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7일 화요일

경제 빈곤보다 더 무서운 ‘관계 빈곤’


 🤝😥친구 0명, 전화도 한달 한번…관계빈곤, 가난만큼 무서운 이유

가족·친구 왕래 단절 증가…친구·이웃 0명, 전화·카톡 조용…국민 20% "도움받기 불가“…고령·저소득일수록 심해…”찾아가는 복지서비스 필요“…서울시 ‘외로움 없는 서울’ 선언…맞춤형 ‘서울연결처방’ 연계 

나이가 들어가면서 어느 한 시기가 되면 점점 연락하는 사람이 줄어든다. 물론 모두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삶을 바쁘게 살다가 어느 순간 돌이켜 보면 주변에 사람들이 하나 둘 멀어져 있기 마련이다.  

예전에 연(緣)이 닿았던 사람들과 다시 연락하며 지내기는 쉬울 수도 있지만, 그렇게 시도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청년들의 고독사(孤獨死)도 심각한 문제이지만, 이제 초고령 사회에 접어들면서 중장년의 고독사도 눈여겨봐야 할 것이다. 

특히 비혼(非婚) 선호도가 높은 요즘 청년들, 중년층에서 조금 더 시간이 지나게 되면 문제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부모님이 자주 하시는 말 중에 하나가 “늙어서 옆에서 등 긁어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인데.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어서 더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뇌출혈 또 오면 어떻게 하나“

서울에 사는  K(55)씨는 주변 사람으로부터 한 달에 한 번 전화가 올까 말까 한 상태다.. K씨는 2015년 뇌출혈로 쓰러져 우측이 마비된 후 요양병원 세 곳을 전전했다. 2023년 6월 8년 넘는 병원 생활을 접고 지금의 임대주택으로 나왔다. K씨는 현재 친구도 이웃도 없다. 전화나 카카오톡 통화하는 사람도 없다. 월 1회 딸의 전화가 전부다.

하루에 1~2시간 걷고, TV를 보거나 잔다. 복지관에 가기에는 너무 젊다고 여긴다. 종교 활동도 생각이 없다. K씨는 "처음에는 외로웠지만, 지금은 그런대로 괜찮다"며 "교회 같은 데서 나 같은 사람을 싫어할 것"이라고 말한다. 유일한 말벗은 월~금요일 찾아오는 장애인 활동보조사이다. 보조사가 점심을 챙겨준다. 저녁은 혼자 먹는데, '청승맞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주말에는 완전히 혼자다. 다행히 우울 증세는 없다.

 두려운 게 있다. 뇌출혈 재발이다. 정씨는 "뇌출혈이 온 사람에게 또 올 확률이 높다는데, 그런 상황이 생기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정씨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이다. 몸이 성하지 않아 일하기 어렵다. 기초 수급비·장애연금 70여만원으로 빠듯하게 산다. 그에게 경제적 빈곤도 무섭지만, 더 무서운 건 '관계 빈곤'이다.

1인 가구, 독거노인, 고독사, 고립 청년…. 미디어에 쏟아지는 단어들이다. 관계가 단절된 현대인의 삶을 대표한다. 통계청 사회조사(2023년)에 따르면 몸이 아파 집안일을 부탁해야 하는데, 도움을 받을 데가 없는 경우가 26%이다. 우울해서 얘기 상대가 필요할 때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응답자가 20.2%이다. 소득이 낮을수록, 연령이 높을수록 더 높다. 월 소득 100만원 미만은 35.9%, 600만원 이상은 13.9%이다. 65세 이상 노인은 28.3%, 20대는 14.4%이다.

 ●주1회 친인척 왕래 15년새 11%→3%

노인실태조사(2023)에 따르면 가장 많이 접촉하는 비(非)동거 자녀와 주 1회 이상 왕래한다는 노인의 비율이 22.7%에 불과하다. 15년 전에는 37.6%이었다. 형제·자매를 포함한 친인척 왕래 비율은 15년 새 10.6%에서 3%로, 친구·이웃·지인 왕래는 78.4%에서 59.7%로 줄었다. '1순위 여가 활동'으로 종교 활동을 꼽은 사람이 5.2%에 불과하다. 노인복지관 이용률이 9.6%로 낮다. 경로당 이용률은 26.5%로 상대적으로 높지만, 과거보다 소폭 줄었다. 다만 친목 단체 참여율은 54.2%로 비교적 높은 편이다. 과거보다 증가하는 추세다.

