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땅에 첫발을 디뎠던 날의 설렘과 두려움이 아직도 어제 일처럼 선명한데, 어느덧 반세기가 넘는 5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언어도, 문화도, 바람의 결마저 달랐던 미국이라는 넓은 땅에서 청춘을 바치고 가정을 일구며 살아온 시간들. 돌아보면 그 모든 날은 삶이라는 나무가 강한 바람을 견디며 땅속 깊이 뿌리를 내리는 숭고한 여정이었습니다.
55년을 미국에서 살고 나서야 조금 알 것 같다.
잘 산다는 것은 많이 가진 것이 아니었다.
남보다 앞서가는 것도 아니었다.
끝까지 무너지지 않고, 내 삶을 내 방식대로 살아내는 것이었다.
젊었을 때는 성공을 생각했다.
더 좋은 집, 더 많은 돈, 더 안정된 직장, 자녀들의 성공을 바랐다.
미국이라는 낯선 땅에 와서 살아남는 것 자체가 하나의 목표였고, 조금 형편이 나아지면 그보다 더 나은 삶을 꿈꾸었다.
그렇게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갔다.
돌이켜보니 55년이라는 세월은 참 길면서도 너무 짧았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때는 영어 한마디가 어렵고, 아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문화도 달랐고, 살아가는 방식도 달랐다.
때로는 외롭고, 때로는 서러웠고, 때로는 왜 이렇게까지 살아야 하나 싶은 순간도 있었다.
그러나 세월은 사람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일하고, 돈을 벌고, 집을 마련하고, 자녀를 키우고, 세금을 내고, 병원에 다니고, 부모를 걱정하고, 친구를 만나고 헤어지고, 가까웠던 사람과 멀어지기도 하면서 우리는 미국이라는 사회 속에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다.
그 과정에서 무엇을 얻었는가.
물론 돈도 얻었다.
집도 얻었고, 사회적 기반도 어느 정도 만들었다.
아이들도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것들이 55년의 가장 큰 결산은 아닌 것 같다.
가장 큰 결산은 내가 무엇을 소유했느냐가 아니라, 어떤 사람으로 늙어가고 있느냐에 있다.
젊었을 때는 돈이 많으면 인생이 편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돈은 분명 중요하다.
특히 노년에는 더 그렇다.
건강이 나빠졌을 때 병원비를 감당할 수 있어야 하고, 집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하며, 배우자에게 경제적으로 지나친 부담을 주지 않아야 한다.
나이가 들수록 돈은 사치가 아니라 선택권과 존엄을 지켜주는 안전판이 된다.
그러나 돈만으로 노년을 지킬 수는 없다.
통장에 돈이 있어도 몸이 따라주지 않으면 자유롭게 살기 어렵다.
건강이 있어도 마음이 불안하면 평안하지 않다.
돈과 건강이 있어도 곁에 마음을 나눌 사람이 없다면 노년은 쉽게 외로워진다.
그래서 이제야 알게 된다.
노후의 진짜 자산은 돈 하나가 아니다.
돈, 건강, 배우자, 가족, 친구, 그리고 혼자서도 평온할 수 있는 마음이다.
55년 미국 생활을 돌아보면서 특히 부부라는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젊었을 때의 부부는 함께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살아간다.
집을 사고, 아이들을 키우고, 사업을 하고, 직장을 다니며 앞을 바라본다.
하지만 황혼에 들어서면 부부의 목적이 달라진다.
이제는 함께 더 많은 것을 이루는 것보다 서로를 무사히 지켜주는 것이 중요해진다.
배우자가 아프면 병원에 함께 가주고, 약을 챙겨주고, 운전을 대신해주고, 식사를 준비하고, 말없이 옆에 앉아주는 것.
젊을 때는 별것 아닌 것 같았던 작은 행동들이 늙어서는 가장 큰 사랑이 된다.
황혼의 부부에게 필요한 것은 거창한 사랑이 아니다.
“오늘도 무사했습니까?”
“약은 먹었습니까?”
“무리하지 마세요.”
“내가 할게요.”
이런 짧은 말들이 오히려 긴 세월을 함께 살아온 부부에게는 가장 깊은 사랑일 수 있다.
그리고 자녀에 대해서도 생각이 달라진다.
자녀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부모에게 끝이 없다.
하지만 자녀의 인생까지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
55년 미국 생활을 지나고 보니 자녀에게 남겨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유산은 재산만이 아니라 부모가 자기 삶을 스스로 책임지는 모습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녀에게 너무 의존하지 않는 것.
자녀의 가정을 지나치게 간섭하지 않는 것.
필요할 때는 도움을 요청하되, 자녀의 삶까지 붙잡지 않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자녀에게 미안한 부모가 되기보다 자기 노후를 준비한 부모가 되는 것.
그것 역시 사랑이다.
