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1월 3일 화요일

🍁 좋은 인연이 좋은 삶을 만듭니다

 


사람은 결국 곁에 있는 사람을 닮아갑니다

살다 보면 사람은 혼자만의 생각과 의지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누구를 만나고 누구와 시간을 보내느냐에 따라 생각이 달라지고 마음의 모습도 조금씩 변합니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 곁에 있으면 작은 것에도 고마움을 느끼게 되고, 따뜻한 사람과 함께하면 굳었던 마음도 부드러워집니다. 반대로 불평과 원망이 많은 사람 곁에 오래 있으면 나도 모르게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사람은 서로에게 물들며 살아갑니다.

젊을 때는 많은 사람을 알고 넓은 인간관계를 갖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만나는 사람의 숫자보다 마음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더 소중해집니다.

특별한 도움을 주고받지 않아도 좋습니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함께 식사하며, 별것 아닌 이야기에 웃을 수 있는 사람. 힘든 일이 있을 때 말없이 곁을 지켜주는 사람. 그런 인연이 삶을 지탱해 주는 힘이 됩니다.

물론 모든 사람과 마음을 맞추며 살 수는 없습니다. 생각이 다를 수도 있고, 때로는 서운함과 실망을 겪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모든 인연을 붙잡고 있을 필요도 없습니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관계라면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도 현명한 선택입니다.

중요한 것은 좋은 사람을 곁에 두는 것만이 아닙니다. 나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내 생각만 옳다고 주장하기보다 상대의 말을 들어주고, 사소한 일에 화를 내기보다 한 번 더 이해하려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고집은 줄이고 배려는 늘려야 합니다. 사람을 판단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여유도 배워야 합니다.

인생에서 돈과 재산은 생활을 편리하게 해주고 건강은 일상을 지탱해 줍니다. 하지만 마음을 나눌 사람이 있고 서로의 존재를 반겨주는 관계가 있다면 삶은 한결 덜 외롭습니다.

결국 행복은 특별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함께 밥을 먹을 사람이 있고, 안부를 물어줄 사람이 있으며, 서로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것. 평범해 보이는 그런 일상이 오히려 가장 귀한 행복일 수 있습니다.

좋은 인연은 많이 만나는 데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아끼고 존중하는 마음에서 오래 이어집니다.

남은 삶에서 무엇을 더 얻을 것인가만 생각하기보다 누구에게 편안한 사람이 될 것인가를 생각하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의 하루에 작은 위로가 되고, 함께 있는 사람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해주는 사람.

그런 사람이 곁에 있다면 행복한 일이고, 내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잘 살아가는 방법일 것입니다.

최고라는 말의 무게

 


나에게 좋은 것이 반드시 남에게도 좋은 것은 아니다

살다 보면 누구나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이 있고, 자신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

"이것이 최고다."
"이것만 한 것이 없다."

그러나 나이가 들수록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세상에 절대적인 최고란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것이다.

같은 음식도 누구에게는 최고의 별미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입에 맞지 않을 수 있다. 같은 집도 어떤 사람에게는 평생 살고 싶은 보금자리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불편한 공간일 수 있다. 사람마다 살아온 환경과 경험, 형편과 필요가 다르기 때문이다.

결국 무엇이 최고인지는 대상 자체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삶과 처지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돌아보면 나 역시 오랜 세월 내 판단과 경험을 기준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왔다. 오랜  미국 이민 생활 동안 낯선 문화와 언어 속에서 사업도 하고, 재산도 일구고, 여러 선택과 시행착오를 겪었다.

그때는 내가 옳다고 믿었던 판단들이 세월이 지나고 보니 반드시 옳았던 것만은 아니었다. 경험이 부족해서 서둘렀던 일도 있었고, 남의 생각을 충분히 듣지 않고 내 방식만 고집했던 순간도 있었다.

그런 시행착오를 거치며 배운 것은 사람마다 살아가는 방식이 다르고, 각자에게는 그럴 만한 사정과 이유가 있다는 사실이다.

