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9일 금요일

어떻게 사는 것이 幸福한 삶일까?

**원래 우리말에는 행복이라는 단어가 없었다. 이 개념 자체가 서구에서 수입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쓰는 많은 개념어가 대개 그렇듯이 ‘행복’이라는 말도 19세기에 일본의 학자들이 서구의 개념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만들어낸 신조어로서 그 후 우리나라에 수입된 것이다. ‘행복’은 일본에서 번역어를 만들어 낼때 가장 고심했던 단어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영어의 ‘happiness'혹은 불어의 ‘bonheur'같은 단어는 어원상(신이 허락한) 좋은 시간으로 기독교적인 신의 개념이 배후에 놓여 있다. 동아시아의 사고에는 그런 것이 없었으므로 일본의 번역자들은 물질적 풍요와 관련이 있는 두글자인 ‘행(幸)과 복(福)을 붙여서 단어를 만든 것이다. 긴장과 이완의 균형이 깨지면 건강이 무너진다. 과도한 긴장이 축적되면 병이 든다. 문제는 이완이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긴장은 높아만 지는데, 이완의 기회는 줄어들고 있다. 지난 80년대에 ‘역동명상’을 유행시키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던 인도의 라즈니시는 500여권이라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이 500여권의 저술들은 그의 제자들이 스승인 라즈니시의 평소 강론을 받아 적어 놓은 것이다. 기 500권의 내용을 한마디로 압축하면 무엇인가? 바로 이완이다. 라즈니시가 한 시대를 풍미할 수 있었던 비장의 카드는 릴랙스였던 것이다. 그만큼 서구문명이 긴장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증거이다. 하여 그 이완이 행복에 가까운 정의였을 것이다. 법정스님의 저술인 ‘무소유’가 경매에까지 부쳐질 정도로 한국 사회의 주목을 받았던 이우도 ‘이완’과 무관치 않다고 본다. 한국사회가 소유에 지쳐 있다는 이야기다.다른 말 필요없이 한국의 자살률 1위가 이를 말해준다. 어쩌면 우리는 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이 험한 세상에서 자살하지 않고 생존하기 위해서도 무소유라는 ‘이완처방’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소유가 진수성찬이라면 무소유는 달랑 밥과 간장이라고나 할까. 그렇지만 법정의 ‘무소유’가 좋다고 해서 매일 간장에 밥만 비벼먹고만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생활에서 소유를 안 할 수도 없고 뿌리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의 일상에서 소유를 자극하는 진수성찬은 아마 스마트폰 일 것이다. 이 스마트폰은 인간의 6가지 감각기관을 모두 자극하는 형형색색의 아이콘들이 화면에 열을 지어 서 있다. 마치 ‘나를 자극해 주세요’라고 하는 것 같다. 감각기관 가운데 가장 강렬한 자극은 사람의 눈을 통해서 온다. 눈으로 보면 갖고 싶다.그다음에는 소리를 통해서 귀를 자극한다. 귀를 통해서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메시지를 듣는다. 듣다보면 한가한 마음을 지니기가 어려워진다. 받기 싫은 전화를 받으면 긴장하고 독촉전화를 받으면 마음이 바빠진다.매일 몸에 휴대하고 다니는 스마트폰을 통해서 무한정의 소유 욕구를 자극받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스마트폰은 행복의 반대편에 서 있는 상징물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幸福한 삶일까?
인간은 누구나 행복한 삶을 영위하고 싶어 하지만 행복의 조건이란 자칫 잘못하면 물질적인 것에 만 치중될수 있다.

우리가 살면서 더 많은 돈을 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풍족한 생활, 그렇다면 왜 풍족한 생활을 원하는 것일까?

만약 거지가 백만장자 보다 행복하다면 우리가 부러워 해야 할 대상은 누구일까 백만장자일까.

과연 행복에 조건이 있을까?
등록금이 없어서 진학을못하는 사람에게는 돈이 행복이고 얼굴이 못 생긴 사람에게는 아름다운 외모가 조건이고 몸이 아픈 사람에게는 건강이 행복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행복의 요소들이 채워진다고 해서 완전한 행복을 느낀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한 가지 행복을 얻게 되면 그보다 더 큰 기쁨을 갈망하게 된다.

행복, 소유, 욕망, 즉 행복을 결정하는 것은 소유와 욕구이며. 욕망이 정해져 있을 경우 소유가 커질수록 행복하고 반대로 소유가 정해져 있다면 욕망이 적을수록 행복해 진다고 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행복의 최대화는 소유의 최대화이며 소유의 최대화는 수입의 최대와 같다,
먹고사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고 수입도 풍족한 사람이 행복하지 않다면 이는 욕망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부분에서 따스한 감사와 행복을 느껴야 할까. 가장 중요한 것은 "사소한 것에 크게 기뻐 할 수 있는 마음이다"

지금 내 삶을 이루고 있는 건강, 재잘거리는 손자들과 늙은 아내, 아침에 맞이하는 싱그러운 태양과 바람 정다웁게 들려오는 친구의 전화 등, 당연하고 사소한 것들이 커다란 행복을 만들어 낸다.

세상에는 병이 들거나 장애가 있어 다음날 깨어날 수 있을 까? 불안해하면서 잠이 드는 사람도 있고 인공호흡기를 달고서야 공기를 마실 수 있는 사람도 있다,

지금 당장 건강은 나와는 상관이 없다고 하지만 그 행복의 주인공은 언제든지 뒤바꿀 수 있음을 명심하자,

우리가 사람같이 살 수 있는날이 얼마나 더 남았겠습니까? 높은 이상과 희망찬 미래를 꿈꾸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런 욕망이다.
그러나 가끔은 발밑에 놓여 있는 불행도 살피면서 자신이 지금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다시금 되새겨 보자.

인생의 해는 황혼의 노을을 안고 서쪽으로 기우는데 무엇을 욕심내며 ,무엇을 탓하겠습니까?
그래서 이만큼 이렇게 살아왔는데 이제와 생각하면 없어서 못 먹고, 못 입고, 못 놀든 그때에 단칸방 한 이불 연탄불에 밥 해먹고 오손 도손 살던 그때가 그래도 행복했었는데...

- 옮긴 글 - - < 보내온 메일 옮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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