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D 록펠러가 최초의 억만장자가 된 방법은 다음과 같다
왕조를 세운 사람
미국의 억만장자들을 생각할 때, 아마도 제프 베조스, 빌 게이츠, 혹은 심지어 "The Kardashians"를 떠올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국 최초의 억만장자는 사실 존 D. 록펠러였다. 오일 왕조를 창시한 그는 성공의 절정기에 오늘날 돈으로 4,000억 달러에 달하는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록펠러 가문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포브스가 선정한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가문 목록에 올라 있다. 아주 보잘것없던 어린 시절을 보냈던 존 D.가 이후 어떻게 놀랄 만한 제국을 건설했는지, 그리고 그가 엄청난 재산으로 무엇을 했는지 알아보자.
보잘것없는 시작
존 D. 록펠러는 1839년 뉴욕의 한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빌은 일종의 사기꾼이었다. 그는 떠돌이 장사꾼으로 암을 낫게 한다는 약을 팔았고, 좀처럼 집에는 잘 없었다. 그는 아내 일라이자 몰래 바람을 피웠고, 중혼죄를 저지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젊은 록펠러는 어머니에게 더 많은 영향을 받았다. 어머니는 그에게 일해서 돈을 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쳤다. 기업가가 되는 과정에서 존의 첫 번째 일은 칠면조 사육, 사탕 판매, 이웃 심부름이었다.
첫 번째 직업
록펠러의 사업 본능은 1853년 가족이 오하이오 클리블랜드로 이사한 후에 진정으로 시작되었다. 2년 후, 겨우 16살이었던 록펠러는 작은 물산 회사 휴이트 & 터틀에 사무원으로 취직했다.
석탄과 곡물 같은 필수적인 상품들을 사고팔던 이 회사에서 그는 회계 보조원으로 일하면서 하루에 약 50센트를 벌었다.
사업 시작
20살이 되자, 록펠러는 스스로 사업을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배웠다. 1859년, 그는 모리스 B. 클라크와 손을 잡고 건초, 육류, 곡물을 사고파는 물산 회사를 설립했다.
사업의 첫해 말, 오늘날 금액으로 450,000달러 상당의 수익을 올렸다.
원유의 시대
1859년 펜실베이니아에서 미국 최초의 유정이 시추되었고, 그 역사적인 순간은 록펠러가 원유 산업에 뛰어드는데 영감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시추보다, 정제가 더 수익성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고, 몇몇 파트너와 팀을 이뤄 클리블랜드에 자신의 정유 공장을 열었다. 2년도 되지 않아 지역에서 가장 큰 정유 공장이 되었고, 젊은 사업가 록펠러는 원유에만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얼마간의 돈을 빌린 록펠러는 파트너들의 지분을 인수했고 1865년 정유 공장을 완전히 지배하게 되었다.
시대를 앞서다
록펠러는 환상적인 사업 본능을 가지고 있었고, 항상 다음 모험을 기대하고 있었다. 1865년, 그는 당시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의 대륙 횡단 철도 추진에 주목했고, 남북전쟁이 끝나면 크로스컨트리 노선과 남부 철도가 건설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석탄이 당시 연료의 주요 공급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록펠러는 결국 원유로 대체될 것이라고
스탠더드 오일의 탄생
1870년 록펠러는 형 윌리엄과 헨리 플래글러와 함께 스탠더드 오일을 결성했다.
당시에는 원유에서 추출되는 등유가 "가난한 사람의 빛"으로 불렸으며, 램프를 켜는 데 흔히 사용되었다. 록펠러는 등유가 자신을 성공시킬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그가 옳았다. 그는 미국 최대 정제 등유 생산자가 되었다.
제품에 대한 이해
스탠더드 오일은 정제 부산물의 새로운 용도를 찾기 위해 과학자들을 고용함으로써 전력을 극대화했다.
정제 과정에서 생산된 휘발유를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웠고, 당시 대부분의 정유사들이 그냥 태워버리고 있었지만, 그는 윤활유를 만드는 데 사용했다.
사우스 임프루브먼트 컴퍼니
1871년, 록펠러는 철도와 정유 회사들이 한데 모인 사우스 임프루브먼트 컴퍼니(South Improvement Company)에 합류했다. 회원사들에게는 운송료가 할인되었고, 이를 통해 가격을 낮출 수 있었다.