나이가 들면 남의 잘못은 여전히 눈에 들어오지만, 내 잘못을 인정하는 일은 오히려 더 어려울 때가 있다. 오래 살아온 경험이 때로는 지혜가 되지만, 때로는 고집이 되기도 한다.

내가 옳다고 믿는다고 해서 상대가 틀린 것은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남도 좋아해야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특히 서로 다른 문화와 가치관이 공존하는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각자의 신념과 선택을 존중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동의한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나와 다르게 살아온 사람의 생각에도 그 나름의 자리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제 황혼의 나이에 내가 조금씩 내려놓으려는 것도 바로 이런 마음이다.

굳이 모든 일에 내 생각을 보태지 않아도 된다.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듣고, 때로는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넘어가는 여유도 필요하다.

젊었을 때는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일이 중요했다면, 이제는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보다 서로의 다름을 받아들이는 일이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물론 세상에는 분명히 옳고 그름을 가려야 할 일도 있다. 그러나 사소한 취향과 생각의 차이까지 내 기준으로 판단할 필요는 없다.

'나에게는 이것이 최고다'라는 말에는 겸손이 담겨 있지만, '이것이 세상에서 최고다'라는 말에는 때로 다른 사람의 자리가 사라진다.

남은 인생에서는 내가 옳다는 말을 조금 줄이고, 남의 이야기를 조금 더 많이 듣고 싶다.

최고를 가리는 일보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일이 더 어렵고, 어쩌면 그것이 나이 들어 배워야 할 진짜 지혜인지도 모르겠다.

인생의 황혼에 이르러 보니, 최고로 사는 것보다 서로를 인정하며 사는 것이 더 값진 일이다

다원화된 시대의 예의

오늘날 우리는 서로 다른 신념과 가치가 한 공간에 놓인 사회에서 산다. 이런 곳에서 필요한 것은 확신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확신에 작은 단서를 붙이는 습관이다. "나에게는 이것이 최고다"라는 말은 약하지 않다. 오히려 자기 경험에 정직하면서 상대의 경험에도 자리를 내주는 말이다. 반대로 "이것이 최고의 것이다"라는 말은 듣는 사람의 다른 삶을 지워 버린다.

다만 이 통찰은 나를 돌아보는 데 먼저 써야 한다. 남의 확신 앞에서 "그건 당신 상태일 뿐"이라고 꺼내 드는 순간, 그것은 통찰이 아니라 또 하나의 우월감이 된다. 옳은 말도 때를 놓치면 상대의 기쁨을 꺾는다. 상대가 원할 때, 충분히 들은 뒤에 나누어도 늦지 않다.

맺으며

"그렇구나" 하고 받아들이는 일은 쉬워 보여도 어렵다. 바로잡고 싶은 마음 밑에는 내가 옳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군가의 확신 앞에서, 혹은 내 확신 앞에서 잠시 멈추고 물어보면 좋겠다. 이 판단은 대상에서 나왔는가, 아니면 지금 나의 처지에서 나왔는가. 이 질문 하나가 논쟁의 자리를 이해의 자리로 바꿔 놓는다.

🍁 낙엽 지는 가을, 인생에서 남는 것들

 


소유보다 인연이 소중해지는 나이

가을이 깊어지면 나무는 하나둘 잎을 내려놓는다. 봄에는 새싹이 돋고 여름에는 푸르렀던 잎들도 계절이 바뀌면 결국 땅으로 돌아간다.

사람의 인생도 이와 다르지 않다.

젊음은 어느새 지나가고, 한창때의 자신감과 의욕도 세월 앞에서는 조금씩 빛을 잃는다. 한때는 밤낮없이 일해도 지치지 않았고, 무엇이든 마음만 먹으면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제는 몸이 먼저 세월을 알려준다.

자식들도 마찬가지다. 품에 안고 애지중지 키우던 아이들이 성장하면 부모 곁을 떠나 자기 삶을 살아간다. 서운하지만 그것이 자연스러운 인생의 순서다. 자식은 내 소유가 아니라 잠시 맡아 사랑으로 키운 한 사람의 인생이었다.

