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땅을 밟은 지 어느덧 오십오 년. 낯선 언어와 낯선 거리에서 시작한 삶이 이제는 익숙한 하루하루가 되었다. 돌아보면 참 먼 길을 걸어왔다. 그리고 이제는 그 길의 끝자락, 황혼의 나이에 서 있다.
젊었을 때는 "인생을 즐기며 살라"는 말이 그저 좋은 문장으로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아침에 눈을 뜨고 두 다리로 걸어 나갈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몸으로 안다. 언젠가 이 다리로 걷지 못하게 될 날이 올 것을 알기에, 몸이 허락하는 오늘 하루가 더없이 소중하다.
아내와 함께 골프장을 걷는 시간들이 그래서 더욱 감사하다. 같은 나이로 늙어가며 같은 속도로 걸어주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잘 살아온 인생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화려한 것을 좇기보다 이런 소박한 시간들을 오래 붙잡고 싶다.
돈에 대해서도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통장에 쌓인 숫자는 결국 숫자일 뿐, 쓰지 못하면 내 것이 아니다. 평생 아끼고 모아온 습관은 여전히 소중하지만, 이제는 쓸 때 쓰는 용기도 함께 배워야 한다는 것을 안다. 자신을 잘 대접하는 것, 사고 싶은 것이 있으면 주저 없이 사서 기뻐하는 것. 그것이 이 나이에 스스로에게 줄 수 있는 선물이다.
자식과 손자들의 일은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만 기도한다. 입을 다무는 것이 쉽지 않지만, 그들이 각자의 삶을 스스로 꾸려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 그것이 부모로서 바랄 수 있는 가장 큰 행운임을 이제는 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은 간섭이 아니라 조용한 응원이다.
병이 찾아오면 두려워하지 않으려 한다. 부자든 가난하든, 권력이 있든 없든 누구도 생로병사의 길을 피해갈 수 없다는 것이 인생의 이치이니, 겁먹기보다는 담담히 받아들이는 편이 낫다. 다만 건강할 때 미리 정리해둘 것은 정리해두려 한다. 남겨진 이들이 곤란하지 않도록, 그리고 내 마음이 홀가분하도록.
몸은 의사에게 맡기고, 목숨은 하늘의 뜻에 맡기고, 마음만은 내가 끝까지 책임지려 한다. 그것이 이 나이에 이르러 내가 붙잡은 마지막 원칙이다.
오십오 년 전, 아무것도 모른 채 낯선 땅에 첫발을 디뎠던 젊은이가 이제는 황혼의 나이에 이르러 이런 글을 적고 있다. 후회는 없다. 다만 남은 날들을, 걸을 수 있을 때 걷고, 웃을 수 있을 때 웃으며, 감사할 수 있을 때 감사하며 채워가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