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5일 금요일

살아 있는 한, 우리는 달린다

 


성공보다 소중한 것

현대 사회는 성공을 중요한 가치로 여긴다. 좋은 대학에 진학하고, 안정된 직업을 얻고, 높은 지위와 많은 재산을 갖는 것이 성공의 기준으로 여겨지곤 한다. 사람들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며 자신의 능력을 발전시킨다. 이러한 노력은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지만, 때로는 성공 자체가 삶의 목적이 되는 경우도 있다. 이때 우리는 한 가지 질문을 던져 볼 필요가 있다. 과연 우리는 성공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일까, 아니면 살아 있기 때문에 성공을 추구하는 것일까?

성공은 분명 가치 있는 목표이다. 자신의 꿈을 이루고 사회에 기여하며 성취감을 느끼는 것은 인간에게 큰 행복을 준다. 그러나 성공이 삶의 전부가 될 수는 없다. 성공을 위해 건강을 잃고, 가족과 친구를 멀리하며, 자신의 행복마저 포기한다면 그것은 진정한 성공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삶이 존재하기 때문에 성공도 의미를 가지는 것이지, 성공이 삶 자체를 대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노자의 귀생 사상은 이러한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한다. 노자는 생명을 가장 귀한 가치로 보았다. 그는 사람들이 명예와 재물을 좇다가 정작 자신의 몸과 마음을 해치는 모습을 경계하였다. 생명은 모든 가치의 출발점이며, 생명이 있기에 꿈도, 사랑도, 성공도 존재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은 무엇보다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기고 보존해야 한다.

우리는 종종 더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 현재의 행복을 미루곤 한다. 그러나 성공은 삶을 위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다. 살아 있기 때문에 우리는 꿈을 꾸고 목표를 세우며 성공을 추구한다. 따라서 성공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도 자신의 건강과 인간관계, 그리고 삶의 의미를 잃지 않아야 한다.

결국 진정한 성공은 단순히 많은 것을 얻는 데 있지 않다.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기면서도 의미 있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데 있다. 우리는 성공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기 때문에 성공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기억할 때, 성공은 우리를 지배하는 목적이 아니라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드는 가치 있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살아 있는 한, 우리는 달린다

우리는 흔히 성공하기 위해 살아간다고 말한다. 더 높은 곳에 오르고, 더 많은 것을 쥐어야만 비로소 가치 있는 삶이라 믿으며 마라톤의 결승선만을 바라보듯 숨 가쁘게 달린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발걸음을 멈추고 돌아보니, 본질은 그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성공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기 때문에 성공을 추구하는 것이다.

마치 봄이 오면 대지 뚫고 나오는 새싹처럼, 살아 있는 생명은 가만히 멈춰 있을 수 없다. 씨앗이 꽃을 피우려는 것은 어떤 대단한 명예를 얻기 위함이 아니다. 그저 살아 숨 쉬는 생명의 에너지가 안에서 꿈틀거리기에, 자연스럽게 위를 향해 뻗어 나가는 것뿐이다. 인간의 성취욕 또한 마찬가지다. 무언가를 시도하고, 배우고, 더 나은 내일을 꿈꾸는 모든 행위는 내가 지금 살아 있다는 가장 뜨거운 증거이자 역동적인 몸짓이다.

인생이라는 여정에서 진정한 성공은 남들이 세워둔 기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주어진 생명력을 매 순간 밀도 있게 피워내는 데 있다. 오늘 걷는 오천 보의 걸음 속에, 푸른 필드 위에서 휘두르는 클럽의 궤적 속에, 그리고 비워진 마음의 빈터에 깃드는 평온 속에 내 삶은 이미 온전히 완성되어 있다.

나이 드는 것은 시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삶의 군더더기를 버리고 가장 본질적인 생명의 핵심만을 남겨가는 과정이다. 내 몸의 시계는 흘러갔을지언정, 내 안의 영혼은 여전히 청춘의 역동함으로 숨 쉬고 있다. 살아 있는 한, 나는 오늘을 살고, 오늘을 살아내기에 여전히 무언가를 향해 기분 좋은 발걸음을 내딛는다. 성공이라는 목적지가 아닌, '살아 있음'이라는 찬란한 축제를 누리기 위하여.

