척 피니(Chuck Feeney)는 억만장자였다. 하지만 여기서 "였다."라는 말이 중요하다. 이 글은 가난하게 태어나 억만장자가 되었고, 벌어들인 돈을 전부 기부한 한 남자의 이야기다.
대공황 속에서 태어나다.
찰스 프란시스 "척" 피니는 1931년 뉴저지에서 아일랜드 출신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미국이 대공황에 휩싸여 있을 때 어린 시절을 보내기가 힘들었지만, 피니의 기업가 정신은 어릴 때부터 빛났다.
예를 들어, 그는 10살이 되기도 전에 겨울 방학이면 동네 이웃집 마당의 눈을 치워주고 용돈을 벌어 가족생활비에 보냈다.
대학 시절
모험을 찾는 많은 가난한 집안 아이들처럼, 피니 역시 가능한 나이가 되자마자 군대에 입대했다. 미 공군에서 복무했고, 본의 아니게 인생에 큰 휴식이 되었다.
당시는 군 복무를 마친 군인이라면 누구나 무료로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있었고, 피니는 이를 기회로 코넬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고, 학업과 병행해 샌드위치 장사로 돈을 벌었다.
DFS 그룹의 탄생
1960년 면세품 시장의 공백을 알아차린 피니는 사업 파트너인 로버트 밀러와 함께 DFS(Duty Free Shoppers) 그룹을 설립했다. 그들은 육군과 해군을 대상으로 면세 자동차와 주류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홍콩에 본사를 둔 회사는 처음에는 "Tourists International and Cars International"이라는 이름이었지만, 나중에 DFS로 이름이 바뀌었다. 당시 면세점 쇼핑은 거의 전례가 없었다.
글로벌 확장
DFS는 1961년 홍콩 카이탁 공항에 첫 번째 면세점을 열었고, 이후 호놀룰루에 추가 매장을 열었으며 일본인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10년 후, 북아메리카 전역에 매장을 열었고, 브랜드의 성공과 추가 투자로 아시아로 사업을 확장했다. 1970년대 후반이 되자, 피니는 백만장자가 되었다.
이 정도면 충분
그러나 피니는 막대한 재산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과 가족이 생활하는 데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고, 그는 어떻게 그 돈을 더 큰 이익을 위해 사용할 수 있는지 연구하기 시작했다.
1982년 그는 5백만 달러로 애틀랜틱 박애 재단(Atlantic Philanthropies)을 설립했다. 2년 후, 가족에게 필요한 돈을 남겨둔 후, 10억 달러에 달하는 전 재산을 재단으로 옮겼다.
자선 사업의 시작
피니는 재단으로의 자금 이전은 철저히 비밀리에 부쳤다. DFS 그룹의 파트너들조차 알지 못했다. 재단 자체도 완전히 익명으로 운영됐다. 수혜자들도 어디에서 후원금을 받았는지 함구하도록 했다. 많은 단체에 자금을 후원하는 데 도움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피니의 이름은 어디에도 드러나지 않았다. 그의 선행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코넬 대학, 최초의 수혜
GI 법안은 피니의 대학 입학을 가능하게 했고 그는 항상 코넬 대학에서 보낸 시간과 그의 삶을 형성하는 데 있어 그 역할에 감사해 했다. 결과적으로, 1982년 코넬 대학은 애틀랜틱의 첫 기부금 7백만 달러로 코넬 트레디션(Cornell Tradition)을 설립했다. 우수한 학부생을 선정해 장학금을 지급하고, 근로 장학 사업을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이후 5,300명 이상의 학생이 이 프로그램의 혜택을 받았다.
리머릭 대학으로
피니는 사업을 하면서도 항상 그의 재단이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아일랜드계 미국인으로서, 그는 아일랜드에 친밀한 유대감을 느꼈고, 조상들의 조국에 무언가를 돌려주고 싶어 했다.
그는 교육의 힘을 믿었고, 처음 아일랜드에 한 선물로 리머릭에 있는 NISE(National Institute of Higher Education)에 1,490만 달러를 기부했다. 또한 이 연구소와 코넬 대학교 사이의 관계를 발전시켜 리머릭 대학교가 되는 데 도움을 주었다.
LVMH에 DFS 지분 매각
1990년대 말, 60대였던 피니는 루이비통 등 세계적인 브랜드의 명품 업체 LVMH에 DFS 그룹의 지분을 매각했다. 보도에 따르면, 그는 17억 달러를 받았고, 모두 애틀랜틱 박애 재단에 지불되었다. 이 현금으로 재단의 활동 범위는 엄청나게 늘어났고, 피니는 자금을 지원할 훨씬 더 야심찬 프로젝트를 찾기 시작했다.
아일랜드의 두뇌 유출 방지
피니는 아일랜드가 자국의 인재들이 해외로 이주하는 것을 막고 외국의 인재들을 끌어들일 필요가 있음을 깨달았다. 처음으로, 그의 재단은 정부와 협력했다. 애틀랜틱 박애 재단과 아일랜드 정부는 PRTLI(Programme for Research in Third Level Institutions)로 서로 협력해, 새로운 실험실, 컴퓨터 시설, 연구 도서관을 만들었다. 재단이 수십 년에 걸쳐 기부한 1억 7,700만 달러는 아일랜드를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교육을 받은 국가 중 하나로 만드는 데 도움이 되었다.
