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9월 12일 토요일

매번 결심만 하는 사람에게 ; 의지가 아니라 환경을 바꾸라



 사람들은 자주 결심합니다.

내일부터 운동하겠다.
덜 먹겠다.
화를 내지 않겠다.
늦게 자지 않겠다.
돈을 아껴 쓰겠다.

그런데 며칠 지나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을 탓합니다.
“내 의지가 약해서 그래.”

하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사람은 의지만으로 오래 버티기 어렵습니다.
환경이 그대로인데 마음만 바꾸려고 하면, 결국 익숙한 습관이 다시 나를 끌고 갑니다.

운동을 하겠다면 운동하기 쉬운 환경을 만들고,
덜 먹겠다면 눈앞에 있는 간식을 치우고,
돈을 아끼겠다면 충동적으로 쓰기 어려운 구조를 만들고,
화를 줄이고 싶다면 즉시 반응하지 않고 잠시 멈출 수 있는 거리를 만들어야 합니다.

의지를 강화하는 것보다
의지가 덜 필요하도록 환경을 바꾸는 것이 현명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이 사실을 더 실감합니다.

젊을 때는 마음먹으면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노년에 가까워질수록 알게 됩니다.

인생은 결심의 횟수로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매일 반복하는 작은 환경과 습관으로 달라진다는 것을.

그러니 또다시 자신에게 강한 결심을 요구하기보다
내가 매일 머무는 환경부터 살펴보십시오.

무엇이 나를 좋은 방향으로 끌어가는가.
무엇이 나를 자꾸 예전의 습관으로 돌아가게 하는가.

그리고 하나씩 바꾸십시오.

사람을 바꾸려고 애쓰기보다 만남의 환경을 바꾸고,
마음을 억지로 다잡기보다 마음이 편안해지는 환경을 만들고,
매번 결심하기보다 결심하지 않아도 좋은 선택을 하게 되는 환경을 만드는 것.

어쩌면 이것이 나이가 들어 배운 가장 현실적인 자기관리인지도 모릅니다.

결심은 순간을 바꾸지만,
환경은 삶의 방향을 바꿉니다.

그래서 이제는
“내가 더 강해져야지”라고 말하기보다

“내가 덜 힘들어도 좋은 삶을 살 수 있도록
환경을 바꾸자.”

그렇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옮긴 글)

내가 조금 작아지면 누군가가 커진다

 


식탁에 둘러앉은 가족을 떠올려본다. 대화 중에 누군가 목소리를 높이면, 자연히 다른 사람은 말을 줄이게 된다. 방 안의 공기는 한정되어 있어서, 한 사람이 크게 숨을 쉬면 다른 사람은 작게 쉴 수밖에 없다. 인간관계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내가 차지하는 자리가 늘어나면, 누군가의 자리는 그만큼 줄어든다. 반대로 내가 스스로 물러서면, 그 빈자리에 누군가 들어와 앉을 수 있다.

이것은 손해를 보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아주 현실적인 계산이다. 젊은 시절에는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이 중요해 보인다. 회의에서 내 의견을 관철시키고, 대화에서 마지막 말을 내가 가져야 이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매번 이기는 사람 곁에는 사람이 오래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반면 가끔 져주고, 가끔 양보하는 사람 곁에는 사람이 모인다. 이것은 감상이 아니라 인간관계의 구조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다. 후배의 아이디어가 부족해 보여도 굳이 지적하지 않고 지켜봐 주는 상사가 있다. 그 상사는 자신의 유능함을 한 번 덜 드러낸 것뿐인데, 후배는 그 자리에서 자신감을 얻고 성장한다. 상사가 작아진 만큼 후배가 커진 것이다. 이것이 몇 년 쌓이면, 그 후배는 상사를 진심으로 따르게 된다. 당장 내 유능함을 증명하는 것보다, 남을 키우는 쪽이 결국 더 큰 것을 남긴다.

부부 사이도 그렇다. 사소한 말다툼에서 누가 옳은지를 끝까지 가리려 들면, 둘 다 지치고 상처만 남는다. 그러나 한쪽이 먼저 말을 삼키고 물러서면, 다툼은 거기서 멈춘다. 이때 물러선 사람이 진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관계를 지킨 사람이다. 부부로 수십 년을 함께 살아본 사람이라면 안다.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보다, 관계를 지키는 것이 더 어렵고 더 값지다는 것을.