평생 모은 돈과 재산도 마찬가지다. 젊은 날에는 조금이라도 더 모으려고 애썼고, 노후에 대한 걱정으로 쉽게 쓰지도 못했다. 하지만 재산은 살아 있는 동안 필요한 것이지, 끝까지 움켜쥐고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쓰지 못하고 남긴 돈은 결국 다른 사람의 몫이 된다.

그렇다고 돈이 필요 없다는 뜻은 아니다. 노년에는 오히려 돈이 더 중요할 때도 있다. 병원비와 간병비, 주거비와 생활비가 현실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다만 돈이 삶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늦게나마 깨닫는다.

부부의 인연도 세월 따라 달라진다. 젊은 날의 모습은 사라지고 서로의 주름과 흰머리가 익숙해진다. 건강이 달라지고 생활 방식도 달라진다. 때로는 같은 집에 살면서도 각자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래도 오랜 세월 한집에서 기쁨과 어려움을 함께 견뎌온 사람이 있다는 것은 큰 복이다. 배우자 역시 내 소유가 아니라 서로의 남은 시간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소중한 동반자다.

여든다섯, 살아온 세월을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낯선 땅에서 가족을 위해 일하고, 사업과 재산을 일구며 살아온 시간이었다. 돌이켜보면 서두른 일도 많았고, 몰라서 치른 대가도 적지 않았다. 그때는 앞만 보고 달렸지만 이제는 지나온 길을 돌아볼 여유가 조금 생겼다.

나이가 들수록 또 하나 절실하게 느끼는 것이 있다. 바로 친구의 소중함이다.

오랜 친구는 많은 설명이 필요 없다. 서로의 젊은 날을 기억하고, 이민 생활의 고생과 세월의 변화를 함께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만나면 지나간 이야기에 웃음이 나고, 헤어지고 나면 다시 보고 싶어진다.

이제 친구 사이에도 안부가 달라졌다.

예전에는 무슨 일을 하는지, 얼마나 성공했는지 물었지만 이제는 건강은 어떤지, 병원에는 다녀왔는지, 잘 걷고 잘 먹는지가 먼저 궁금하다. 누군가의 입원 소식이나 부고를 들으면 남의 일 같지 않다. 우리도 같은 시간을 지나고 있기 때문이다.

건강을 지켜야 하는 이유도 달라졌다. 나 자신이 편안하게 살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친구를 만나고 가족과 식사하고 함께 웃을 수 있는 시간을 지키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물론 나이가 든다고 모든 것이 저절로 편안해지는 것은 아니다. 몸이 아플 수도 있고, 경제적인 걱정도 생기며, 가까운 사람과 이별하는 일도 늘어난다. 노년은 낭만만으로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그래서 더욱 현실을 받아들이고, 가진 것을 지키며, 하루하루를 소중하게 살아야 한다.

앞으로 몇 년을 더 살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5 년이 될 수도 있고 그보다 길 수도 있다. 그러나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계산하는 것보다 오늘 하루를 무사히 보내고 내일 만날 사람을 생각할 수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

이제는 더 많이 가지려고 애쓰기보다 지금 가진 것에 감사하고 싶다. 만나고 싶은 사람은 미루지 말고 만나고, 고마운 사람에게는 고맙다고 말하며, 함께 식사할 수 있을 때 한 끼라도 더 나누고 싶다.

낙엽은 떨어지면서 계절을 마무리하지만, 그 자리에 남긴 흔적은 다음 봄의 밑거름이 된다.

우리 인생도 그랬으면 좋겠다.

젊을 때는 재산을 모으느라 바빴고, 중년에는 가족을 위해 살았으며, 노년에는 사람의 소중함을 배운다.

친구들이여, 아직 함께 걸을 수 있을 때 자주 만나세. 건강 잘 챙기고, 맛있는 것 함께 먹으며, 별일 아닌 일에도 웃어보세. 헤어질 때는 다음 만남을 약속하세.

인생의 황혼에 이르러 깨닫는다.

얼마나 많이 소유했느냐보다 누구와 함께 살아왔느냐가 더 중요하고,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보다 남은 시간을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친구여, 부디 건강하게 오래오래 함께하세.