북아일랜드의 평화 지원
피니는 북아일랜드에서 일어난 종파적 폭력이 매우 걱정이 되었고, 1991년부터 2016년까지, 재단을 통해 북아일랜드에 거의 5.7억 달러를 지원했다. 이 돈은 주로 평화 협상, 인권,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기 위한 프로그램 지원에 사용되었다. 또한 재단은 정부와 협력해, 대학 시스템을 강화하기 위한 대학 연구 지원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베트남에서
피니는 베트남 전쟁으로 고통받았던 베트남 사람들을 돕고 싶었다. 그의 재단은 수년간에 걸쳐 베트남의 공공 의료 시스템을 개선하고, 도서관과 대학의 자원을 높이는 데 3.82억 달러를 지원했다. 또한 전국적인 금연 캠페인과 2007년부터 헬멧을 쓰지 않고 오토바이를 타는 행위를 불법으로 하는 입법 계획을 지원했다.
쿠바와의 관계 개선
쿠바의 의료 시스템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편에 속하지만, 2000년대 초에는 자금 부족으로 시달리고 있었다. 그의 재단은 쿠바에 6,800만 달러 이상을 지원했다. 사람들의 건강을 증진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지만, 일부는 쿠바와 미국 사이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 도움이 되는 사업도 지원했다. 그러면서 오바마 행정부가 쿠바와 외교적, 상업적 관계를 재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남아프리카에서
애틀랜틱 박애 재단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 차별 정책 종식이 그동안 일어난 불평등의 상처를 치유하도록 도울 수 있는 기회로 보았다. 재단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야심 찬 흑인 젊은 변호사들이 새로운 다인종 헌법 재판소에서 법학 학위를 취득하는 데 도움을 주었고, 의료 서비스를 향상시켰으며, 과거 지원이 부족했던 고등 교육 기관들의 연구 시설을 개선해 주었다. 2016년까지, 4.24억 달러가 나라의 가장 혜택받지 못한 사람들의 삶을 개선하는 데 사용되었다.
호주, 피니를 설득하다.
또한 피니는 호주에 끌렸다. 아일랜드와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호주의 인재들이 저평가되어 있음을 알았다. 이후 재단은 퀸즐랜드, 빅토리아, 뉴사우스웨일스, 태즈메이니아에 걸쳐 23개 기관에 지원금을 분배했고, 8개의 새로운 연구 기관 설립에 공동 자금을 지원했다. 1998년과 2016년 사이, 재단은 호주의 생물 의학 연구 확장, 고등 교육 강화 및 사회적 공평을 높이는 데 3.68억 달러를 지원했다.
버뮤다, 단순한 기반 이상
지난 9월 해산되기 전까지, 애틀랜틱 박애 재단은 버뮤다에 기반을 두고 있었지만, 그곳에서 운영되지는 않았다. 또한 재단은 그 섬에 많은 투자를 했다. 1992년과 2016년 사이, 2,800만 달러 이상이 버뮤다에 지원되었다. 그 자금은 보건, 교육, 공공 안전 및 형사 사법 격차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지역 단체들을 지원했다.
미국에 돌려주기
제대군인 원호법은 피니가 가족 중 처음으로 대학에 들어갈 수 있게 해주었다. 그는 그것에 영원히 감사했고, 미국에서 교육 시스템 불평등을 줄이기 위해 많은 자금을 지원했다. 또한 생명을 구하는 의료 연구를 위해서도 상당한 자금이 지원했고, 양질의 의료 서비스에 대한 접근성을 확대하고 노인들이 잘 살고 사회에 지속적으로 의미 있는 기여를 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 재단은 전국적으로 총 39억 달러를 지원했다.
마지막 빅 베팅
1999년, 피니는 재단에 85세가 되는 2016년 말 이전에 모든 돈을 쓰고 마지막 후원금을 냈으면 좋겠다고 설명했다. 2015년 재단은 마지막 "빅 베팅"에 자금을 후원하기 시작했다. 바로 "애틀랜틱 펠로우 프로그램"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인종적 공평, 사회적 공평, 뇌 건강, 세계적 불평등, 건강 공평을 높이는 데 초점을 맞췄다. 예를 들어, 샌프란시스코의 캘리포니아 대학과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는 1.78억 달러를 공동으로 후원받아, 치매 환자를 극적으로 줄이는 것을 목표로 글로벌 뇌 건강 연구소를 설립했다.
빌 게이츠, 지휘봉을 넘겨받다.
피니의 믿을 수 없는 관대함, 살아 있는 동안 베풀겠다는 모토, 애틀랜틱 박애 재단의 경이로운 성취는 빌 게이츠 부부와 워런 버핏이 "더 기빙 플레지(The Giving Pledge)"를 세우는데 영감이 되었다고 한다. 또한 세계 최고 부자들이 재산의 대부분을 일생 동안 또는 유언을 통해 자선 사업에 쓰도록 장려하기도 했다. 지금까지 마크 저커버그와 일론 머스크를 포함해, 200명 이상이 더 기빙 플레지에 서약했다.
믿을 수 없는 유산
2020년 9월, 89세가 된 척 피니는 마침내 수십억 달러를 기부하겠다는 목표를 달성했다. 그가 애틀랜틱 박애 재단을 설립한 이후 38년 동안, 재단은 모두를 위한 기회를 창출하고 공정과 공평을 증진시킬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프로그램, 사람들, 그리고 지역에 80억 달러를 후원했다.
임무를 완료한 피니는 재단의 해산을 확인하는 서류에 서명했다. 2012년 포브스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아내 헬가와의 은퇴 생활을 위해 200만 달러만 남겨둘 것이라고 밝혔다. 당시까지 총 기부금 액수가 자신의 순 자산보다 375,000% 더 많다는 의미다.
피니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작은 임대 아파트에서 계속 살고 있다. 자신이 기부한 수십억 달러가 수천 명의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살도록 도왔음을 알고 안심하기 때문이다.
자료 출처: Lovemoney, "Why This Former Billionaire Will Die Bro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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