나이가 들수록 이 이치는 더 분명해진다. 젊을 때는 내가 커지는 것이 곧 성공이라 여겼다. 더 많이 벌고,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 더 많은 사람이 나를 알아보는 것. 그러나 인생의 황혼에 이르면, 그렇게 커진 것들이 결국 무겁고 부질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오히려 자식 앞에서 조금 작아져 줄 때, 자식이 스스로 설 자리를 찾는다. 손주 앞에서 아는 체하지 않고 물러나 앉아 있을 때, 손주는 자기 이야기를 마음껏 펼친다. 내가 가르치려 들지 않고 들어주기만 해도, 상대는 스스로 답을 찾아가며 커진다.

물론 이것이 자기를 없애라는 뜻은 아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무 자리도 차지하지 않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회피다. 진짜 지혜는 언제 커지고 언제 작아질지를 아는 데 있다. 내가 마땅히 해야 할 일, 내가 사랑하는 일 앞에서는 최선을 다해 크게 서야 한다. 그러나 남의 자리, 남의 성장, 남의 자존심이 걸린 자리에서는 굳이 내가 커질 필요가 없다. 그 자리는 양보해야 비로소 건강하게 채워진다.

결국 인생이란 내가 얼마나 커지느냐를 다투는 무대가 아니라, 언제 작아지고 언제 비워야 하는지 그 수위와 균형을 맞춰가는 정교한 균형 잡기입니다. 오늘도 내 안의 작은 욕심 하나를 슬며시 내려놓으며, 그 자리에 타인을 위한 따뜻한 공백을 만들어 봅니다. (옮긴 글)

밀과 가라지

 

밭을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이상한 사실 하나를 깨닫게 된다. 밀은 늘 조용히 자라고, 가라지는 늘 먼저 눈에 띈다. 가라지는 더 푸르고, 더 빠르고, 더 크게 자라서 마치 그 밭의 주인처럼 보인다. 사람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끌린다. 요란한 것, 크게 보이는 것, 당장 눈을 잡아끄는 것.

삶에서도 그런 것들이 먼저 보인다. 불안, 결핍, 비교, 후회 같은 것들. 이들은 가라지처럼 자라서 하루를 덮고, 마음을 흔들고, 마치 내 삶 전체를 대표하는 것처럼 굳어버린다.

밀과 가라지를
한눈에 구별하기 어려운 것처럼,
행복과 불행도 처음에는 잘 보이지 않습니다.

행복의 싹 곁에는
그럴듯한 모습으로 자라는
불행이라는 잡초가 함께 자랍니다.

잡초는 더 빨리 자라고,
더 푸르고, 더 무성해 보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잡초를
좋은 풀이라고 착각하기도 합니다.

돈이 많아지는 것이 행복인 줄 알았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이 행복인 줄 알았으며,
더 많이 갖고 더 높이 올라가는 것이
잘 사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황혼의 문턱에 서서 돌아보니
행복은 의외로 소박한 곳에 있었습니다.

오늘 두 발로 걸을 수 있고,
밥 한 끼를 편안히 먹을 수 있고,
곁에 마음을 나눌 사람이 있고,
하루를 무사히 보내며
잠자리에 들 수 있는 것.

어쩌면 이것이
가장 오래 자라야 할 행복의 풀인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나는 하느님께 청합니다.

많이 갖게 해달라고 하기보다
무엇을 가져야 하는지 알게 해주시고,

더 높이 올라가게 해달라고 하기보다
무엇이 정말 중요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기를.

행복의 열매를 맺는 풀과
행복처럼 보이지만 결국 마음을 병들게 하는 잡초를
구별할 수 있는 눈을 주시기를.

남은 삶에서는
잡초를 키우느라 행복의 싹을
짓밟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를 !! 🙏🙏

분수(分數)

 


사람은 누구나 자기 그릇의 크기를 타고난다.

그 그릇을 아는 것이 지혜요, 모르는 것이 화(禍)의 시작.

분수란 남보다 적게 가지라는 말이 아니라,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을 알아채는 마음의 저울.

넘치는 물이 그릇 밖으로 흐르듯, 분수를 잊은 욕심은 결국 자신을 넘어 흘러넘친다.

오늘의 세상은 비교(比較)로 사람을 잰다.
남의 집이 크면 내 집이 작아 보이고, 남의 차가 빛나면 내 차가 낡아 보인다.
손바닥 안의 작은 화면 속엔 언제나 나보다 나은 삶이 있고,
그 화면을 들여다볼수록 내가 가진 것은 점점 작아 보인다.