와튼스쿨 교수가 어떤 직업도 AI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와튼스쿨 교수는 'AI가 대체할 수 없는' 직업이란 존재한다는 생각에 의문을 제기하며, 신입 직원 교육 체계가 무너지고 있다고 경고한다.

인공지능 시대에 살아남는 두 가지 일반적인 방법은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법을 배우거나, 손으로 하는 일을 통해 인공지능의 영향을 받지 않는 직업을 찾는 것입니다. 하지만 와튼 스쿨의 에단 몰릭 교수는 신간 『공존(Co-Existence)』에서 이 두 가지 방법 모두 믿을 만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피터 카프카의 팟캐스트 '채널스(Channels)'에 출연해 그 이유와 함께, 대신 무엇을 만들어야 하는지 설명했습니다.

와튼 경영대학원의 에단 몰릭 교수는 배관이나 간호와 같은 실무 기술직으로 전환하는 것이 AI로 인한 일자리 감소에 대한 확실한 방어책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며, 로봇 기술의 발전으로 결국 이러한 직종마저 자동화될 수 있다고 경고합니다. 그의 신간 "공존(Co-Existence)"에서 그는 AI 모델의 발전 속도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며, 유일한 현실적인 대응책은 AI와 함께 살아가고 일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몰릭 교수는 숙련된 근로자는 AI가 모방할 수 없는 "취향"과 같은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만, 전통적인 교육 시스템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시점에 젊은 세대가 노동 시장에 진입하는 것에 대한 의문을 제기합니다. 그는 단순히 "AI 사용법을 배우라"거나 AI에 영향을 받지 않는 직업을 추구하라는 일반적인 조언을 반박하며, 로봇 전문가들이 LLM(로봇 공학 석사)에 의한 자동화를 일축하던 시각에서 벗어나 실질적인 발전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 발언은 피터 카프카와 함께 채널스 팟캐스트에 출연해 인공지능이 현재의 직업과 아이들의 미래 진로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논의하는 과정에서 나왔습니다.


몰릭 교수는 "플럼봇 6000(PlumBot 6000)"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배관공이나 간호사 같은 직종은 안전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한때 이 아이디어를 비웃었던 그의 로봇공학 친구들도 이제는 그 존재를 인정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인공지능 전문가를 포함해 누구도 미래를 예측할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이 분야에서 일자리가 늘어날지 줄어들지는 의문이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코더의 역할이 계속해서 진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완벽한 코드를 작성하는 능력보다, 자신이 무엇을 만들고 싶은지 구상하는 능력이 훨씬 더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AI 시대에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네 가지 요소

몰릭(Mollick)은 AI를 상대로 어느 정도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네 가지 요소를 제시합니다.


깊은 지식: 특정 분야에 대한 전문성은 AI보다 뛰어난 성과를 낼 수 있게 해줍니다.

넓은 지식: 다양한 분야에 대해 많이 알수록 AI를 더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습니다.

안목(취향): AI는 방대한 결과물을 만들어내지만, 당신의 안목이 있어야 그 결과물이 저질로 전락하지 않습니다.

주도권: 무엇을 만들지 결정하는 것은 바로 당신입니다.

그는 이제 'AI 사용법을 배우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프롬프팅(명령어 입력)은 사실상 '관리'에 가깝습니다. 당신은 결과물의 형태, 좋은 결과물의 기준, 테스트 방법, 그리고 중간 점검 단계에서 무엇을 확인할지 등을 구체적으로 지시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 선택할 수 있도록 다섯 가지 시안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는 식이죠.


더 큰 고민은 '안목'을 어떻게 기를 것인가 하는 점입니다. 과거에는 도제식 교육을 통해 신입 사원들이 단순 반복 업무를 수행하는 대신 기술과 인맥을 얻었고, 관리자들은 그 대가로 업무 지원을 받았습니다.


몰릭에 따르면, 이러한 순환 구조는 이제 끝났습니다. 신입 사원들은 업무를 수행할 때 전적으로 AI에 의존하게 되면서, 결과물을 평가할 만큼 충분한 경험을 쌓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AI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을 굳이 인턴을 고용해서 시킬 이유가 있을까요?