                         

 ●사회적 지지 비율 OECD 꼴찌

최진영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산업 고도화를 이룬 나라에서 외로움은 공통으로 나타난다. 미국·유럽 등이 그랬고 일본이 좀 늦게 따라갔다"며 "더욱이 한국은 산업 고도화 속도가 훨씬 빨라서 관계 빈곤에 대처할 시간이 없었다"고 말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사회적 지지(Social support) 지표를 보자.

이 지표는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의지할 수 있는 친구·친척을 둔 사람의 비율'을 따진다. 아이슬란드(98.18%), 핀란드(98.06%), 이스라엘(95.28%)이 1~3위이다. 한국은 80.47%로 38개국 중 꼴찌이다. 노인은 훨씬 나쁘다. 아이슬란드가 1위로 97.93%지만 한국은 68.59%로 뚝 떨어지는 꼴찌이다.
     
             




●"커피 한잔 하고 가" 

누군가 도와주면 관계 빈곤에서 벗어난다. 서울 노원구의 치매환자 L(92)는 막다른 골목의 빛이 잘 들지 않는 작은 집에 살고 계신다. 재택의료센터 시범사업 기관인 파티마재가복지센터 장현재 원장과 이 방문했다. 할머니는 여전히 불을 켜지 않은 채 컴컴한 방에 누워있었고 "안 돼"라는 말을 반복했다. 온갖 가재도구가 널브러져 있었고 좋지 않은 냄새가 진동했다.

그 무렵부터 요양보호사가 주 5일 방문했고, 장 원장도 월 1~2회 진료하고 약을 처방했다. 그렇게 서너 달 지나자 할머니가 달라졌다. "커피 한잔하고 가." 장 원장은 최근 할머니가 이런 말을 해서 놀랐다고 한다.

 최진영 교수는 "지역 도서관을 활성화해 교양 강좌, 공예 교실, 그림 그리기 등의 프로그램을 같이하면 좋다"며 "관계 빈곤 탈출 능력이 떨어져 있는 사람은 밖으로 잘 나오지 않기 때문에 찾아가는 복지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힘들 때 도움을 받을 수 있게 가족이든 누구든 최소한 1명은 있어야 한다"며 "노년기에는 종교 활동을 하는 게 도움이 된다"고 덧붙였다.

 ●영국은 커튼이 닫혔는지 위성 확인 

관계 빈곤이 심해지면 부작용으로 이어질 수 있다. 알코올에 탐닉하거나 극단적인 종교 활동에 빠지거나 고독사로 생을 마감할 수 있다. 영국은 고독과 같은 마음의 병을 사회적 이슈로 보고 2018년 세계 최초로 외로움부(Ministry of Loneliness)를 만들었다. 당시 보고서에서 "외로움은 심혈관질환·우울증세를 야기하고, 인지 능력을 떨어뜨리고 치매와 관련이 있으며, 사망 위험을 높인다"고 진단했다.

영국은 500여개 라디오 프로그램을 1분간 중단하고 "외로움을 느끼는 주변 친구에게 손을 내밀자"고 독려한다. 커튼이 항상 닫혀 있는 집을 위성으로 확인해서 자원봉사자를 연결한다.

 ●영국, 세계 최초 '외로움부' 신설…"부처 칸막이 극복"

영국은 세계 최초로 '외로움부‘를 신설, 장관을 임명했다. 사회적 고립을 흡연·비만만큼이나 중요한 사회문제로 인식하고 외로움부를 설치한 것이다. 국민의 외로움에 관한 전략을 마련하고 연관된 사회단체 등에 자금을 지원하는 역할을 한다. 테레사 메이 전 총리가 시민사회부 장관이었던 트레이시 크라우치를 외로움부 장관으로 겸직 임명하면서 외로움에 관한 범정부적 지원 전략이 수립됐다.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이 발간한 '청년의 사회적 고립 실태 및 지원 방안 연구'에 따르면 영국의 외로움 대처 정책은 메이 전 총리가 작성한 '연결된 사회'(2018)를 통해 그 정책 목표와 장기 계획이 구체화됐으며, 실제 정책 집행으로 이어지고 있다. 주무 부처인 시민사회부가 관련 정부 정책을 총괄하고 조율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외로움부 장관의 직책을 한국의 각료 체계에 견줘보면 장관직이 아니라 차관직에 해당한다. 시민사회부 장관이 기존에 수행하던 업무에 더해 외로움 관련 업무를 총괄하는 업무를 추가로 맡게 된 것으로, 별도로 외로움부에 해당되는 부처가 신설된 것은 아니다.외로움부 혹은 시민사회부가 외로움 관련 정부 정책을 총괄하고 조율하는 업무를 수행하는 것은 맞지만 관련 업무가 해당 부서에만 할당되는 것도 아니다.