기관사 출신 노동부장관; 완전 공산당이네 !!

 

김영훈 노동부 장관 "대기업 AI 초과이익, 협력사와 공유해야"

뭔ㄱㅐ 소리야 기업이윤에 초과이윤이라니? 기업이윤은 얼마까지라고 정해놨나?



기업이윤은 얼마까지고 그리고 초과이윤은 얼마까지인지 기준을 정해라 노동부장관님 ??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이 4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노동 현안 '전국 기관장 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연합뉴스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은 5일 대기업의 인공지능(AI) 시장 성장세에 따른 초과 이익 분배 방안 중 하나로 ‘협력사 계약 단가 조정’을 언급했다.

이날 공개된 로이터 인터뷰에서 김 장관은 “삼성의 놀라운 성과가 노사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면서도 “여기에는 1700여 협력 업체가 있으며, 용수 및 전력 공급을 포함한 지역 사회 기여도가 존재한다”며 이같이 밝혔다.

김 장관은 국민의힘이 초과 이익을 두고 ‘공산주의’라고 비판하는 것에 대해 “내가 말하는 분배는 협력 업체와 이익을 공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명백한 재투자”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협력 업체와의 계약 단가 조정이 초과 이익 분배의 방식 중 하나라고 제시했다.

또 김 장관은 대기업의 성과급 확대에 대한 부작용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대기업에서 성과급 지급이 확대되면 중소기업과 임금 격차 등이 더욱 벌어질 수밖에 없고, 대기업을 선호하는 성향이 심화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김 장관은 지난달 27일 “대기업의 초과이익을 어떻게 사회적 분배할 것인가에 대한 유일한 해법은 사회적 대화밖에 없다”며 노동부 주관으로 ‘한국형 사회연대임금 토론회’를 열겠다고 밝힌 바 있다.


2026년 6월 4일 목요일

[박은식의 호남통신] 민주당 호남 독점, '파란 나라'의 실상 (조선 일보에서)

 


광주·전남북 유권자 34~44%가 민주당원
공고한 독점 구조로 민주주의 파괴 횡행
"너희들은 피해자다" 속삭이며 표밭 유지

5·18도 진보 진영에 의해 철저히 사유화
정권은 한예종 이전도 전리품으로 추진
예술인들이 기득권의 실체 목격하기를


지난 4월 더불어민주당 정준호 의원이 대표 발의한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의 전남·광주 통합특별시 이전 법안으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문화예술 산업은 예술가와 투자자, 제작사, 교육기관, 관객이 유기적으로 얽혀 돌아가는 생태계다. 서울에 집중된 이 생태계와 단절된 채 학교만 옮긴다면 K-문화예술 인재의 요람인 한예종이 지금의 명성을 유지하기 어려울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6·3 지방선거에 맞춰 추진된 이 계획은 문화예술 산업의 발전이나 학생들의 교육 환경 개선보다는 정권의 전리품 배분에 불과했다. 학생들의 성명 발표와 반대 여론이 이어지면서 논의는 중단됐다.

평소 광주의 문화예술 산업을 발전시키려면 기업의 투자 환경 조성과 기존 대학 지원이 우선이라고 주장해 왔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한예종이 광주에 오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대중적 영향력이 큰 예술인들이 ‘진짜 기득권’의 모습을 직접 목격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예술계에는 반기업·반보수 정서가 널리 퍼져 있다. 영화 ‘베테랑’이나 ‘내부자들’처럼 보수 정치인과 언론, 기업가를 ‘거악’으로 설정한 작품들은 대중에게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며 이러한 인식을 강화해 왔다. 하지만 예술인들이 광주에 온다면 전혀 다른 생각을 갖게 될 것이다. 광주는 진보 진영으로 분류되는 민주당과 노조, 그리고 특정 시민단체들이 절대적 기득권으로 자리 잡은 곳이기 때문이다.