고용주들은 인턴에게서 기대 이하의 성과를 얻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대학과 같은 고등 교육 기관에 대해서는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AI가 훌륭한 개인 교사 역할을 할 수 있고, AI를 배제한 채 수업 내에서 평가를 진행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고등 교육 기관이 직업 학교와 유사한 형태로 교육을 전담하게 되거나, 아니면 기업들이 생산성 측면에서 비용이 들더라도 멘토링을 하나의 '실질적인 노동'으로 간주하고 이를 수행해야 하는 상황이 올 것입니다.

2026년 11월 2일 월요일

곁에 있는 벗이 가장 귀한 재산입니다

 


젊어서는 친구가 저절로 생기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 보니, 벗은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애써 지켜야 얻는 것이었습니다.

미국에 와서 55년을 살았습니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시작해 뉴저지, 뉴욕, 펜실베이니아의 작은 도시를 거쳐 지금의 필라델피아까지, 일자리를 따라 여러 도시를 옮겨 다녔습니다. 이사할 때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났고, 이사할 때마다 정든 사람과 멀어졌습니다. 그때는 먹고사는 일이 바빠서, 연락이 뜸해지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바쁘게 살다 보면 소식이 끊기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은퇴하고 시간이 생기니 비로소 그 빈자리가 보입니다. 지나온 도시마다 얼굴이 떠오르는 사람이 있는데,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때 한 번만 더 전화해 볼 것을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얼마 전 벗에게 건네는 글 한 편을 읽었습니다. 틈틈이 운동하고, 틈틈이 만나 별것 없는 얘기를 실컷 하자는 내용입니다. 모자라면 받쳐주고 넘치면 나눠주자는 구절도 있었습니다. 읽다 보니 우정이라는 것이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부를 묻고, 밥 한 끼 같이 먹고, 서운한 일이 있어도 돌아서지 않는 것,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특히 "내가 부린 것도 아집이요, 네가 부린 것도 아집이니"라는 대목에서 오래 머물렀습니다. 살아 보니 사람 사이가 멀어지는 이유는 큰 잘못 때문이 아니라 사소한 서운함과 고집 때문일 때가 많았습니다. 누가 옳았는지는 시간이 지나면 기억도 나지 않는데, 서먹해진 마음은 오래 남습니다.

이 나이가 되면 새로 사귀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이 더 귀합니다. 그렇다고 거창한 것을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몇 가지만 실천해 보려 합니다.

첫째, 먼저 연락하는 것입니다. 기다리면 상대도 기다립니다. 둘째, 만나면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들어주는 것입니다. 셋째, 몸이 허락하는 동안 함께 걷고, 함께 먹고, 함께 웃는 것입니다.

한 세상 살면서 이름 석 자 남기겠다고 애쓰는 일도 의미가 있겠지만, 결국 남는 것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 "그 사람 참 좋은 친구였지" 하는 한마디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오래 연락하지 못한 벗에게 전화를 한 통 해 보려 합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도 마음에 떠오르는 분이 계시다면 먼저 손을 내밀어 보시기 바랍니다. 목소리만 들어도 좋은 것이 벗이니까요.

천천히, 천천히 늙어가면서, 그 길을 함께 걸을 사람이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히 잘 산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 「친구여 벗이여 아프지 마세나」 중에서 일부 구절을 인용했습니다.)

인생의 바닥에서 바라본 풍경

 


우리는 중년에 종종 불행을 느낍니다. 여러 나라의 연구에서 행복도가 인생 전반에 걸쳐 U자형 곡선을 그리며, 보통 40대 중반에서 50대 초반 무렵 가장 낮아진다는 결과가 반복해서 나타났습니다. 이상한 일입니다. 직장에서 자리를 잡고 집도 마련하고 아이도 키워 낸, 남들이 보기에 가장 안정된 시기에 마음은 오히려 가장 무겁다니요.

