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20일 토요일

인생이라는 필드를 걷는 법: 망설임을 비우고 용기를 채우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을까 싶을 만큼,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속도는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빨라집니다. 문득 뒤돌아보면 치열하게 달려온 무수한  세월이 스쳐 지나가고, 이제는 삶의 많은 것들을 비워내며 고요하고 단순한 일상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단순하고 미니멀한 삶을 지향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주변의 복잡한 인맥이나 불필요한 욕심들을 덜어내게 됩니다. 하지만 삶의 군더더기를 비워내는 것과, 하고 싶은 일 앞에서 소심하게 마음을 접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인생의 참된 지혜는 '비워야 할 것'은 과감히 비우고, '원하는 것' 앞에서는 망설임 없이 발걸음을 내딛는 데 있을지도 모릅니다.

매주 두세 번, 초록빛 골프 필드 위에 서면 인생의 축소판을 보는 듯합니다. 매 홀마다 우리는 선택의 순간을 맞이합니다. '공이 해저드에 빠지면 어쩌지?', '오비(OB)가 나면 부끄러운데…' 하는 소심한 걱정에 사로잡히면 몸은 잔뜩 굳어버리고 스윙은 엉망이 되기 일쑤입니다. 실패를 두려워하며 소극적으로 휘두른 채는 결코 좋은 샷을 만들어내지 못합니다. 설령 공이 벙커에 빠질지언정,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믿고 과감하게 스윙을 날려야 후련함이 남습니다. 미스 샷은 그 홀이 끝나면 그만이지만, 쳐보지도 못하고 포기한 샷에 대한 미련은 라운딩이 끝난 후에도 오래도록 머릿속을 맴도니까요.

일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와 함께 새로운 운동을 시작해 볼까 고민할 때, 혹은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하고 싶을 때, "이 나이에 굳이?"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도 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경험이라는 이름 뒤에 숨어 더 조심스러워지고 소심해지기 쉽습니다. 상처받지 않으려고, 혹은 체면을 지키려고 하고 싶은 말을 삼키고 가고 싶은 길을 돌아서곤 합니다.

하지만 90세를 맞이한 오랜 지인의 삶을 바라보며, 혹은 매일 아침  걸으며 마주하는 자연을 보며 다시금 깨닫습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오늘'이라는 시간은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니며, 생각보다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을 말입니다.

실패는 순간의 해프닝일 뿐입니다. 엉뚱한 길로 들어서면 잠시 발을 돌리면 되고, 서툰 도전으로 넘어지면 툭툭 털고 일어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해보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는 삶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따라와 우리를 붙잡습니다.

그러니 소심하게 굴기에는 우리의 인생이 너무나도 아깝습니다. 가슴속에 품은 작은 울림이 있다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더 늦기 전에 과감하게 샷을 날려야 합니다. 내 남은 삶의 필드 위에서 가장 후회 없는 스윙을 하며 걸어갈 수 있기를, 그리하여 매 순간을 온전한 나의 걸음으로 채워갈 수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

엉킨 실타래를 풀 때 드러나는 날것의 얼굴

관계의 본질이 드러나는 순간

모든 것이 순조롭고 감정이 좋을 때는 누구나 너그럽고 다정할 수 있습니다. 그때의 호의는 그리 큰 비용이 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갈등이 생기고, 상처를 주고받고, 감정의 밑바닥이 드러났을 때—즉, 화해해야 하는 순간에는 그 사람의 진짜 밑천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 자존심을 내려놓는 용기: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먼저 손을 내미는 것은 깊은 내면의 단단함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 상대를 향한 존중: 화해의 과정에서 상대를 얼마나 배려하고 그 사람의 마음에 공감하는지를 보면, 평소의 다정함이 진짜였는지 가짜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 감정의 군더더기를 비워내는 힘: 해묵은 앙금을 붙잡고 상대를 처벌하려 하기보다, 관계의 소중함을 위해 미움과 원망을 기꺼이 비워내는(비움) 능력이기도 합니다.

"좋을 때의 미소는 누구나 지을 수 있지만, 엉킨 실타래를 풀 때의 손길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다."