최근 개봉한 영화 ‘빨간 나라를 보았니’는 민주당의 험지인 경북에 출마한 임미애 의원과 남편 김현권 전 의원의 분투기를 그렸다. “꽃은 되지 못하더라도 거름은 될 거다. 거름이 되어야 서울에 꽃이 핀다”는 예고편의 대사를 보며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 두 사람 모두 이미 비례대표 의원직을 지냈고, 출마한 선거마다 20~30%대 득표율을 기록해 선거비용 전액 보전을 받아왔기 때문이다. 경북은 더 이상 ‘빨간 나라’라기보다 파란색이 섞인 보라색 지역에 가깝다.

경북의 험지에 출마하는 민주당 파란 후보들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빨간 나라를 보았니'의 한 장면.

반면 호남은 진정한 의미의 ‘파란 나라’다. 2024년 총선 당시 호남 28개 지역구에서 비민주당 후보 가운데 선거비를 보전받은 인물은 이정현·정운천 전 의원뿐이었다. 이 높은 벽의 원인을 들여다보면 경악할 통계가 나온다. 전북은 유권자의 44.4%인 67만3905명이 민주당원이다. 전남은 유권자의 37.2%(58만2498명), 광주는 34.7%(41만6897명)가 민주당원이다. 대구의 국민의힘 당원 비율 12.4%, 경북의 17.7%와 비교하면 압도적인 수치다.

이런 공고한 독점 구조는 민주주의를 무너뜨린다. 이번 6·3 지방선거에서 호남의 무투표 당선자 126명 중 125명이 민주당, 나머지 1명은 진보당 소속이었다. 경선 승리가 곧 당선이니 구태가 판을 친다. 장성에서는 경로당 주민의 휴대폰 10여 대를 모아 ARS 투표를 조작하려 했고, 화순에서도 대리응답 적발로 경선이 멈췄다. 광양에서는 현금 781만원을 쌓아두고 불법 전화방을 운영하던 예비후보가 적발돼 자격이 박탈됐다. 선관위가 들이닥쳤을 때 문이 잠겨 있지 않았을 정도로 범죄 자각이 없는 매관매직의 현장이건만, ‘민주주의 성지’라는 이곳에서 민주주의 파괴 행위는 화제조차 되지 않는다.

이곳은 기업가가 아닌 노조와 시민단체가 ‘갑’이다. 대기업 노조는 임금협상을 넘어 지역 내 현안에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일부 시민단체는 복합쇼핑몰 입점까지 가로막았다. 여기에 과도한 공공기여 요구까지 더해지니 호반, 중흥, 우미 등 향토 건설사는 본사를 서울로 이전했다. 그러니 지역 경제는 더욱 위축됐고, 결국 중앙재정 의존도가 높아졌다. 호남 지역의 재정 자립도는 전국 최하위권인 반면 기초생활수급자 비율은 가장 높다. 교통사고 보험금을 노린 한방병원 비율은 전국 최고 수준을 기록했다. 예술인들의 작품을 소비해줄 민간 자본이 부족하니 정권이 추진하는 프로파간다 사업에 의존하는 구조가 형성되면서 그 먹이사슬에 편입되지 못한 예술인들은 호남을 떠나고 있다.

5·18은 진보 진영에 의해 철저히 사유화됐다. 참배하러 오는 보수 정당 지도부를 테러하고, 젊은 직원들의 마케팅 실수를 빌미로 국가 권력이 불매운동을 부추기며 평소 보수 성향 목소리를 내온 기업가를 압박한다. 하지만 과거 5·18 전야제 당일 유흥주점 술자리에 참석했던 김민석, 송영길, 우상호 등은 수십 년간 정치권에서 승승장구하며 이번 지방선거와 보궐선거에도 출마했다. 심지어 정원오 서울시장 후보는 5·18을 자신의 주취 폭행 사건에 대한 알리바이로 활용했다. 오월 단체들이 주최하는 전야제 행사에는 보수 인사와 언론을 ‘액(厄)’이라 비하하는 노래까지 등장했다. 스타벅스 측의 사과는 진정성이 없다고 비난하면서도 민주당 인사들의 5·18 사유화에는 비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5·18을 통해 호남 유권자들에게 “너희들은 영원한 피해자”라고 속삭이며 독점적 표밭을 유지한다.