이유를 짐작해 볼 수는 있습니다. 젊을 때는 승진, 연봉, 더 큰 집 같은 목표가 삶을 앞으로 끌고 갑니다. 그런데 막상 그것들을 손에 넣고 보면 기대만큼 마음이 채워지지 않습니다. 부모를 돌보면서 동시에 자녀를 뒷바라지하고, 일터에서는 더 젊은 사람들과 경쟁해야 하는 이중, 삼중의 짐도 이 시기에 겹칩니다.

요즘은 여기에 새로운 무게가 더해졌습니다. 스마트폰을 열면 또래들의 성공과 여행, 자랑스러운 가족사진이 쉴 새 없이 흘러나옵니다. 비교는 예전에도 있었지만, 이제는 비교할 대상이 손바닥 안에서 하루 종일 따라다닙니다. 기술은 빠르게 바뀌어 한 번 쌓은 전문성이 언제까지 통할지도 불안합니다. 한편 수명은 길어져서, 중년은 인생의 끝이 아니라 아직 절반쯤 남은 지점이 되었습니다. "이대로 앞으로 30~40년을 더 살아도 괜찮을까?"라는 질문이 그래서 더 절실해집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직장을 옮기고, 공부를 다시 시작하고, 전혀 다른 길을 찾아 나섭니다. 이것을 위기라고만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동안 믿어 온 기준이 맞았는지 처음으로 진지하게 묻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 곡선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U자의 오른쪽입니다. 여러 연구에서 행복도는 바닥을 지난 뒤 다시 올라가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은 이루지 못한 것보다 지금 가진 것을 더 소중히 여기게 되고, 감정을 다루는 데 능숙해지며, 관계의 수보다 깊이를 택하게 됩니다. 바닥은 머무는 곳이 아니라 방향이 바뀌는 곳입니다.

다만 이 곡선이 모든 사람에게 같은 모양으로 적용되는 법칙은 아닙니다. 최근에는 젊은 세대의 불안과 우울이 커지면서 곡선의 모양이 달라지고 있다는 논의도 있습니다. 그러니 "몇 살에 가장 힘들다"는 숫자보다, 힘든 시기가 누구에게나 올 수 있고 지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 더 의미 있는 메시지일 것입니다.

지금 바닥을 지나고 있는 분들께 드리고 싶은 말은 이렇습니다. 지금의 불행은 잘못 살아서 생긴 것이 아니라, 삶의 기준을 다시 세울 때가 되었다는 신호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신호에 귀 기울인 사람에게 인생의 오른쪽 길은 생각보다 훨씬 환하게 열려 있습니다.



이 나이에 다시 생각하는 행복의 의미 !!

젊었을 때는 행복을 멀리 있는 목표처럼 생각했습니다. 돈을 더 벌고, 사업을 일으키고, 좋은 집을 마련하고, 자녀들이 잘 자라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무엇인가를 이루고 더 많이 가져야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회과학에는 '행복의 U자형 곡선'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평균적인 행복감이 젊은 시절에는 비교적 높다가 중년기에 낮아지고, 노년기에 다시 높아지는 경향을 설명합니다. 물론 모든 사람의 인생이 이 곡선을 따라가는 것은 아닙니다. 건강과 경제 형편, 가족관계에 따라 노년의 삶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개념을 생각하다 보면 한 가지 깨달음이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행복의 조건이 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젊었을 때는 더 많이 가지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황혼의 나이가 된 지금은 가진 것을 지키는 일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돈을 많이 버는 것보다 노후 생활비에 큰 걱정이 없는 것이 좋고, 좋은 집을 소유하는 것보다 그 집에서 건강하게 생활할 수 있는 것이 더 소중합니다. 멀리 여행을 떠나는 것보다 오늘 내 발로 동네를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게 다가옵니다.

이제는 건강의 소중함을 압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는 것, 식탁에 마주 앉아 따뜻한 식사를 나눌 사람이 있다는 것, 오랜 세월 함께한 배우자의 안부를 살필 수 있다는 것이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물론 나이가 든다고 모든 걱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몸은 예전 같지 않고, 병원 갈 일도 늘어납니다. 가까웠던 친구들은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남은 사람들의 빈자리는 점점 커집니다. 배우자의 건강과 앞으로의 생활도 걱정입니다.