실제 9개의 정부 부처가 외로움 관련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주무 부처 외에 교육부, 교통부, 노동연금부, 사업·에너지·산업전략부, 환경·식품·지역개발부 등 다양한 부처에서 사회구성원이 겪는 외로움 문제를 완화하거나 혹은 외로움 문제를 예방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정책을 시행한다.특히 중앙 정부가 관련 업무를 전담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국의 외로움 대처 전략은 '모든 이들이 관계망을 잇고 협력하는 과정에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외로움 문제에 대처할 수 있다'는 표어를 강조한다. 이에 영국 중앙 정부는 외로움 대처 전략의 주요 주체로 중앙 정부와 더불어 친구·가족·공동체, 고용주, 제3섹터, 지방 정부 및 공공·건강 서비스 기관들을 호명하고 있다.

청소년정책연구원은 "영국에서의 외로움 대처 사업은 부처 간의 칸막이를 극복하고 범정부적인 정책을 펼치고 있다는 점, 시민사회 단체뿐만 아니라 영리 기업까지 협업 파트너로 포섭하는 민관협력의 모범적인 사례라는 점에서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설명했다.


 ●'외로움 없는 서울' 선언…맞춤형 '서울연결처방' 연계

한국의 경우 영국의 외로움부 장관 지정과 같은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으나, 광역지자체 차원의 사례가 최근 나왔다. 서울특별시는 10월21일 '외로움 없는 서울'을 선포했다. 시민의 외로움·고립·은둔 문제 해결을 위해 시정역량을 총동원하게 된다. 2024년 7월 신설한 돌봄고독정책관이 이번 프로젝트를 총괄 기획하며, 서울시 실·본부·국이 모두 나선다.

5년간 총 4513억원을 투입할 계획이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개인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외로움 문제를 이제 공공이 챙기겠다는 선언"이라며 "예방부터 치유, 사회로의 복귀, 재고립 방지까지 촘촘하게 관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방안에 따르면 외로움을 느끼는 시민 누구나, 언제 어디서나 도움을 요청하고 상담할 수 있는 온·오프라인 플랫폼 '똑똑 24 플랫폼'을 구축한다. 전화, 온라인(카카오톡)은 물론 편하게 방문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한다. 핵심 플랫폼 '외로움 안녕 120'은 24시간 365일 운영되는 외로움 전담콜센터로 2025년 4월부터 운영한다.강화된 고립은둔 가구 상시 발굴체계도 가동한다.

가스·전기 등 위기정보(46종)와 각종 행정정보를 연계해 고립은둔가구를 선제적으로 찾아내고 고립가구 생활특성 상 자주 이용하는 편의점, 빨래방 등 생활밀착업종을 고립가구 지원 신청 접점으로 활용한다.다양한 경로로 발굴된 고립은둔 가구에는 초기 상담을 실시하고 특성 진단 후 맞춤형 '서울연결처방'을 연계한다.

서울시는 '서울연결처방'에 대해"고립은둔 시민들의 특성과 유형에 따라 맞춤형 치유방안을 제시하는 것으로 외로움 예방에 초점을 맞춘'영국의 사회적 처방'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이라고 설명했다.먼저 '정원처방'은 마음치유 처방 중 하나로 고립청년이나 난임부부 등에 정원과 산림을 활용한 마음산책, 원예 활동 등의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9월부터 시범 운영 중이다.은둔·지원거부 시민들에겐 '15분 외출처방' 을 통해 일상회복을 돕는다. 고립을 경험하고 극복한 시민이 상담을 직접 진행하거나 비대면 화상상담을 통해 저항감을 줄이며 한발씩 다가가는 방식이다.'자립처방'은 고립과 은둔에서 벗어난 시민이 재고립·재은둔 하지 않도록 지역사회와 함께 돌봄공동체를 구축하고 자립을 지원하는 내용이다. '생애주기별 처방'은 전 생애로 확대된 고립은둔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세대별 맞춤형 처방이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