 


 엉킨 실타래를 풀 때 드러나는 날것의 얼굴

인생이 봄날 같고 매사가 뜻대로 풀릴 때, 타인에게 친절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주머니가 넉넉하고 마음의 여유가 있을 때는 누구나 넓은 아량과 부드러운 미소를 지을 수 있다. 그 시절의 호의는 사실 큰 비용이 들지 않는, 일종의 ‘포장지’와 같다. 그래서 좋은 시절에 나누는 달콤한 말과 다정한 태도만으로는 그 사람의 진짜 알맹이를 확인하기 어렵다.

사람의 본색이 가장 투명하게 드러나는 순간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진흙탕 같은 순간, 바로 갈등을 겪고 난 뒤 ‘화해를 해야 할 때’다.

갈등의 정점에서 인간은 누구나 본능적으로 방어 기제를 켠다. 상처받지 않으려고, 혹은 손해 보지 않으려고 날카로운 가시를 세운다. 진짜 시험대는 그 뜨거웠던 감정이 한 김 식고, 흩어진 파편을 모아 관계를 복원해야 하는 순간에 찾아온다.

현실에서 화해란 결코 아름다운 극치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대단히 구차하고, 자존심이 상하며, 내 안의 밑바닥을 똑바로 마주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화해의 순간에 어떤 이는 끝까지 자신의 정당함만을 주장하며 상대에게 항복을 요구한다. 평소에는 그토록 온화하던 사람이, 비틀어진 관계 앞에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상대의 기를 꺾으려 들기도 한다. 반면, 어떤 이는 관계의 가치를 위해 자신의 알량한 자존심을 먼저 내려놓을 줄 안다.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며 미안함을 건네는 그 무겁고도 담백한 한마디는, 내면이 단단하고 성숙한 사람만이 낼 수 있는 용기다.

나이가 들고 수많은 관계의 흥망성쇠를 겪을수록, 사람을 보는 안목은 결국 ‘그가 갈등을 어떻게 매듭짓는가’로 수렴된다.

화해를 잘한다는 것은 무조건 참고 덮어두는 유약함이 아니다. 내 안의 억울함과 원망이라는 감정의 군더더기를 기꺼이 비워내고, 엉킨 실타래를 차분히 풀어내려는 이성적 노력이다. 그 과정에서 상대의 거친 언사 속 숨은 상처를 알아채는 지혜가 발현되고, 비로소 인간 대 인간의 진짜 깊이가 증명된다.

좋을 때 잘하는 모습에 마음을 쉽게 내어주지 말아야겠다. 팽팽하게 당겨진 관계의 끈을 느슨하게 늦출 줄 아는 사람, 부서진 조각을 맞출 때 손끝이 따뜻한 사람. 그런 사람이야말로 오랜 세월을 곁에 두어도 좋을, 진짜 보석 같은 사람이다.

부족함으로 지어 올린 하루

 

완벽한 인생이라는 설계도를 가진 사람은 없다. 만약 그런 설계도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삶이 아니라 잘 짜인 기계의 작동 지침서에 가까울 것이다. 현실의 인생은 언제나 사방이 조금씩 비어 있고, 군데군데 금이 가 있으며, 예상치 못한 바람이 들이치는 허름한 집을 닮았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며 우리는 저마다 완벽한 하루를 꿈꿀지도 모른다. 단 한 번의 실수도 없고, 모든 관계가 물 흐르듯 부드러우며, 마음에는 한 점의 불안도 없는 그런 하루. 하지만 현실은 늘 비껴간다. 깜빡 잊은 약속, 뜻대로 되지 않는 몸의 컨디션, 사소한 오해와 서툰 말실수, 그리고 문득 찾아오는 지독한 쓸쓸함까지. 돌아보면 하루는 온통 부족함과 삐걱거림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진짜 삶의 신비는 바로 그 ‘부족함’ 속에서 일어난다.

우리를 살아있게 하는 것은 완전함이 아니라, 모자란 채로 어떻게든 다음 발걸음을 내딛는 끈기다. 삐걱거리는 무릎을 달래가며 목표한 걸음을 채우는 시간, 서운한 마음을 내려놓고 먼저 건네는 담담한 안부, 비어 있는 통장이나 허전한 마음을 바라보면서도 숨 한 번 깊이 쉬고 하늘을 바라보는 여유. 인생은 그 수많은 결핍들을 외면하지 않고, 그저 내 몫의 하루로 받아들이고 살아낸 사람들의 자취다.

