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 13일 일요일

아 , 테스 형 !

 

나훈아 2020 대한민국 어게인 '테스형!'
YouTube DanalEntertainment
4 minutes, 55 seconds
Nov 16, 2020

테스 형, 너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 왜 이리 많은가요

 [노정태의 시사哲] 나훈아와 소크라테스

노정태

입력 2020.10.17 03:00

 

 

 

노정태 철학에세이스트

1983년생인 나는 가수 나훈아가 한창 날리던 시절을 직접 보지 못했다.

내게 그는 이건희 삼성 회장의 파티 초청을 거부한 사람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두세 곡 부르고 약 삼천만원 정도 받는 쉬운 돈벌이였지만 단호히 거부하며 이런 뜻을 밝혔다고 한다. “나는 대중 예술가다. 따라서 내 공연을 보려고 표를 산 대중 앞에서만 공연하겠다. 내 노래를 듣고 싶으면, 공연장 표를 끊어라.”

대체 저런 배짱이 어디서 나왔을까. 그 의문은 올해 추석을 하루 앞두고 풀렸다. 지난 9월 30일 KBS 2TV에서 방송한 ’2020 한가위 대기획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를 보니 모르고 싶어도 모를 수가 없었다. 호랑이 같은 얼굴에 꾀꼬리 같은 목소리를 가진 이 대범한 예인(藝人)이, 지금부터 2500여 년 전에 살았던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에게 격식 없이 건넨 말 덕분이었다. 아, 테스 형!

나훈아는 노래한다. “세상이 왜 이래, 사랑이 왜 이래. 너 자신을 알라며 툭 내뱉고 간 말을 내가 어찌 알겠소 모르겠소 테스 형.” 원래 이 가사는 그가 작고한 아버지의 무덤에서 떠올린 것이지만, 너무 어둡고 무거워질 것 같아서 모두가 아는 철학자 이름을 빌렸다는 후문이 전한다. 설령 그렇다 해도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 철학의 핵심 주제만큼은 진작부터 그의 가슴 깊이 묻혀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노랫말이 되었고 온 국민의 안방에 전달되었으리라.

고대 그리스로 시간 여행을 떠나보자. 델포이에 세워진 아폴론 신전 입구에는 세 경구가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너 자신을 알라’는 그중 하나다. 아테네에서 버스로 두 시간 거리인 델포이는 예나 지금이나 험난한 곳이다. 신탁을 듣기 위해 신전을 방문하는 것은 그 자체가 고행이었던 셈이다. 지친 발걸음을 이끌고 웅장한 신전에 도달하면 신의 메시지가 기다린다. 너 자신을 알라.

즉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의 원작자가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대부분 소크라테스를 떠올린다. 워낙 열심히 저 말을 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마치 많은 사람이 ‘땡벌’을 나훈아가 아닌 강진 노래로 알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크세노폰이 ‘회상록’에서 전하는 바는 이렇다. “너 자신을 알라”고 외치며, 나 스스로가 누구인지 아는 것은 모든 선한 일의 근원이라고,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자는 미혹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고 경고하고 다녔다는 것이다.

일러스트= 안병현

플라톤 역시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고 전한다. ‘카르미데스’ ‘프로타고라스’ ‘파이드로스’ ‘필레보스’ ‘법률’ ‘알키비아데스 1’. 총 여섯 번에 걸쳐 등장하는 그야말로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주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저 말을 똑같이 반복하지는 않았다. 대화 편에 따라 언급되는 맥락과 방식이 다르다.

가령 ‘알키비아데스 1’에서는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스스로를 인식하는 것이 진정한 앎의 출발점이라는 취지에서 저 말을 인용한다. 반면 ‘파이드로스’에 담긴 맥락은 훨씬 무겁고 비장하다. 고대 그리스 신화 속 괴물인 튀폰을 거론하며, 나 자신을 안다는 것은 “내가 튀폰보다 더 끔찍하고 사나운 짐승인지, 아니면 오만하지 않은 명(命)과 신성을 타고난 온유하고 온전한 피조물인지 알아보는 것”이라고 이야기했던 것이다. 마치 홍상수 영화 ‘생활의 발견’의 명대사처럼, 인간은 못 돼도 괴물은 되지 말자는 소리다.

 

 

 

트레일블레이저 미드나잇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그 이전과 나누는 중요한 분기점이다. 피타고라스, 파르메니데스, 헤라클레이토스 등 이전 시대 철학자들의 관심사는 인간보다 자연에 쏠려 있었다. 우주가 어떤 원소로 이루어져 있는지, 시간은 직선적으로 흐르는지 아니면 순환하는지, 숫자와 세계의 관계는 어떠한지 등이 그들의 주된 고민거리였다.

반면 소크라테스의 주제는 사람이었다. 우주를 인식하고 탐구하며 그 속에서 상호작용하고 윤리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 그러므로 저잣거리에서 젊은이들을 붙잡고 귀찮게 질문을 던져댔던 것이다. 자네는 참 많은 걸 알고 있는 것 같군. 그런데 자네 자신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는 건가?

그렇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은 세상의 그 어떤 지식보다 소중하다. 이건희의 초청을 거절하던 나훈아가 보여준 것도 바로 그런 모습이다. 나훈아는 자신이 ‘대중 예술가’, 즉 표를 사고 공연장에 온 대중 앞에서만 노래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 어떤 부와 권력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거나 혼돈에 빠지면 더 큰 수렁에서 헤어날 수 없다.

역사를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도 왕이나 대통령이 국민을 위해 목숨을 건 적이 없다고, 이 나라를 지켜온 것은 평범하고도 위대한 국민들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던 힘도 바로 그런 단단한 자기 인식에서 나왔으리라. 정권 따라 팔랑거리는 얄팍한 ‘개념 연예인’이 아닌 당당한 대중 예술가 나훈아. 그는 그렇게 온 국민의 가슴에 시원한 가을바람 한 줄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소크라테스의 눈으로 오늘날 대한민국을 바라보면 어떨까. 안타깝게도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 같다. 대통령 문재인부터 그렇다. 지금은 대단한 권력자인 것 같지만 고작 1년여 후에는 평범한 국민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임기 말년의 선출직 공무원이다. 5년 빌려 쓰는 권력을 쥐고 나라의 뿌리를 뒤흔들며 국민의 생명은 아랑곳하지 않고 북한 앞에 빌빌 기면서 국가 재정을 거덜 내는 모습 앞에 국민은 입을 모아 외칠 수밖에 없다. 너 자신을 알라!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골칫거리였다. 권력자들은 그의 입을 다물게 하기 위해 소송을 걸고 사형선고를 내렸다. 소크라테스는 떳떳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도망자로서 살아가느니 아테네 시민으로서 죽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던 것이다. 민주공화국의 주권자인 국민이 아니라 특정 정치인의 팬이나 추종자라고 스스로를 착각하는 이가 퍽 많은 이 나라의 모습을 보면 소크라테스는 과연 뭐라고 할까. 아, 테스 형! 세상이 왜 이래? 답답한 마음을 한 줄기 노래에 실어 보내며, 우리는 또 다른 내일을 향해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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