오직 대기업들만 가입을 허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많은 중소기업들이 배제되었다. 1년 후,
클리블랜드 대학살
수익이 증가하자, 록펠러는 다음 2년 동안 그 돈으로 경쟁사를 인수했고, 미국에서 첫 번째 독점 회사를 만들었다. 그는 4개월도 채 되지 않은 기간 동안 22개의 정유 회사를 인수했고, 이는 클리블랜드에 있던 정유 회사의 80% 이상이었다.
"클리블랜드 대학살"로 널리 알려진 이 매머드 인수는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이후 30년 이상 동안,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는 미국의 거의 모든 석유의 생산, 마케팅 및 운송을 담당했다.
뜨거운 경쟁
록펠러가 생산한 석유를 전국으로 운송하기 위해 철도 산업에 크게 의존했을 수도 있지만, 철도 산업 역시 그의 사업에 똑같이 의존했다. 그의 석유가 철도 화물의 약 40%를 차지했었기 때문이다.
이는 철도 회사들 사이에 광범위한 경쟁으로 이어졌고, 그는 사업의 대가로 리베이트를 받았다. 결과적으로, 등유 가격을 낮출 수 있었고, 보통 사람들이 더 쉽게 살 수 있게 만들었다.
탈선
록펠러에게 엄청난 수익을 가져다준 몇 년 후, 철도 대기업 코넬리우스 밴더빌트(사진)와 톰 스콧은 철도 요금을 인상하려고 시도했다.
언제나처럼 현명한 록펠러는 시골을 관통하는 4,000마일 길이의 송유관을 건설함으로써 보복했다. 이 송유관은 오하이오에서 펜실베이니아로 그의 석유를 날랐고, 더 이상 철도에 의존하지 않아도 되었다. 놀랍게도, 이 송유관은 미국 철도 회사의 약 3분의 1을 파산으로 이끌었다.
1873년의 공황
1873년 북아메리카가 공황에 빠져들면서, 북아메리카와 유럽에 경기 침체를 촉발했고, 사상 처음으로 뉴욕 증권 거래소가 문을 닫았다. 이는 노동자 계급의 대량 실업을 초래했다.
기회주의자였던 록펠러는 경기 침체를 스탠더드 오일의 경쟁사들을 헐값에 더 많이 사들이는 기회로 활용했다.
이름을 떨치다
록펠러의 대담한 움직임은 효과가 있었다: 1882년이 되자, 20,000개의 국내 유정에서 10만 명의 직원이 일하고 있었고,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는 미국 내 모든 석유의 90%를 통제했다.
그러나 록펠러는 몰랐겠지만, 스탠더드 오일은 이 시점에 실제 정점에 도달해 있었다. 19세기가 끝나기 전에, 이 비율은 약 80%까지 떨어졌고, 다시는 회복하지 못했다.
우리가 실제로 모든 석유를 정제한다면 민심이 우리에게 불리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 록펠러
대중의 반발
이 무렵, 록펠러는 언론에서 무자비하고 비윤리적인 재계 거물로 묘사되고 있었다. 언론은 그의 사업 전략이 못마땅했고, 그가 은밀한 거래와 합의를 이용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1902년, 스탠더드 오일에 의해 문을 닫게 된 한 정유 회사의 가족이었던 아이다 타벨은 록펠러를 맹비난하는 여러 편의 기사를 내보냈고, 이후 책으로 출판되었다.
이 책에서는 그의 사업 방식을 비판한 것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 빌의 음습한 과거도 폭로했다.
대통령의 개입
20세기 초, 스탠더드 오일은 예상 밖의 적수를 만났다. 테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트러스트의 힘을 없애라고 요구한 것이다. 이 시기에 록펠러는 등유 산업의 98%를 장악했다고 한다.
1904년이 되자, 정부는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를 상대로 반독점 소송을 제기했다. 이 시점에서, 오늘날 금액으로 약 2,250억 달러의 재산을 가진, 록펠러는 세계 최고 부자로 여겨졌다.
스탠더드 오일 트러스트의 끝
록펠러는 불공정한 가격 책정, 뇌물, 심지어 협박을 주장하면서 그의 사업 전술의 모든 면을 파헤친 광범위한 법정 소송을 견뎌내야 했다.
1911년 법원은 스탠더드 오일의 사업 관행이 셔먼 반독점법을 위반했다는 결론을 내림으로써 엄청난 타격을 입혔다. 이 시점에서 회사는 여전히 세계 정제유 시장의 70%를 장악하고 있었다. 록펠러에게는 사업을 정리할 시간이 6개월 주어졌다.
