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人生은 이렇다네!
인생 예순은 해(年)로 늙고,
일흔은 달(月)로 늙고,
여든은 날(日)로 늙고,
아흔은 때(時)마다 늙고,
백세가 되면 분(分)마다 늙는다."
고 말했다.
* 남자는 마음으로 늙고
여자는 얼굴로 늙는다 (영국 속담)
노후(老後)의 친구는
01. 가까이 있어야 하고
02. 자주 만나야 하며
03. 같은 취미면 더 좋다.
"회갑잔치가 사라지고,"
※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拾 古來稀)라는 칠순잔치도 사라진 지금,
※ 인생백세고래희(忍生百世古來稀)가 정답이 된 바이야흐로 초고령화 시대
※ 60대는 노인 후보생으로 워밍업 단계요,
○ 70대는 초로(初老)에 입문하고,
○ 80대는 중노인(中老人)을 거쳐,
○ 망백(望百)의 황혼길
○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인생,
내 나이 여든이 되어보니 “밤새 안녕이란” 인사의 참 의미를 실감하게 되었다. 인간이란 창조주의 한갓 피조물에 지나지 아니하는 존재로 영웅호걸과 성현들이 밟고 간 그 길을 나도 따라가야 하는 숙명적일뿐이다. 인간이란 세상만사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도 그뜻을 깨닫는 길은 자신이 그런 환경에 처한후 인것 같다
👺늙음의 美學
느티나무 잎 하나 빙그르르 휘돌며 떨어진다. 내 삶의 끝자락도 저와 같다. 어느 바람에 지는 줄 모르는 낙엽이 땅에 떨어지기까지는 순간이지만, 그럼에도 자세히 관찰해보면 그것은 분명히 절규가 아니라 춤추는 모습이다.
낙엽 지기 전의 마지막 모습은 어떠했을까.아름다운 단풍이었다. 말년의 인생 모습도 낙엽처럼 화사(華奢)하고 장엄(莊嚴)한 파노라마 (panorama)이어라.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봄꽃보다 가을 단풍을 더 아름답게 본다. 아침 이슬도 아름답지만 해 질 녘의 저녁놀은 더 아름답다.
‘삶의 유혹(誘惑)’과 ‘죽음의 공포(恐怖)’ 이 두 가지에서 벗어나고자 고민하는 것이 인생의 참 공부다. 죽음을 향해 가는 길이 늙음의 내리막길이다. 등산도, 인생도 오르는 길 힘들지만 내려가는 길은 더더욱 어렵다. 그래서 삶의 길을 멋지게 내려가기 위해 늙음의 미학을 찾아보는 것이다.
늙음의 미학 제1장은 ‘비움의 미학’이다. 비움의 실천은 ‘버림’으로써 여백을 만드는 일이다. 버림이란 말이 맞지만 너무 냉혹하게 들릴 수도 있다.점잖게 ‘나눔’이라 해도 좋다. 꽃이 비록 아름답지만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처녀가 설령 아름답지만 처녀를 버려야 ‘옥동자’, ‘옥동녀’를 낳을 수 있다. 죽음이란 ‘버림’의 끝이다. 성취의 청춘도 아름답지만 버림의 노년은 더욱 아름답다. 이것이 늙음의 미학이다.
주먹을 쥐고 태어나는 것은 세상에 대한 욕심이요, 손바닥을 펴고 죽는 것은 모든 소유로부터의 비움이다. 생의 가장 큰 가르침은 죽음이다. 선현은 죽음으로써 인생의 진리를 깨우쳐준다. 채운다는 관점에서 보더라도 비운 만큼만 채울 수 있다. 집지양개(執之兩個)요, 방즉우주(放則宇宙)다. 두 손으로 잡아보았자 두 개뿐이요, 놓으면 우주가 내 것인 것을.
늙음의 미학 제2장은 ‘노련의 미학’이다. 노련이란 단어에는 늙을 로(老)자를 쓴다. ‘노’자에는 ‘노련하다’는 의미가 있다. 오랜 세월의 경륜에서 오는 노하우(know-how)가 있어 노인은 노련한 경험의 결정체다. 노인은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는 신중함이 있다. 술을 마셔도 젊은이처럼 속수무책으로 쓰러지지 않는다. 그리하여 부도옹(不倒翁)이란 별명이 붙은 것이다.
늙음의 미학 제3장은 ‘점잖음의 미학’이다. 노인이 되면 언행이 무겁되 어둡지 않다. 품격이 고상하되 야하지 않다. 그래서 ‘점잖다’라는 말이 성립된다. 곧 ‘젊지 않다’는 말이다. 젊은이처럼 감성에 쉬이 휘둘리거나 분위기에 가볍게 흔들리지 않는다. 지하철을 공짜로 타고 다니는 ‘지공거사’로서 젊은이의 잘못을 보고도 잘 나무라지 않음은 힘과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도 그러한 시절을 겪어왔기 때문에 이해하고자 함이다. 점잖음, 그것은 중후한 인생의 완결이자 노인이 보여줄 수 있는 장엄한 아름다움이다.