노년의 행복은 현실을 외면한다고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지 알 수 없기에 오늘의 평범한 일상을 소중히 여기는 데서 시작되는 것 같습니다.

지금 까지 살아오면서 이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좋은 날은 반드시 특별한 날이 아닙니다. 큰 탈 없이 하루를 보내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저녁을 맞으며, 잠자리에 들 때 오늘도 고마웠다고 생각할 수 있는 날입니다.

행복은 오래 사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남은 날들을 얼마나 평온하고 감사하게 살아가느냐에 있는 것 같습니다.

황혼의 인생,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기



 나이가 들수록 시간은 달력이 아니라 몸으로 먼저 느껴집니다. 계단을 오를 때 한 번 더 숨을 고르게 되고, 어제 일은 흐릿한데 오래전 일은 어제처럼 선명합니다. 처음에는 이런 변화가 서운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것이 나이가 주는 쉼표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천천히 가도 된다는 신호이고, 지나온 길을 돌아보라는 초대장입니다.

이제는 무엇을 이루었느냐보다 어떻게 살아왔느냐가 중요하다.

나이가 들면 인생을 바라보는 눈도 달라진다.

젊었을 때는 남보다 앞서야 했고, 더 많이 벌어야 했으며, 무언가를 이루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바쁘게 살았다. 가족을 위해 일했고, 생활을 위해 뛰었으며, 내일은 오늘보다 나아지리라는 기대를 안고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인생의 황혼에 들어서니 생각이 달라진다.

이제는 남에게 인정받는 일도, 남보다 더 많이 갖는 일도 예전만큼 중요하지 않다. 건강은 마음먹은 대로 따라주지 않고, 걸음은 느려지며, 가까이 지내던 사람들도 하나둘 우리 곁을 떠난다. 살아온 세월만큼 잃어가는 것도 많아지는 것이 노년의 현실이다.

돌아보면 잘한 일보다 아쉬운 일이 먼저 떠오르기도 한다. 조금만 더 신중했더라면, 그때 조금만 덜 서둘렀더라면, 가까운 사람에게 조금 더 따뜻하게 대했더라면 하는 생각들이다.

살면서 실수도 했고, 때로는 내 욕심 때문에 판단이 흐려진 적도 있었다. 누구에게나 부끄러운 순간과 후회되는 선택은 있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그런 잘못을 인정하고 남은 삶에서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마음일 것이다.

이제 와서 대단한 업적을 남기겠다는 생각은 없다. 그렇다고 남은 인생을 그저 흘러가는 대로 살고 싶지도 않다.

남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 주지 않으며, 할 수 있는 만큼 서로 돕고 살아가는 것. 몸이 허락하는 날에는 두 발로 걷고, 식탁에 마주 앉아 따뜻한 밥 한 끼를 나누며, 별일 없는 하루에도 감사할 줄 아는 것.

어쩌면 노년의 행복은 그런 소박한 일상 속에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마음처럼 되지 않는 날도 있다. 몸이 아프고, 경제적인 걱정이 생기고, 가족의 건강 문제로 마음을 졸이기도 한다. 나이가 들었다고 걱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제는 내 건강뿐 아니라 배우자의 건강과 남은 가족의 삶까지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더욱 욕심을 줄이고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 필요하다.

인생의 마지막을 앞두고 돌아보았을 때 얼마나 성공했느냐보다 누구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 것인가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돌아보면 인생에서 가장 소중했던 것은 이름도, 지위도, 재산도 아니었습니다. 사랑했던 사람들과 함께한 시간, 그리고 그 시간 속에서 지켜온 작은 양심이었습니다. 부끄럽지 않게 살고자 애쓴 하루하루가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습니다.

저녁노을은 아침 해보다 더 깊고 아름다운 빛을 냅니다. 황혼은 끝이 아니라 하루 중 가장 고운 빛깔로 마무리하는 시간입니다. 남은 날들이 얼마인지는 알 수 없으나, 오늘 하루를 감사로 열고 사랑으로 닫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오늘도 이렇게 다짐합니다. 서두르지 않고, 비교하지 않고, 감사하며, 따뜻한 사람으로 남은 길을 걷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