지난 4월 28일 서울 성북구 한국예술종합학교(한예종) 예술극장 앞에서 한예종 총학생회가 한예종 광주 이전 법안 발의에 반발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뉴시스

한예종 학생들이 이런 광주의 모습을 본다면 ‘보수 정당과 기업가는 악’이라는 단순한 도식에서 벗어나 우리 사회를 더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될 것이다. 무엇이 도시를 쇠퇴시키는지, 진정한 지방분권이 무엇인지 고민하게 될 것이다. 노동자뿐 아니라 기업가의 역할, 진보뿐 아니라 보수의 가치에 대해서도 새롭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광주의 기득권 구조와 모순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파란 나라’의 실상을 담은 예술작품도 탄생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파란 나라 보여주기’는 없던 일이 됐지만, 이번 소동을 통해 많은 이가 그 실체를 조금이나마 알아보는 계기는 되었을 것이다. 언젠가 한예종 출신이 이를 예술작품으로 만들어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2026.06.05 05:06
내가 조선 논평기사 댓글로 자주 거론했던 '지역주의 균형 붕괴가 망국 근원'이란 주제를 이 글과 동일 맥락에서 다시 거론하련다. 이번 지선 개표결과도 그렇듯이 전라도는 40년간 좌파후보들 합계90%대 보수10%미만의 북한식 몰표행태를 보였다.(부울경은 반반 TK는 40대60) 더 심각한 건 의석수가 몰려있는 서울 경기에 사는 그곳 출신과 2세 3세 집단의 현지민과 똑같은 몰표다. 다른 지역 연고자들은 좌우에 50대50내지 40대60으로 찍을 때 그곳 연고집단은 좌파에만 90%대 몰표를 찍어 좌파의 싹쓸이로 입법부 좌파화를 만들어 온갖 패악질을 해대도록 판을 깔아주는 주역들이다.전라도 사람들이야말로 민주니 정의니 좋은 소리는 제일 크게 떠들어대는 사람들 아닌가? 근데 실제 행태는 모순으로 가득 찬 반민주 전체주의 인민들 같다. 나라 생각은 없고 오로지 보수에 복수한다는 생각만으로 김정은도 편들어가며 이 땅에서 살아가고 있다. 지역주의는사라지는게좋다지만 한쪽만약해지는건망국지름길이다.



아픈 것도, 기쁜 것도 드러내지 마라

 사람은 감정을 가진 존재이지만, 동시에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보여지는 나”와 “느끼는 나”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 “아픈 것도 기쁜 것도 드러내지 마라”라는 말은 그 긴장 속에서 나온 오래된 생존의 문장처럼 들린다.

이 말의 표면은 단호하다. 슬픔도 기쁨도 밖으로 내보이지 말라는 것. 언뜻 보면 감정을 억누르라는 냉정한 충고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 속을 조금 더 들여다보면, 단순한 억압이라기보다 “조심하라”는 경고에 가깝다. 사람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선의로만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기쁨은 때로 시기를 부르고, 아픔은 때로 약점이 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것을 하나의 방어 전략으로 삼는다.

마음의 풍경화, 여백의 미학

우리는 감정을 쏟아내는 것이 미덕인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기쁨은 온 동네에 소리 높여 자랑해야 하고, 슬픔과 아픔은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라도 세상에 전시해야 위로받는 세상입니다. 감정을 숨기면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 되고, 감정을 아끼면 차가운 사람이라 오해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득, 삶의 깊은 골짜기를 지나온 이의 담담한 한마디가 발걸음을 멈추게 합니다. "아픈 것도, 기쁜 것도 드러내지 마라."

이 말은 감정을 무조건 억누르고 참으라는 인내의 강요가 아닙니다. 오히려 내면에 거대하고 단단한 중심축을 세우라는, 삶을 향한 묵직한 조언에 가깝습니다.