이제 나이가 들수록 '무엇을 더 얻을 것인가'보다 '무엇을 잃지 않을 것인가'가 중요해진다.
건강을 잃지 않는 것.
부부 사이의 신뢰를 잃지 않는 것.
친구를 모두 잃지 않는 것.
경제적인 독립을 잃지 않는 것.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존중을 잃지 않는 것.
젊을 때는 삶의 크기를 키우려고 애썼지만, 황혼에는 삶을 단순하게 만드는 지혜가 필요하다.
집도 너무 크지 않아도 된다.
차도 꼭 비싼 것이 필요하지 않다.
사람도 많이 만날 필요가 없다.
먹는 것도 지나치지 않고, 투자도 이해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하고, 남과 비교하는 습관도 내려놓아야 한다.
특히 늙어서까지 남의 삶을 부러워하면 자신의 남은 시간을 잃게 된다.
누군가는 더 큰 집에서 살고, 누군가는 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고, 누군가는 자녀들이 더 성공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의 삶과 나의 삶은 처음부터 같은 조건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다.
노년의 행복은 남보다 많이 가진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진 것으로 충분하다고 느끼는 데서 시작된다.
55년 미국 생활의 결산을 하라면 아마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는 미국에서 성공하기 위해 참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나 늙어가면서는 성공보다 절제를 배워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더 벌려고 애쓰기보다 가진 것을 지키는 것.
더 인정받으려 하기보다 마음의 평화를 지키는 것.
더 많은 사람을 만나기보다 좋은 사람 몇 명을 곁에 두는 것.
자녀에게 더 많은 것을 주려고 하기보다 자녀에게 짐이 되지 않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배우자와 서로에게 마지막까지 편안한 사람이 되어주는 것.
이것이 어쩌면 55년 미국 생활이 내게 가르쳐준 가장 현실적인 지혜인지도 모른다.
이민 생활의 절반을 훌쩍 넘는 세월 동안 우리는 참 많은 것을 견뎠다.
낯선 나라에서 살아남았고, 일했고, 세금을 냈고, 가족을 지켰다.
그동안 잃어버린 것도 많다.
젊음은 돌아오지 않고, 부모님은 세상을 떠났고, 친구들도 하나둘 줄어들었다.
몸도 예전 같지 않다.
그래서 지금은 더 이상 인생을 크게 만들려고 하지 않는다.
남은 인생을 잘 정리하고 싶다.
빚과 욕심을 줄이고, 불필요한 관계를 정리하고, 집안의 물건도 정리하고, 재정도 정리하고, 자녀에게 부담이 될 일도 미리 정리하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하고, 할 수 없는 순간이 오면 부끄러워하지 않고 도움을 받을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잘 산다는 것은 완벽하게 사는 것이 아니었다.
실수도 있었고, 후회도 있었다.
돈을 더 벌 수 있었던 순간도 있었고, 사람을 더 잘 대할 수도 있었다.
조금 더 가족에게 따뜻했어야 했던 순간도 있었고, 쓸데없는 걱정을 너무 오래 붙잡고 있었던 때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것까지도 내 인생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55년을 살아온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후회 없는 인생이 아니라, 지나온 인생을 받아들이는 마음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제 남은 시간에는 거창한 성공을 꿈꾸지 않는다.
아침에 눈을 뜨고 몸이 크게 아프지 않은 것에 감사하고,
배우자와 차 한 잔을 마실 수 있는 것에 감사하고,
자녀가 자기 삶을 잘 살아가는 것을 바라보며 안심하고,
친구와 가끔 웃을 수 있고,
내 발로 천천히 걸을 수 있고,
저녁이 되면 오늘 하루도 무사히 지나갔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55년 미국 생활의 마지막 결산은 어쩌면 아주 단순하다.
많이 가진 사람이 잘 산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감당할 수 있었던 사람이 잘 산 사람이다.
많은 사람에게 인정받은 사람이 아니라,
곁에 있는 사람에게 상처를 덜 준 사람이 잘 산 사람이다.
자녀에게 많은 유산을 남긴 사람이 아니라,
자녀에게 짐이 되지 않고 마지막까지 품위를 지킨 사람이 잘 산 사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지막까지 배우자의 손을 놓지 않고
오늘 하루를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이미 충분히 잘 산 사람이다.
55년.
참 긴 세월이었다.
돌아보면 인생은 결국
무엇을 얼마나 이루었느냐보다
누구와 함께 걸었으며, 무엇을 지키면서 여기까지 왔느냐가 더 중요했다.
이제는 더 높이 올라갈 때가 아니다.
조금 천천히 걷고,
조금 덜 욕심내고,
조금 더 감사하고,
조금 더 서로를 배려하면서,
남은 계절을 잘 살아내는 것.
그것이 아마도
55년 미국 생활을 지나온 사람이 내리는 가장 솔직한 삶의 결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