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9일 화요일

혹시 투자가 종교처럼 느껴지십니까?

 

소개팅을 60초 안에 망치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계속해서 전 여친(또는 남친)의 이름을 부르거나, 옷에 음료수를 쏟으면 가능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애프터 신청을 확실하게 받지 않을 방법이 있을까?

상대방이 믿고 있는 종교를 모독하면 된다.

가톨릭 신자라면 성모 마리아의 무염시태를 부정하라. 이슬람교 신자라면 코란이 알라의 말씀이 아니라 유대교와 기독교의 성서를 표절한 것이라고 말하라. 정통파 유대교 신자라면 2000년 전 메시아가 그립다고 말하고, 개신교 신자라면 마틴 루터가 기독교를 절단 냈다고 말하라.

수십억 명의 사람들에게 종교가 정체성의 핵심 요소다. 때문에, 신자라면 자기 신앙에 집착할 수밖에 없다. 그들에게 종교는 삶의 체계를 잡아주고, 도덕적 나침반이며, 그리고 옳고 그름을 판단하게 해준다. 그들에게 종교는 목적의식을 심어준다. 하느님이든 알라든 야훼든, 신에 대한 믿음은 죽음의 공포와 무한한 미지로부터 그들을 보호해 준다.

누구라도 일단 종교를 갖게 되면, 좀처럼 포기하는 경우가 없다. 놀라운 일도 아니다. 의미, 목적, 영원은 심오한 주제이며, 종교는 그런 주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모건 하우절의 말처럼, "자신이 믿는 의견이 진실이길 바라는 마음보다 더 절실한 것도 없다." 그리고 종교만큼 이 말이 분명한 곳도 없다.

수십억 명의 신앙인들에게 종교는 세상을 보는 프리즘이다.

그리고 누군가 자신의 그 프리즘을 공격한다면, 그것은 자신의 영혼을 공격하는 것이 된다. 자신의 실존을 산산조각 내려는 공격이다. 이때 논리는 감정에 가려진다. 왜냐하면 단순하게 신념을 지키는 것을 떠나 자신의 존재 가치를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 가치가 위험에 처했을 때 당황한다.

그러면서 방어적으로 변한다. 그것도 대단하게. 역사를 보면 평화를 사랑한다는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수많은 전쟁으로 뒤덮여 있고, 성지 탈환을 위한 십자군 전쟁부터 9/11 테러에 이르기까지, 수백만 명이 다양한 종교의 이름으로 목숨을 잃었는다.

하지만 이런 종교적 신념이 전쟁과 폭력을 통해서만 표출되는 것은 아니다. 조용한 합리화와 고의적인 무시를 통해서도 나타난다.

어떤 종교든 교리와 신앙을 충실히 지킨다면 천국에 간다고 말한다. 종교를 선택하고 교리를 따르는 동안, 남몰래 마침내 모든 일이 잘되기를 바란다. 비록 그 바람이 선택한 종교에 어긋난다 하더라도 말이다.

무슨일이 있더라도 신앙을 버리기를 거부하는 수십억 명의 기독교인과 이슬람교도가 여전히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불편한 현실보다 편안한 무시 속에서 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는 종교 블로그가 아니다. 금융 블로그다. 그리고 종교에 관해 말하려는 글이 아니다. 투자에 관한 글이다.

투자의 목적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부를 증식하는 것 하나뿐이다. 그러기 위해서 가치가 오를 것이라고 믿는 것을 사고,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판다. 간단하고 객관적인 게임이다. 그것이 전부다.

처음에 무엇이든 투자하기로 결정하면, 거기에는 논지가 있다. 가격이 상승할 것이라고 믿는 이유 말이다. 그 논지가 실현된다면, 좋은 일이다. 돈을 좀 벌게 된다. 논지가 깨지면 짜증 나는 일이겠지만, 팔고 다음으로 넘어가야 한다.

하지만 때때로 논지가 틀렸음에도 불구하고, 가격이 오를 때가 있다. 잘못된 이유로 옳은 경우다. 그러면 자신감을 커진다. 또는 논지가 깨진 것을 알고도 팔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러면서 합리화하기 시작한다. 앞서 언급한 신자들처럼, 불편한 현실보다는 편안한 무시 속에 살고 싶어 한다. 그리고 논지가 틀렸음을 인정하면, 불편한 현실에 빠지게 된다.

신자들이 가장 많은 투자 대상에는 무엇이 있을까? 일론 머스크를 신격화 한 많은 주주들이 있는 테슬라가 그럴 수 있다. 어쩌면 수많은 호들러들이 분권화된 "통화"가 금융 시장의 구원이 될 것이라고 믿는 비트코인일 수도 있다. 열렬한 지지자들이 있는 다른 자산일 수도 있다. 고를 수 있는 것은 많다.

전기차의 진화를 믿고 몇 년 전에 테슬라 주식을 샀을 수도 있고, 주가가 저평가되었다는 이유였을 수도 있다. 인플레이션이 우려되어 비트코인을 샀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다른 자동차 업체들이 속속 전기차 모델을 출시하면서 시장 점유율이 줄어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나머지 자동차 업체들을 합한 것보다 테슬라의 시가총액이 높다. 테슬라가 포드보다 10배나 더 가치가 있어야 할까?

그리고 인플레이션 헤지 수단으로 여겨졌던 비트코인은 높은 인플레이션 기간 동안 50% 하락했다. 논지가 깨진 것이 아닌가?

자기가 투자한 대상이 비판을 받을 때 대처하는 방법에서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객관적인 투자자는 모든 투자에 대한 이유를 제시할 수 있지만, 사실이 바뀌면 기꺼이 마음을 바꾼다. 투자 논지가 깨지면, 선선히 빠져나간다. 하지만 반대로 방어적이 된다거나, 신념에 반하는 모든 정보를 소음이라고 무시한다면, 객관적으로 투자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진실이길 바라는 무언가에 필사적으로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샀다는 이유만으로 투자 대상에 필사적으로 집착하게 되면, 자신과 협상을 벌이기 시작한다. 논지가 깨지고 가격이 형편없게 되었지만, 논지를 새롭게 바꾸고 그것에 확신을 갖게 된다. 계속 붙들고 있을 어떤 이유라도 찾아낸다. 무엇이라도 찾아내서 일을 망쳤다는 것을 깨닫지 않으려고 한다. 무엇이라도 찾아내서 불편한 현실을 피하려고 한다.

그러면서 투자 결정을 뒷받침하는 모든 이야기에 스스로를 결박시킨다. 비록 그 이야기가 애초에 매수한 이유와 관련이 없더라도 말이다.

투자 대상과 사랑에 빠지면 상황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잃게 된다. 처음 샀던 논지를 뒷받침하는 모든 증거가 신빙성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논지가 타당한 이유를 찾아 정당화하려고 한다면, 그 투자는 더 이상 투자가 아니다. 집착이다.

종교는 집착으로 번성한다. 집착에 빠진 신자는 선교사, 설교자 그리고 전도사가 된다. 집착은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특징이다.

하지만 시장은? 시장은 그런 집착에 관심이 없다. 그리고 신은 가장 충실한 신자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에 상을 내릴지 모르지만, 시장은 잘못된 집착을 벌한다. 스스로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든 상관없이, 나쁜 투자는 결국 나쁜 투자 밖에 안 된다.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 천국으로 가는 계단을 만들어 줄지 모르지만, 포트폴리오에는 놓일 자리가 없다. 투자가 종교처럼 느껴지 시작한다면, 조심해야 한다.

자료 출처: Young Money, "The Religion of Speculation"( http://blog.naver.com/jeun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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