아픔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

나이가 들고 삶의 궤적이 길어질수록, 우리가 마주하는 아픔의 무게는 결코 가벼워지지 않습니다. 몸의 삐걱거림일 수도 있고, 마음의 쓸쓸함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아픔을 세상에 소리 높여 외치지 않는 이유는, 나의 아픔이 타인에게는 또 다른 짐이 될 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나의 아픔을 가장 잘 만져줄 수 있는 존재는 결국 내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아픔을 요란하게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쓸어내릴 때, 상처는 덧나지 않고 단단한 굳은살이 되어 우리를 지켜줍니다.

기쁨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

기쁜 일을 감추는 것은 얼핏 야박해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진정한 성숙은 나의 기쁨이 누군가에게는 소리 없는 박탈감이나 시기, 혹은 소외감이 될 수 있음을 헤아리는 데서 시작됩니다. 내가 탄탄한 대로를 걸을 때, 누군가는 거친 자갈길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을지 모릅니다.

나의 기쁨을 담담하게 다스리는 것은 타인을 향한 가장 깊은 배려이자, 스스로의 복(福)을 가볍게 날려 보내지 않고 내면의 깊은 우물에 채워 넣는 지혜입니다.

비워낸 자리에 머무는 평온

감정의 파고를 밖으로 터뜨리지 않고 안으로 고요히 가라앉히면, 비로소 마음에는 넓은 '여백'이 생깁니다. 채우는 것보다 비우는 것이 훨씬 어렵다는 것을 압니다. 물건을 비워내 집안에 온전한 온기를 남기듯, 감정의 과잉을 비워내야만 영혼에 진정한 평정심이 찾아옵니다.

아픈 것도 기쁜 것도 드러내지 않는 그 묵묵한 태도는, 마치 흔들림 없이 제자리를 지키는 거대한 바위와 닮았습니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비가 오면 오는 대로, 그저 담담하게 세월을 품어 안는 달관의 경지입니다.

오늘도 내 마음의 호수에 돌멩이 하나가 떨어져 잔물결이 일어난다면, 그저 가만히 바라보며 흘려보내고 싶습니다.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더 깊어지고, 비워냄으로써 더 충만해지는 그런 삶의 풍경을 그려봅니다.

'딸 선호' 세계 1위 국가가 된 한국

 


과거 ‘남아 선호 사상’이 강하게 지배했던 우리 사회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놀라운 변화입니다.

갤럽 인터내셔널이 전 세계 44개국을 대상으로 "아이를 한 명만 가질 수 있다면 어떤 성별을 원하는가?"를 조사한 결과, 한국은 딸을 선호한다는 응답이 28%로 조사 대상국 중 세계 1위를 기록했습니다. (아들을 원한다는 응답은 15%에 그쳤습니다.)

불과 30년 전인 1992년 동일 조사에서 아들 선호 58%, 딸 선호 10%였던 것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사회적 인식의 지각변동이 일어난 셈입니다. 영국의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The Economist) 역시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여러 지역에서 딸 선호 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한국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주목하기도 했습니다.

30년 만에 뒤집힌 성별 선호도

조사 연도딸 선호 비율아들 선호 비율
1992년10%58%
최근 (세계 1위)28%15%

세대별 차이: 현재 한국 사회에서 60대 이상 부모 세대만 아들 선호(23%)가 딸(20%)을 근소하게 앞설 뿐, 50대 이하 모든 세대에서는 딸을 원하는 비율이 압도적입니다. 특히 30~40대 여성층에서 딸을 원하는 경향이 가장 두드러집니다.

'딸바보' 사회가 된 세 가지 이유

사회학자들과 전문가들은 이러한 급격한 인식 변화의 원인을 몇 가지 현실적인 배경에서 찾고 있습니다.

  • 대등해진 사회적 지위와 효도의 개념 변화

    과거 유교적 관념에 따른 '가문 잇기'나 '제사'의 중요성이 흐려지면서 꼭 아들이 있어야 한다는 정서가 사라졌습니다. 이제는 가계를 잇는 것보다 정서적 유대감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 노후 부양에 대한 정서적 기대감

    실제 돌봄 노동이나 치매 노인 부양 통계를 보면 딸이 부모를 챙기는 비율이 훨씬 높게 나타납니다. "늙어서 의지하고 대화 상대가 되어주는 건 결국 딸"이라는 현실적인 기대가 작용한 것입니다.