늙음의 미학 제4장은 ‘생각의 미학’이다. 노인이 되면 이런저런 생각이 많다. 그러다 보니 했던 말을 또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생각은 일념통천(一念通天)의 지혜의 샘물이다.‘늙은이(늘그니)’는 ‘늘 그 자리에 있는 이’다. 생각이 깊고 많기 때문이다. 그저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게 아니라 세상을 염려하고 가문을 지키면서 늘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사고(思考)의 ‘고(考)’자는 ‘늙을 로(老)’변에 속하며 ’생각하다‘는 뜻이다. 노인회(老人會)나 기로연(耆老宴)은 생각이 많은 분들의 모임이다.
늙음의 미학 마지막 장은 ’3분의 2의 미학‘이다. 흔히 몸은 늙었어도 마음은 아직 청춘이라고 항변하는데, 이 말은 사실이다. 정신의 나이는 육신의 나이에 3분의 2에 불과하다. 60세면 40세로 생각하고, 90세면 60세로 생각한다. 마음마저 육신과 똑같이 늙었다고 생각하면 삶이 위축된다. 죽는 날까지 젊은이의 기상으로 살아가야 한다. 젊은 생각으로써 씩씩한 만년을 맞이해야 한다.
인류의 평균연령이 급격히 늘어감에 따라 온 세상이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고 있다. 퇴직의 새벽을 맞이하면 인생 리모델링(remodeling)을 반드시 해야 한다. 내 남은 인생의 가장 젊은 날이 바로 오늘이다. 어제 죽은 자가 그토록 소망하던 오늘이다.
영리하고 재주가 있는 사람을 일러 총명(聰明)하다고 하는데,총(聰)은 귀가 밝다는 뜻이며, 명(明)은 눈이 밝다는 뜻이다. 나이가 들면 눈과 귀가 어두워진다. 모든 기능이 저하되어 자세히 볼 수 없고, 또렷하게 들을 수 없다. 하지만 문제없다. 쑥떡 같이 얘기해도 찰떡 같이 듣는 훈련을 평생 해온 그들이기 때문이다. 요즈음의 젊은이들은 찰떡 같이 얘기해도 쑥떡 같이 건성으로 들어버리니 낭패(狼狽)다.
아름다움의 끝은 죽음이다. 단풍잎이 어느 이름 모를 바람에 느닷없이 똑 떨어지듯이 그렇게 죽는 것이, 오복의 하나인 고종명(考終命)이다. 죽고 사는 것이 달려 있는 매우 위태한 고비를 일러 사생관두(死生關頭)라 한다.사관(死關)은 죽음의 관문(關門)인 것이다. 낙엽 지듯 관문을 통과하는 것이 고종명이다.
목숨이 끊어진다는 말은 식도(食道)인 목과, 기도(氣道)인 ’숨‘이 끊어진다는 말이다. 밥이 맛을 잃으면 30일 만에 죽게 되고, 공기가 맛을 잃으면 3분 만에 죽게 된다. 순간의 유명(幽冥)이다. 나뭇잎 떨어지듯, 정전(停電)되듯, 눈 깜짝할 사이에 밝음과 어둠이 새벽별 보듯 또렷하다. 신(神)의 품에 다가가는 아름다운 구속·····.
사유(思惟)의 대자유(大自由), 자유(自遊)의 대자유 속에서 늙어가는 즐거움을 그대는 아는가 (옮긴 글)
낙엽 지기 전의 마지막 모습은 어떠했을까.아름다운 단풍이었다. 말년의 인생 모습도 낙엽처럼 화사(華奢)하고 장엄(莊嚴)한 파노라마 (panorama)이어라.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봄꽃보다 가을 단풍을 더 아름답게 본다. 아침 이슬도 아름답지만 해 질 녘의 저녁놀은 더 아름답다.
‘삶의 유혹(誘惑)’과 ‘죽음의 공포(恐怖)’ 이 두 가지에서 벗어나고자 고민하는 것이 인생의 참 공부다. 죽음을 향해 가는 길이 늙음의 내리막길이다. 등산도, 인생도 오르는 길 힘들지만 내려가는 길은 더더욱 어렵다. 그래서 삶의 길을 멋지게 내려가기 위해 늙음의 미학을 찾아보는 것이다.
늙음의 미학 제1장은 ‘비움의 미학’이다. 비움의 실천은 ‘버림’으로써 여백을 만드는 일이다. 버림이란 말이 맞지만 너무 냉혹하게 들릴 수도 있다.점잖게 ‘나눔’이라 해도 좋다. 꽃이 비록 아름답지만 꽃을 버려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처녀가 설령 아름답지만 처녀를 버려야 ‘옥동자’, ‘옥동녀’를 낳을 수 있다. 죽음이란 ‘버림’의 끝이다. 성취의 청춘도 아름답지만 버림의 노년은 더욱 아름답다. 이것이 늙음의 미학이다.