다 채우지 못해 헐렁한 하루였어도, 그 안에서 나만의 속도로 숨을 쉬고 묵묵히 자리를 지켜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완벽한 도자기보다 세월의 때가 묻고 금이 간 옹기가 더 정겨운 법이다. 그 틈새로 비로소 타인의 슬픔도 보이고, 내 삶을 향한 따뜻한 시선도 스며들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우리는 완벽하지 않은 몸과 마음을 이끌고 하루를 살아냈다. 그것은 대단한 승전보는 아닐지라도,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 도망치지 않고 끝까지 배역을 다한 이들의 가장 현실적이고도 위대한 성취다. 완벽한 인생은 없었다. 다만, 그 수많은 빈틈을 온기 있는 하루하루로 채워온 진짜 인생이 여기 있을 뿐이다.

물처럼 흐르는 인연

 물은 흐르면서 자신의 길을 찾는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함께 갈 인연은 자연스럽게 곁에 남고, 멀어질 인연은 각자의 방향으로 흘러간다

흐르는 물처럼, 인연을 두고 가는 법

우리는 살아가면서 참 많은 사람과 얽히고설킨다. 젊은 날에는 인연을 맺고 넓히는 데 참 많은 에너지를 썼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반가웠고, 혹여 가까웠던 누군가와 소원해지면 내가 무얼 잘못했나 싶어 마음을 졸이기도 했다. 관계가 삐걱거리면 어떻게든 메우고 고쳐보려 억지로 손을 내밀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삶의 궤적이 길어질수록, 관계에도 '자연의 법칙'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가장 명확한 현실은, 사람의 인연은 결코 내 의지와 노력만으로 붙잡아둘 수 없다는 사실이다. 물은 흐르면서 제 길을 찾는다. 넓은 강물로 함께 흐르다가도 갈림길을 만나면 각자의 방향으로 갈라져 흐른다. 사람도 그렇다. 각자의 삶의 속도가 다르고, 가치관이 변하며, 처한 환경이 달라지면 한때 매일같이 붙어 다니던 이들조차 자연스럽게 멀어진다.

현실적인 관계의 지혜는 여기서 출발한다. 떠나가는 인연을 아쉬워하며 붙잡으려 애쓰는 것은, 흐르는 물줄기를 손으로 막아보려는 것만큼이나 부질없고 지치는 일이다.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물을 보며 허탈해할 필요가 없다. 그저 그 사람과 내가 함께 흘러왔던 그 시간만큼의 온기에 감사하고, 이제는 서로의 물길이 달라졌음을 덤덤하게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비움이 주어지는 자리에 남는 것들

관계를 억지로 붙잡지 않고 마음을 비워낼 때, 비로소 내 삶에 진짜 중요한 것들이 선명해진다. 내 에너지를 낭비하게 만드는 불편한 관계, 의무감으로 유지하던 형식적인 모임들을 걷어내고 나면, 놀랍게도 내 곁에 꼭 필요한 인연들만 고스란히 남는다.

  • 진짜 인연은 애쓰지 않아도 남는다. 오랜만에 연락해도 어색하지 않은 사람, 침묵이 흐르는 순간조차 편안한 사람, 내 삶의 방식을 묵묵히 존중해 주는 사람. 이런 따뜻하고 편안한 존재들은 내가 억지로 매달리지 않아도 늘 그 자리에 물처럼 고여 있다.

  • 나 자신에게 집중할 여유가 생긴다. 타인의 시선이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피로감에서 벗어나면, 마침내 내 내면을 돌볼 시간이 찾아온다. 내가 좋아하는 길을 걷고, 내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것이야말로 관계의 미니멀리즘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결국 흘러갈 사람은 가고, 남을 사람은 남는다.