  • 상대적으로 수월한 양육 과정

    아들에 비해 딸이 정서적인 소통이 잘되고, 학창 시절이나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는 인식이 강해졌습니다.

전 세계에서 가장 가파르게 남아 선호 사상을 극복한 것을 넘어, 이제는 가장 강력한 '딸 선호 국가'가 된 대한민국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가치관이 '제도와 의무' 중심에서 '친밀함과 정서적 유대' 중심으로 완전히 이동했음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지표입니다.

 왜 한국이 일본·유럽보다 변화가 빠른가

1) 변화 속도가 “압축적으로” 일어남

유럽은 수백 년에 걸쳐

  • 봉건 → 산업화 → 개인주의로 변화

한국은

  • 1960~2020 사이에 거의 모든 단계가 한 번에 진행됨

👉 그래서 가족 가치관도 한 세대 안에 급변


2) 전통 + 초고속 근대화의 충돌

한국은 전통적으로

  • 장남 중심
  • 가족주의 강함

하지만 동시에

  • 세계 최상위 수준의 교육 경쟁
  • 급격한 도시화
  • 여성 고학력화

👉 이 “충돌”이 가치관을 빠르게 재편


3) 돌봄 부담이 구조적으로 딸에게 쏠린 경험

한국은 특징적으로:

  • 공공 돌봄 시스템이 충분히 크지 않았고
  • 가족이 직접 노부모를 돌보는 비중이 높았음
  • 그 과정에서 딸의 역할이 더 “현실적으로 체감”

👉 “아들보다 딸이 더 실질적 도움”이라는 경험이 축적


4) 결혼·가족 구조의 급변

  • 비혼 증가
  • 출산율 세계 최저 수준
  • 핵가족 → 1인 가구 확대

👉 “아들이 집안을 잇는다” 구조 자체가 약해짐

그래서 일본보다도 더 빠르게
👉 “성별 자체가 중요하지 않다”로 이동


👶 이것이 저출산과 관계가 있나?

직접 원인이라기보다는 “같은 흐름”

공통 핵심은:

  • 결혼 가치 하락
  • 출산 비용 증가
  • 개인 선택 강화

👉 그 결과

  • “아들이냐 딸이냐”보다
  • “아예 안 낳거나 1명만 낳음”

이렇게 바뀐 겁니다.

외모는 첫인상을 만들지만, 사람의 중심은 관계를 만듭니다

 처음 사람을 만날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외모를 보게 된다. 밝은 미소, 단정한 옷차림, 세련된 분위기는 상대방에 대한 좋은 인상을 남긴다. 어쩌면 외모는 한 권의 책 표지와도 같다.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그 안의 내용을 궁금하게 만든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우리는 더 이상 표지만 보지 않는다. 그 사람이 어떤 말을 하는지, 어떻게 행동하는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에 관심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진짜 모습을 발견한다.

한 사람의 가치는 화려한 외모보다 보이지 않는 중심에서 드러난다. 힘든 상황에서도 약속을 지키는 책임감, 자신의 이익보다 상대를 먼저 생각하는 배려, 잘못을 인정할 줄 아는 겸손함은 쉽게 꾸밀 수 없는 아름다움이다. 이러한 모습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빛을 발하며 사람들의 마음에 깊은 신뢰를 심어 준다.

반면 외모는 세월과 함께 변한다. 젊음도, 유행도, 화려함도 영원하지 않다. 그러나 바른 인품과 따뜻한 마음은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깊어지고 성숙해진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외모가 아닌 그 사람의 중심 때문에 곁에 머물게 된다.

좋은 관계는 눈으로 시작될 수 있지만, 마음으로 이어진다. 외모는 첫인상을 만들지만, 사람의 중심은 관계를 만든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우리의 기억 속에 남는 것은 아름다운 얼굴이 아니라 아름다운 마음이다.