석유의 유산
록펠러는 스탠더드 오일을 34개의 작은 회사로 쪼갰고, 그 결과 그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부자가 되었다. 이들 회사에는 나중에 현재 석유 산업의 주요 기업이 된 셰브론과 엑손모빌이 포함되어 있었다.
10년 안에, 록펠러의 재산은 오늘날 금액으로 약 4,000억 달러에 달하게 되었다.
자선 사업
1937년 9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록펠러는 5.3억 달러 이상을 자선 사업에 기부했다.
그는 록펠러 재단, 의학 연구를 위한 록펠러 연구소, 일반 교육 위원회, 그리고 1915년 세상을 떠난 아내를 기리기 위한 로라 스펠먼 록펠러 기념관 등 4개의 재단을 설립했다.
교육 지원
다양한 재단 외에도, 록펠러는 교육에도 돈을 쏟아부었다. 설립에 크게 기여한 시카고 대학에 수천만 달러를 기부했고, 하버드, 예일, 컬럼비아 및 브라운 같은 대학에도 실질적인 지원을 제공하였다.
또한 록펠러 의료 연구소(1965년 록펠러 대학으로 이름을 바꿨고, 10년 후 최초의 대학원생을 배출했음)에도 돈을 기부했다. 게다가, 록펠러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 대학인 애틀랜타 침례교 여성 신학교에도 아낌없이 기부했다. 미래에 대한 대학의 비전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모든 부채를 청산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이 대학은 나중에 로라를 기념해 스펠만스 칼리지로 이름을 바꾸었다.
의학 지원
록펠러 재단의 국제 보건 부서는 말라리아, 황열병, 갈가마귀 질병(록펠러 위생 위원회에 의해 근절됨)을 포함한 다양한 질병 퇴치 캠페인을 벌였다.
1914년, 재단은 중국 의학 위원회를 설립해, 중국의 의과 대학, 병원, 간호사 양성 학교의 보건 교육과 위생에 대한 연구를 장려했다. 1914년과 1919년 사이, 재단은 미국 적십자와 연합 전쟁 노동 기금을 포함한 전쟁 원조 자선 단체에 2,200만 달러 이상을 기부했다.
평생의 유산
포브스에 따르면, 록펠러는 그의 아들 존 주니어에게 자선의 유산을 물려주었고, 두 사람은 일생 동안 다양한 사업에 10억 달러 이상을 기부했다.
또한 존 주니어는 맨해튼 미드타운에 22에이커 면적의 19개의 상업용 건물이 포함되어 있는 거대 단지 록펠러 센터에 자금을 지원했다. "도시 내의 도시"를 목표로, 절정기에 약 75,000개의 일자리를 창출한 것으로 추정된다. 풍부한 역사와 아름답게 지어진 록펠러 센터는 1985년에 공식적인 뉴욕의 랜드마크가 되었고, 1987년에는 국립 역사 랜드마크가 되었다.
가족
존 D. 록펠러가 일생일대의 왕조를 세웠다고 말하는 것도 지나치지 않는다. 포브스에 따르면, 오늘날, 그의 가문은 여전히 84억 달러 상당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다.
이 재산은 패션 디자이너 아리아나 록펠러(사진)와 제이 록펠러 전 미국 상원 의원 등 174명이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2020년 포브스는 록펠러 가문을 미국에서 43번째로 부유한 가문으로 선정했다.
데이비드 록펠러
최근 세상을 떠난 가족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2017년 10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데이비드 록펠러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세계 최고령 억만장자였으며, 존 D. 록펠러의 마지막 살아있는 손자이기도 했다.
데이비드는 약 33억 달러의 순 자산을 가지고 있었고,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자선 사업에 참여했다. 그의 유언장에는 일단 모든 자산이 청산되면, 7억 달러 이상을 비영리 단체들에 기부하라고 적혀 있었다. 수혜자로는 하버드, 뉴욕 현대 미술관, 및 록펠러 대학이 포함되었다.
현대의 록펠러
록펠러 가문은 여전히 세계 건강과 기아에 중점을 두고 자선 활동에 매우 적극적이다. 록펠러 재단의 웹사이트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경제적 기회를 확대해 주려는 열망이 잘 나타나 있다.
또한 재단은 정기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자선 노력도 기념한다. 예를 들어, 2013년 HIV/AIDS 환자들을 지지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엘튼 존(사진)에게 록펠러 재단 평생 공로상을 수여했다.
자료 출처: Lovemoney, "Why America's First Billionaire Went From Zero To Hero"
(번역 by Pi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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