그러나 진짜 가난은 적게 가진 것이 아니라, 가진 것에 만족할 줄 모르는 마음.
진짜 부유함은 많이 쌓은 것이 아니라, 더 이상 채우려 하지 않아도 되는 여유.

옛사람은 말했다, 知足者富(지족자부) — 족함을 아는 자가 부자라고.
그 말은 옛말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 더욱 절실한 말이 되었다.

분수를 아는 사람은 남의 성공에 배 아파하지 않고, 자신의 속도로 걸어간다.
빚으로 쌓은 광채는 바람 앞의 촛불과 같아서, 한 번 훅 불면 꺼지고 마는 것.
그러나 분수 안에서 다져진 살림은 비록 화려하지 않아도, 폭풍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가진 것을 자랑하지 않고, 못 가진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마음 —
그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염치(廉恥)의 또 다른 이름이다.

세상은 더 가지라 재촉하지만, 사람을 끝까지 지켜주는 것은 더 가진 것이 아니라 넘치지 않게 지킨 것.
분수를 아는 삶이야말로, 요란한 세상 속에서 조용히 오래가는 삶이다
.

🌑 분수와 염치가 만날 때

황혼기의 삶은 이 둘이 만나면서 비로소 안정됩니다. 욕망을 줄이고, 부끄러움을 알고, 관계에 선을 두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세상과 연결되는 방식.

그렇게 하루가 조용히 굴러갑니다. 과장도 없고, 허세도 없고, 억지로 버티는 힘도 없습니다. 그저 지킬 것만 지키며 살아가는 담백한 삶이 됩니다.

본능과 숙고 사이에서

 본능과 숙고 사이에서의 균형은 인간이 마주하는 가장 오래된 지혜의 영역이자 진화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날아오는 물체를 피할 때처럼 생존을 위해 즉각적이고 자동적인 본능을 발휘하는 동시에, 잠시 멈추어 전체 맥락을 살피고 장기적 결과를 예측하는 깊은 이성적 숙고를 할 수 있는 독특한 존재입니다


행동경제학자들과 인지신경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현대 사회의 많은 갈등과 오류는 복잡한 현대 사회의 문제를 원시적인 본능과 직감만으로 해결하려 할 때 발생합니다. 반면 지나친 숙고는 결정을 늦추고 행동력을 떨어뜨리기도 합니다. 결국 삶의 지혜는 본능의 빠른 에너지를 활용하되, 숙고의 필터를 거쳐 이를 정제하는 조화에 있습니다
🧠 뇌 과학으로 보는 본능과 숙고
우리 뇌 안에서는 매 순간 본능의 영역과 숙고의 영역이 치열하게 상호작용합니다. 
  • 본능의 영역 (변연계 및 편도체): 식욕, 공포, 투쟁-도피 반응 등 생물학적 생존과 직결된 1차원적 감정과 욕구를 끊임없이 만들어냅니다. 학습되지 않은 선천적 프로그램입니다. 
  • 숙고의 영역 (전전두엽):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를 담당하며, 본능에서 오는 충동을 억제하고 사회적 규범에 맞게 행동을 조율합니다.

우리 안에는 두 개의 내가 있습니다.

하나는 오래된 본능의 나입니다.
생각하기 전에 반응하고,
눈앞의 것을 붙잡으려 하고,
위험하면 피하고,
상대가 나를 공격하면 맞서려 합니다.

다른 하나는 천천히 생각하는 나입니다.
한 번 더 생각하고,
결과를 헤아리고,
지금의 감정보다 내일의 평온을 선택하려 합니다.

문제는 늘 본능이 먼저 온다는 것입니다.

화가 나면 말이 먼저 나오고,
사고 싶으면 손이 먼저 움직이고,
먹고 싶으면 건강을 생각하기 전에 입이 먼저 움직입니다.

그리고 일이 벌어진 뒤에야
숙고하는 내가 나타나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살아보니 후회는 대개
그 몇 초를 기다리지 못해서 생겼습니다.

관계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누군가 나를 비판하면
나도 모르게 방어하고 싶어집니다.

부부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래 함께 살아온 사람일수록
상대의 말 한마디가 더 쉽게 마음을 건드립니다.