첫인상의 편견: 진정한 관계를 위해 겉모습 너머를 보는 법

사람은 누구나 첫인상으로 타인을 판단한다. 처음 마주한 몇 초 안에 상대의 성격과 태도, 심지어는 신뢰 여부까지 빠르게 결정해 버리기도 한다. 이러한 과정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이자, 복잡한 세상을 빠르게 이해하기 위한 방식이다. 그래서 첫인상은 완전히 피할 수 없는 영역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첫인상이 때때로 ‘편견’으로 굳어질 때 생긴다. 우리는 제한된 정보만으로 사람을 단정 짓고, 그 판단을 쉽게 수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 결과 실제로는 충분히 깊이 있고 따뜻한 사람을 겉모습이나 짧은 인상만으로 오해하게 된다.

사람의 진짜 모습은 짧은 순간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드러난다. 처음에는 말이 서툴러 보였던 사람이 사실은 깊은 배려심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화려한 말솜씨 뒤에 책임감 없는 태도가 숨어 있을 수도 있다. 관계는 이렇게 표면과 본질 사이의 간극을 발견해 가는 과정이다.

진정한 관계를 위해 필요한 것은 ‘빠른 판단’이 아니라 ‘천천히 이해하려는 태도’다. 한 번의 인상으로 사람을 정의하지 않고, 여러 상황 속에서 그 사람의 행동을 지켜보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나 자신의 기준과 편견이 얼마나 영향을 주고 있는지도 끊임없이 돌아봐야 한다.

결국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겉모습을 넘어 그 사람의 중심을 보는 일이다. 외형은 순간적으로 보이지만, 중심은 시간이 지나야 드러난다. 그리고 오래 지속되는 관계일수록 그 중심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좋은 관계는 단순히 잘 맞는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끝까지 이해하려는 노력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그 노력을 통해 편견을 넘어 진짜 사람을 만나게 된다.

아무거나 고르면 아무렇게 산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선택을 한다. 무엇을 먹을지, 어떤 사람을 만날지, 어떤 책을 읽을지, 심지어 오늘을 어떤 마음으로 보낼지까지. 대부분의 선택은 사소해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아무거나"라고 말하며 결정을 넘겨버린다. 하지만 삶은 거대한 결단보다 작은 선택들의 반복으로 이루어진다.

"아무거나 고르면 아무렇게 산다"는 말은 선택의 무게를 일깨워 준다. 인생은 어느 날 갑자기 만들어지지 않는다. 매일의 습관과 태도, 그리고 반복되는 결정들이 쌓여 지금의 나를 만든다. 목표 없이 시간을 보내면 시간도 목적 없이 흘러가고, 기준 없이 사람을 만나면 관계 또한 방향을 잃기 쉽다. 결국 삶의 모습은 우리가 무엇을 선택했는지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모든 선택을 완벽하게 할 수는 없다. 때로는 실수도 하고 후회도 한다. 중요한 것은 정답을 고르는 능력이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고 책임 있게 선택하는 태도이다. 작은 결정이라도 자신의 가치와 목표를 기준으로 내린다면 삶은 조금씩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우리가 무심코 내뱉는 "아무거나"라는 말 속에는 무관심과 포기가 숨어 있을 수 있다. 반대로 신중한 선택에는 자신이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에 대한 의지가 담겨 있다. 결국 삶은 선택의 연속이며,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어떤 사람이 되는지를 결정한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는 아무거나가 아니라, 나다운 것을 선택해야



[아무거나 고르면 아무렇게 산다] 
 
"뭐가 좋아? 무엇을 고를래?"
라고 물으면
'아무거나 ' 라고 답하는 이가 많다. 
 
대세를 따르면 평화롭게 흘러갈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여럿이 모여 결정할 때
아무도 '아무거나 ' 라는 답을
좋아하지 않는다. 
 
선택은 자기를 위한 것이면서
상대방을 위한 것이다.
늘 생각없이 따라 가면
무엇이 줗은지 정말 모르게 된다. 
 
낡은 습관을 버리고
작은 것부터 선택하는 습관을 기르자.
정체성이 자리잡고
자존감 높은 분명한 사람이 될테니. 
 
-'다 그렇게 산대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