그러니 멀어지는 인연에 연연하며 마음을 앓을 필요는 없다. 물이 바위를 만나면 부딪쳐 깨지는 대신 유연하게 돌아서 흐르듯, 우리도 삶의 관계들을 그저 유유히 바라볼 일이다. 억지 부리지 않는 넉넉한 마음으로 내 곁의 따뜻한 이들을 한 번 더 안아주고, 나만의 흐름을 지키며 걸어갈 때 삶은 비로소 깊고 평온해진다.

지금 가진 것의 소중함을 알아가는 여행

인생은 다 많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가진 것의 소중함을 알아가는 여행입니다



우리는 종종 더 많은 것을 가져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더 좋은 집, 더 높은 연봉, 더 많은 인정. 목표를 이루면 만족할 것 같지만, 막상 그 자리에 도달해도 또 다른 목표가 눈앞에 나타난다. 그래서 인생은 끝없는 부족함의 연속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은 조금 다르다. 우리가 잃고 나서야 소중함을 깨닫는 것들이 생각보다 많다. 건강할 때는 건강의 가치를 모르고, 가족이 곁에 있을 때는 그 존재를 당연하게 여긴다. 안정적인 일상도 마찬가지다. 평범한 하루가 반복될 때는 지루하다고 느끼지만,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겪고 나면 그 평범함이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 알게 된다.

물론 현재에 만족하라는 말이 도전을 포기하라는 뜻은 아니다.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는 것은 중요하다. 다만 그 과정에서 이미 내 손에 쥐고 있는 것들의 가치를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의 작은 행복을 외면한 채 미래의 행복만 쫓다 보면, 결국 행복은 늘 내일로 미뤄질 뿐이다.

인생은 많은 것을 차지하는 경쟁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가진 것들의 의미를 하나씩 발견해 가는 긴 여행에 가깝다.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적게 가져도 풍요롭고, 늘 부족함만 바라보는 사람은 많이 가져도 만족하기 어렵다.

오늘도 우리는 각자의 목표를 향해 걸어간다. 그 길 위에서 잠시 주변을 둘러보자. 가족의 안부, 친구의 웃음, 건강한 몸, 따뜻한 한 끼 식사. 어쩌면 우리가 찾고 있는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곁에 있을지도 모른다.

내 곁을 묵묵히 지켜주는 사람, 매일 찾아오는 잔잔한 하루,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는 내면의 시선. 이것들이야말로 인생이라는 긴 여행이 우리에게 남겨준 진짜 유산이다. 다 가지지 못해 결핍을 느끼는 대신, 이미 채워진 것들의 무게와 소중함을 알아채는 것. 그 담백한 알아차림 속에 삶의 진짜 풍요가 있다.

채우는 삶에서 비우는 삶으로

 인생의 전반전이 끊임없이 무언가를 채우고, 쌓아 올리고, 증명해 내는 시간이었다면, 후반전은 그것들을 하나씩 덜어내며 본질만 남기는 시간입니다. 우리는 오랜 세월 ‘더 많이 가지는 것이 곧 성공이자 행복’이라는 세상의 문법에 익숙해져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삶의 황혼 무렵에 이르러 마주하는 진짜 현실은 조금 다릅니다.

이제는 무거운 짐을 지고 가파른 산을 오를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손에 쥔 것을 가볍게 내려놓을 때, 비로소 등 뒤의 바람 소리가 들리고 눈앞의 푸른 풍경이 들어옵니다. 내 가치와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애쓰던 세상의 기준을 내려놓는 것, 즉 ‘덜 힘든 삶’을 선택하는 것은 포기가 아니라 삶의 주권을 비로소 내가 쥐었다는 신호입니다.

불필요한 인맥을 관리하느라 에너지를 쓰기보다는, 만나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몇 안 되는 따뜻한 이들과 깊은 담소를 나누는 것이 더 소중합니다.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화려한 일상보다, 매일 아침 일정한 리듬으로 맑은 공기를 마시며 발걸음을 옮기는 단출한 루틴이 몸과 마음을 더 풍요롭게 채워줍니다. 내면의 안목(眼目)이 깊어질수록, 세상이 좋다고 말하는 것과 내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을 명확히 구분하게 됩니다.