젊었을 때는 화가 나면 바로 말했습니다.
하지만 황혼의 문턱에 서 보니
모든 말에 대답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잠시 침묵하는 것,
한 번 숨을 고르는 것,
오늘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내일로 미루는 것.

그 작은 여백이
때로는 한 사람의 마음을 지키고
수십 년의 관계를 지켜줍니다.

건강도 다르지 않습니다

몸은 오늘의 편안함을 원합니다.

운동은 내일로 미루고 싶고,
맛있는 것은 더 먹고 싶고,
불편한 검사는 피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건강은
오늘의 작은 선택들이 쌓여 만들어집니다.

나이가 들수록 이것을 절실하게 느낍니다.

거창한 건강 비법보다
조금 덜 먹고, 조금 더 걷고,
잠을 잘 자고, 몸의 작은 신호를 무시하지 않는 것.

결국 건강을 지키는 것도
본능과 숙고 사이에서
한 번 더 생각하는 습관인지 모릅니다.

돈도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쓸 때는
지금의 만족이 먼저 보입니다.

투자를 할 때는
높은 수익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하지만 황혼의 문턱에서 돌아보면
얼마를 더 벌었느냐보다
얼마를 잃지 않고 지켰느냐가 더 중요해집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순간의 자존심 때문에
좋은 사람을 잃을 수 있고,
한 번의 말실수 때문에
오래된 관계에 금이 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묻습니다.

“지금 내가 이 말을 꼭 해야 하는가?”
“지금 이 결정을 꼭 내려야 하는가?”

대부분의 경우
조금 기다려도 늦지 않았습니다.

나이가 가르쳐준 가장 큰 지혜

젊었을 때는
빠르게 판단하는 것이 능력인 줄 알았습니다.

이제는 압니다.

빨리 반응하지 않는 것도 능력입니다.

감정이 올라와도 바로 행동하지 않고,
화가 나도 바로 말하지 않고,
좋은 기회처럼 보여도 바로 돈을 넣지 않고,
불안하다고 서둘러 결론 내리지 않는 것.

그 사이에 잠깐의 틈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 틈이 나를 지켜줍니다.

본능을 없애는 것이 지혜는 아닙니다.
본능은 여전히 우리 안에 있고,
때로는 우리를 위험에서 구해줍니다.

다만 본능이 앞서 달려갈 때
숙고가 따라올 시간을 주는 것.

어쩌면 나이가 들며 얻는
가장 귀한 능력은 바로 그것인지도 모릅니다.

한 박자 늦게 말하는 것.
한 번 더 생각하는 것.
그리고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황혼의 문턱에서 돌아보니
인생의 큰 후회들은 대개
그 한 박자를 기다리지 못해서 생겼습니다.

그리고 평온한 날들은
대개 그 한 박자를 기다릴 줄 알았던 날들이었습니다
.

본능과 숙고 사이,
그 짧은 여백에
지혜가 머뭅니다.

결국 지혜란 본능을 없애는 일이 아니다. 본능은 우리를 살아있게 하는 힘이며, 없애려 해서도 안 되고 없앨 수도 없다. 지혜는 본능이 말할 때 그것을 알아차리고, 숙고가 도착할 때까지 잠시 기다려주는 습관을 몸에 새기는 일이다. 돈이든, 사람이든, 건강이든, 사회든 — 후회 없는 삶의 대부분은 이 한 박자의 틈에서 만들어진다.

2026년 9월 11일 금요일

평범한 하루의 감사



 돌이켜보면 인생의 많은 순간들은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조용히 지나가는 평범한 하루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젊었을 때는 성취와 목표,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온 신경을 쏟았다. 오늘 하루가 어제와 얼마나 다른지, 무엇을 이루었는지가 중요한 기준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인생의 후반부에 접어들면서, 정작 소중한 것은 크고 화려한 일들이 아니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한 평범한 하루였음을 깨닫게 된다.

두 발로 걸을 수 있다는 것. 별다른 통증 없이 아침에 눈을 뜰 수 있다는 것.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골프장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 이런 것들은 젊었을 때는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다. 그러나 인생의 황혼에 이르러 보니, 당연했던 것들이 사실은 하나도 당연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매일 아침 두 발로 땅을 딛고 일어설 수 있다는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감사한 하루가 시작된 것이다.

