은 후엔 허무한 감정만 남았다. 예전엔 훌훌 털고 지나갔던 일인데, 이제는 마음에 오래 머물렀다. 예민해지고, 방어적이 되고, 옹졸한 내가 낯설게 느껴졌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나이가 들수록 감성이 점점 무뎌졌다. 예전에는 계절의 변화만으로도 설렜고, 기념일엔 작은 선물 하나를 주고받는 일에도 기쁨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감각이 모두 사라진 듯하다. 예전 같으면 마음을 담아 표현했을 선물도, 이제는 그냥 생략하고 건너뛰게 된다. 마음의 촉감이 무뎌진 걸까, 아니면 감정이 더 거칠어졌을까. 여전히 따뜻한 것을 좋아하고, 잔잔한 음악에 위로받지만, 그 감정의 깊이는 예전과는 다르다. 감성이 깊어진다기보다는, 조용히 안으로 스며들어 혼자만 느끼고, 이내 금세 흘려보내 버린다.

인간관계도 달라졌다. 많은 인연들이 멀어졌고, 어떤 관계는 이유 없이 자연스레 끝이 났다. 놀랍게도 그다지 아쉽지 않았다. 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새로운 만남도 기대되지 않고, 기대하지도 않았다. 이별도 낯설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억울했던 일도, 슬펐던 일도 “그럴 수도 있지” 하며 체념하는 상황으로 변해갔다. 예민했던 감정은 둔해지기로 마음먹었고,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가급적 줄여갔다. 이것이 터득이라기보다는, 나이와의 타협일지도 모르겠다.

가끔은 외롭다. 하지만 그 외로움을 굳이 채우려 하진 않는다. 혼자 있는 시간이 익숙해졌고, 오히려 그 고요 속에서 안정을 느낀다. 따뜻한 차 한 잔과 잔잔한 음악이면 충분하다. 날씨가 맑든 흐리든, 이제는 오늘의 날씨에 대한 특별한 기대도 없다. 예전엔 동적인 것이 익숙했지만, 지금은 정적인 시간이 더 편하다.

문득 생각할 때가 있다. 지금의 이런 마음이 예전의 나에게도 있었다면, 내 삶은 조금 더 유연하고, 너그러웠을까. 하지만 이제라도 그때 몰랐던 나를 마주하게 되어 다행이다.

(BrunchStory에서 옮긴 글)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