결국 현실 속의 진짜 행복은 대단한 성취나 거창한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불필요한 욕심과 관계의 소음을 걷어내고, 내게 허락된 매일의 시간 속에서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고요히 존재하는 것. 비워내어 홀가분해진 그 빈자리에야말로 삶의 진정한 지혜와 평온이 깃들기 마련입니다. 조금은 느려도, 조금은 단출해도, 내 영혼이 온전히 편안하다면 그것으로 이미 충분히 완성된 삶입니다.


행복은 더 많이 가지는 것이 아니라, 덜 힘들고 더 나답게 살아가는 데 있다

우리는 행복해지기 위해 늘 무언가를 더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 많은 돈, 더 좋은 직장, 더 넓은 집, 더 높은 지위가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쉬지 않고 달리고, 때로는 자신을 돌아볼 여유조차 잃어버린 채 살아간다.

하지만 현실을 돌아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많은 것을 가진 사람도 불안해하고, 원하는 목표를 이룬 사람도 여전히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큰 부나 화려한 성공이 없어도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행복은 단순히 더 많이 가지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삶을 힘들게 만드는 것들을 조금씩 덜어내는 데서 시작될 수 있다. 지나친 비교, 과도한 욕심, 불필요한 걱정은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반면 자신에게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에 집중할 때 삶은 한결 가벼워진다.

물론 현실은 쉽지 않다. 누구나 생계를 걱정하고 미래를 준비해야 한다. 그래서 행복은 모든 문제가 사라진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힘든 일이 있어도 자신만의 속도로 살아가고, 작은 기쁨을 발견하며, 스스로를 잃지 않는 것이 더 현실적인 행복의 모습일 것이다.

사람마다 행복의 기준은 다르다. 누군가는 성취에서 행복을 느끼고, 누군가는 가족과 함께하는 평범한 일상에서 행복을 찾는다. 중요한 것은 남들이 정한 기준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결국 행복은 더 많은 것을 소유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덜 힘들고 더 나답게 살아가는 데 있다. 남과 비교하기보다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기고, 오늘의 작은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삶이 아닐까.

2026년 6월 19일 금요일

한때는 박사 학위를 가진 성공한 학자였지만, 지금은 하루 160달러를 버는 기간제 교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적응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어요.

 

The author is a substitute teacher. Courtesy of Robert Lynch

저는 한때 월스트리트에서 일하다가 학계로 자리를 옮겨 박사 학위까지 받았습니다.

하지만 학계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해, 지금은 노스캐롤라이나에서 기간제 교사(대체 교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사회적 지위 같은 건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교직은 참으로 고단하고 팍팍한 직업입니다. 교사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 같은 건 금세 깨지기 마련이죠. 복도에서 아이들이 대놓고 손가락 욕을 하기도 하고, 3시간이나 공들여 준비한 수업이 고작 10분 만에 엉망이 되기도 합니다. 반 아이들 절반은 수업에 아예 관심이 없고, 나머지 절반은 책상 ​​밑에 숨겨둔 휴대전화만 들여다보고 있으니까요.

저는 지난 20년 넘게 대학, 고등학교, 중학교, 초등학교를 거치며 학생들을 가르쳐 왔습니다. 동료 교사들에게 "요즘 어떠세요?"라고 물었을 때 가장 흔하게 듣는 대답은, "꿈같은 삶을 살고 있죠(Living the dream)"라는 식의 냉소 섞인 말이었습니다.

진부한 표현이긴 하지만, 이 말에는 현직 교사들—특히 노동자 계층이 주로 다니는 공립학교 교사들—이 자신의 직업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그 속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박사 학위까지 가지고 있으면서도 지금은 기간제 교사로 일하고 있는 제 처지 때문에, 이런 현실이 저에게는 더욱 힘들게 다가옵니다.

처음부터 기간제 교사였던 것은 아닙니다. 

사회적 지위가 하락하는 경험을 한 사람이 저 혼자만은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늘 상승 가도를 달리고 있다고 믿어왔던 사람에게 막상 그런 일이 닥치면, 정신이 번쩍 들 만큼 겸허해지는 순간을 마주하게 됩니다.

저는 생물인류학 박사 학위를 소지하고 있으며, 다윈 이후 가장 위대한 진화론 사상가로 꼽히는 로버트 트리버스(Robert Trivers) 밑에서 수학했습니다. 학계에 몸담기 전에는 월스트리트에서 파생상품을 거래하기도 했습니다.