주먹을 쥐고 태어나는 것은 세상에 대한 욕심이요, 손바닥을 펴고 죽는 것은 모든 소유로부터의 비움이다. 생의 가장 큰 가르침은 죽음이다. 선현은 죽음으로써 인생의 진리를 깨우쳐준다. 채운다는 관점에서 보더라도 비운 만큼만 채울 수 있다. 집지양개(執之兩個)요, 방즉우주(放則宇宙)다. 두 손으로 잡아보았자 두 개뿐이요, 놓으면 우주가 내 것인 것을.
늙음의 미학 제2장은 ‘노련의 미학’이다. 노련이란 단어에는 늙을 로(老)자를 쓴다. ‘노’자에는 ‘노련하다’는 의미가 있다. 오랜 세월의 경륜에서 오는 노하우(know-how)가 있어 노인은 노련한 경험의 결정체다. 노인은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는 신중함이 있다. 술을 마셔도 젊은이처럼 속수무책으로 쓰러지지 않는다. 그리하여 부도옹(不倒翁)이란 별명이 붙은 것이다.
늙음의 미학 제3장은 ‘점잖음의 미학’이다. 노인이 되면 언행이 무겁되 어둡지 않다. 품격이 고상하되 야하지 않다. 그래서 ‘점잖다’라는 말이 성립된다. 곧 ‘젊지 않다’는 말이다. 젊은이처럼 감성에 쉬이 휘둘리거나 분위기에 가볍게 흔들리지 않는다. 지하철을 공짜로 타고 다니는 ‘지공거사’로서 젊은이의 잘못을 보고도 잘 나무라지 않음은 힘과 용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그들도 그러한 시절을 겪어왔기 때문에 이해하고자 함이다. 점잖음, 그것은 중후한 인생의 완결이자 노인이 보여줄 수 있는 장엄한 아름다움이다.
늙음의 미학 제4장은 ‘생각의 미학’이다. 노인이 되면 이런저런 생각이 많다. 그러다 보니 했던 말을 또 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생각은 일념통천(一念通天)의 지혜의 샘물이다.‘늙은이(늘그니)’는 ‘늘 그 자리에 있는 이’다. 생각이 깊고 많기 때문이다. 그저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게 아니라 세상을 염려하고 가문을 지키면서 늘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사고(思考)의 ‘고(考)’자는 ‘늙을 로(老)’변에 속하며 ’생각하다‘는 뜻이다. 노인회(老人會)나 기로연(耆老宴)은 생각이 많은 분들의 모임이다.
늙음의 미학 마지막 장은 ’3분의 2의 미학‘이다. 흔히 몸은 늙었어도 마음은 아직 청춘이라고 항변하는데, 이 말은 사실이다. 정신의 나이는 육신의 나이에 3분의 2에 불과하다. 60세면 40세로 생각하고, 90세면 60세로 생각한다. 마음마저 육신과 똑같이 늙었다고 생각하면 삶이 위축된다. 죽는 날까지 젊은이의 기상으로 살아가야 한다. 젊은 생각으로써 씩씩한 만년을 맞이해야 한다.
인류의 평균연령이 급격히 늘어감에 따라 온 세상이 고령화 사회로 접어들고 있다. 퇴직의 새벽을 맞이하면 인생 리모델링(remodeling)을 반드시 해야 한다. 내 남은 인생의 가장 젊은 날이 바로 오늘이다. 어제 죽은 자가 그토록 소망하던 오늘이다.
영리하고 재주가 있는 사람을 일러 총명(聰明)하다고 하는데,총(聰)은 귀가 밝다는 뜻이며, 명(明)은 눈이 밝다는 뜻이다. 나이가 들면 눈과 귀가 어두워진다. 모든 기능이 저하되어 자세히 볼 수 없고, 또렷하게 들을 수 없다. 하지만 문제없다. 쑥떡 같이 얘기해도 찰떡 같이 듣는 훈련을 평생 해온 그들이기 때문이다. 요즈음의 젊은이들은 찰떡 같이 얘기해도 쑥떡 같이 건성으로 들어버리니 낭패(狼狽)다.
아름다움의 끝은 죽음이다. 단풍잎이 어느 이름 모를 바람에 느닷없이 똑 떨어지듯이 그렇게 죽는 것이, 오복의 하나인 고종명(考終命)이다. 죽고 사는 것이 달려 있는 매우 위태한 고비를 일러 사생관두(死生關頭)라 한다.사관(死關)은 죽음의 관문(關門)인 것이다. 낙엽 지듯 관문을 통과하는 것이 고종명이다.
목숨이 끊어진다는 말은 식도(食道)인 목과, 기도(氣道)인 ’숨‘이 끊어진다는 말이다. 밥이 맛을 잃으면 30일 만에 죽게 되고, 공기가 맛을 잃으면 3분 만에 죽게 된다. 순간의 유명(幽冥)이다. 나뭇잎 떨어지듯, 정전(停電)되듯, 눈 깜짝할 사이에 밝음과 어둠이 새벽별 보듯 또렷하다. 신(神)의 품에 다가가는 아름다운 구속·····.
사유(思惟)의 대자유(大自由), 자유(自遊)의 대자유 속에서 늙어가는 즐거움을 그대는 아는가 (옮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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