현실을 살아가다 보면 몸이 예전 같지 않음을 느끼는 날들이 많아진다. 어제는 쉽게 하던 일이 오늘은 조금 힘에 부치기도 하고, 기억이 예전만큼 또렷하지 않을 때도 있다. 하지만 그런 현실 속에서도 오늘이 어제보다 조금 더 편안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완벽한 하루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어제보다 아주 조금 나은 오늘이면 족하다는 마음. 이것이야말로 나이가 들면서 얻게 되는 지혜가 아닐까 싶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좋은 하루가 있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아침에 창문을 열어 햇살을 마주하고, 따뜻한 차 한 잔을 마시며, 가족의 안부를 확인하고, 두 발로 천천히 걸어보는 것. 이 소박한 순간들이 모여 하루를 이루고, 그 하루들이 모여 인생이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남은 날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오늘 하루만큼은 있는 그대로 감사하며 살아가고 싶다.

오늘도 두 발로 걸을 수 있다는 것.
오늘도 내 마음이 감사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내가 오늘 받은 가장 큰 복입니다. 🙏🙏

내일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니 나는 아직 오지 않은 내일보다
지금 내 앞에 놓인 오늘을
조용히, 감사하게 살아가려 합니다.

스탠퍼드대 교수 2명이 사람들에게 '열정을 따르라'고 조언하는 것이 왜 좋지 않은 생각인지 설명했습니다.

 

Burnett과 Evans 는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열정을 찾아야 한다는 압박감이 진로에 대한 불안감을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스탠퍼드 교수 Bill Burnett 과 Dave Evans는 "열정을 따라가라"는 말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는 조언이라고 주장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의 열정만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 조언은 오히려 혼란을 야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Burnett교수는 "Prof G Podcast"에서 대학 학위가 인생의 방향을 결정짓는다는 생각에도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열정을 따라가라"는 말은 가장 흔하게 인용되는 진로 조언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스탠퍼드 교수이자 'Designing Your Life'의 저자인 Bill Burnett과 Dave Evans는 이 말이 사람들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Burnett교수는 목요일에 공개된 Scott Galloway 와 함께 진행한 "Prof G Podcast" 생방송 녹음에서 "이 말은 누군가에게 줄 수 있는 최악의 조언일 겁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이 좇을 만한 단 하나의 뚜렷한 열정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 스탠퍼드 대학 동료 학자인 빌 데이먼(Bill Damon)의 연구를 인용하며, Burnett은 "자신이 가진 열정이 무엇인지 명확히 꼽을 수 있는 사람은 20% 미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외 대다수 사람에게는 이러한 조언이 오히려 소외감을 줄 수 있습니다.Burnett은 "10명 중 8명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어요'라는 반응을 보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관심사가 '매우 다양'하지만 그중 무엇을 선택해야 할지 명확한 방법을 찾지 못하기도 합니다.

이로 인해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려던 조언이 오히려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드는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Burnett은 열정을 따르라는 조언이 대다수 사람에게 "'도대체 내게 무슨 문제가 있는 걸까?'라는 자책감을 안겨줄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대화가 이어지면서 Burnett은 불확실성을 대하는 또 다른 접근법을 제시했습니다. 바로 호기심에서 시작해 작은 실험들을 해보는 것입니다. 그는 "설령 인생의 가장 밑바닥에 있다고 느껴지는 순간이라도, 여전히 호기심을 느끼는 대상은 분명히 존재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두 사람은 이러한 접근 방식을 '프로토타이핑(prototyping)'이라고 부릅니다. 이는 돌이키기 어렵고 중대한 진로 결정을 내리는 대신, 해당 분야 종사자와 대화를 나누거나 프로젝트를 수행해 보거나 혹은 직접 업무를 경험해 봄으로써 자신의 관심사를 시험해 보는 방식입니다.

이는 특히 기존의 학위나 경력 경로에 얽매여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유용한 접근법입니다. 버넷(Burnett)은 '올바른' 전공을 선택해야 한다는 생각을 '역기능적 신념'이라고 지적하며, 대학 전공이란 '인생을 설계하는 방식'이 아니라 '대학 생활을 구성하는 방식'일 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삶의 목적이라는 질문에 대해 정해진 답을 찾아내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걸 알아낼 수는 없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저 해나가는 것뿐이죠."


또한 에반스(Evans)는 직업이 반드시 소득과 의미를 모두 제공해야 한다는 통념에 대해서도 반론을 제기하며, "의미를 찾는 일과 돈을 버는 일이 반드시 같은 것일 필요는 없다"고 강조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