정규 교원(tenure-track) 임용에 몇 차례 실패한 뒤에는 고등학교에서 화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다 교사 자격증이 만료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박사 학위만으로는 공립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할 수 없더군요. 그래서

대리 교사 생활에는 몇 가지 장점이 있습니다.

대리 교사로 일하면서 4학년 아이들이 쉬는 시간에 운동장으로 뛰쳐나가는 모습을 자주 봅니다. 아이들은 천천히 걷는 게 아니라, 마치 우리에서 풀려난 동물이 자연 서식지로 나가는 것처럼 문밖으로 뛰쳐나갑니다.

순식간에 어디선가 게임이 시작되고, 규칙은 저절로 만들어집니다. 누군가는 술래가 되지만, 누가 무슨 게임을 하는지는 아무도 정확히 모릅니다. 하지만 2학년 아이들에게 운동장에서 수영용 튜브를 주면, 아이들은 무엇을 해야 할지 정확히 압니다.

이처럼 학생들과 함께하는 작고 즐거운 순간들이 저에게 안정감을 줍니다.

지난주에 중학교 밴드부 선생님 대신 수업을 했어요. 3일 후에 콘서트가 있어서 칠판에 연주곡 목록이 적혀 있었죠.

"My Favorite Things"가 시작되자마자 하던 일을 모두 멈췄어요. 교정기를 낀 한 여학생이 플루트를 연주했는데, 마치 장미꽃잎에 맺힌 빗방울 같았어요. 이어서 다섯 명의 여학생들이 클라리넷을 불었는데, 마치 아기 고양이의 수염 같았죠. 하얀 드레스에 파란색 새틴 띠를 두른 여학생들이 프렌치 호른을 연주했고, 트럼펫은 제 코와 속눈썹에 맺힌 눈송이 같았어요. 마침내 밴드 전체가 연주를 시작했는데, "When the Dog Asked", "When the Bee Sick", "When I'm feeling sad" 같은 곡들이었어요.

열두 살짜리 아이들로 가득 찬 교실에서 "사운드 오브 뮤직"을 처음부터 끝까지 연주하는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봤어요.

때로는 다음 세대가 제 눈앞에서 위대한 성취를 이루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에요.

하지만 대리 교사의 가장 좋은 점과 가장 나쁜 점은 똑같아요. 아이들을 제대로 알 수 없다는 거죠. 당신은 그들의 이름도 모르고, 내일 다시 올 생각도 없죠.

아이들도 그걸 알아요. 대리 교사는 학교에서 가장 낮은 지위에 있죠. 급식 아주머니들이 더 존경받아요. 6학년짜리 아이가 당신을 웃음거리로 삼고, 그 뒤에서 친구들이 낄낄거리는 걸 보기 전까지는 진정한 지위 하락을 경험했다고 할 수 없어요.

내 사회적 지위가 때로는 부끄럽게 느껴진다.

나는 오랫동안 지위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 척하며 살아왔다. 누구나 어딘가에서 중요한 존재가 되고 싶어 한다. 진지하게 대우받고 싶고, 동네에서 최악의 부모가 되고 싶지 않으며, 그 공간에서 가장 매력 없는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은 것이다.


그토록 애써 얻었으면서도 겉으로는 신경 쓰지 않는 척했던 지위를 잃어버린 일은 부끄럽고도 화가 나는 경험이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학계에서의 경력으로는 결코 배울 수 없었던 무언가를 깨달았다. 타인에게 내가 어떻게 비칠지에만 사로잡혀 있으면 정작 그 사람들을 제대로 볼 수 없다. 반면 그런 시선을 의식하지 않게 될 때 비로소 타인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만약 내가 사회적 지위를 신경 썼더라면, 교정기를 낀 채 플루트를 연주하는 소녀나 수영용 스펀지 막대(풀 누들)로 서로를 치며 장난치는 2학년 아이들을 결코 보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도 점수를 매기지 않는데도 '사운드 오브 뮤직'의 노래를 연주하는 12살 아이들로 가득 찬 그 공간의 풍경도 놓쳤을 테지.


어쩌면 나는 지금 꿈꾸던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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