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7일 수요일

저녁 노을 인생 / 엄상익 변호사

 

낙조를 사진에 담으려는 여심도 아름다웠습니다.
우리네 인생도 예쁜 노을처럼 질 수만 있다면 ...

 

저녁 노을 인생 / 엄상익 변호사                                        

 

 얼마 전 변호사회로부터 상을 받았다. 특별한 건 아니었다.

변호사 생활 삼십년을 넘었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해 주는 상이라고 할까. 

사무실의 문을 닫을 때가 된 걸 느낀다. 어느새 인생도 칠십년이라는 세월의 강을 흘러왔다. 

종착역이 가까운 기차가 서서히 속도를 줄이듯 삶도 그렇게 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푸른기운이 약간은 남은 삶의 저녁무렵이다. 

실버타운 온천탕의 뜨거운 물에서 곧 인생 구십년 테이프를 끊을 노인을 만났다. 

그가 옆에 앉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여기 실버타운에서 산책을 하고 온천을 즐기는 기간은 내게 있어서 인생의 밤이 

오기 직전에 아주 짧은 쉬는 기간이요. 자칫하면 이 과정을 건너뛰고 바로 병원으로 가서 

의미 없는 인생을 보내기 쉽지. 여기 실버타운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노인들이 있는데 

그건 이미 건강이 받쳐주지 못한다는 징표지.”

현세와 내세 사이에 일종의 틈 내지 여백을 두는 것은 지혜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틈이라는 게 얼마나 되나 알 수가 없다. 실버타운에 묵으면서 내가 요즈음 

느끼는 현상이 있다. 저녁밥을 먹고 식당을 나서면 밀도 높은 깜깜한 밤이 갑자기 

쳐들어와 사방을 포위하고 있다. 저녁과 밤 사이에 틈이 없는 것 같아 보인다. 

내방으로 들어가 텔레비전을 켠다. 드라마한편을 보고 그 다음은 책을 읽거나 글을 

쓰다가 버릇대로 밤늦게 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드라마 한 편을 채 다 보기도 전에 허공에서 죽음같은 잠이 쏟아져 내려온다. 

죽음은 갑자기 정신 못차리게 쏟아지는 깊은 수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걸 보면 현세와 내세 사이의 틈이 면도날 들어갈 정도밖에는 안되는 아주 얇은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했다. 

온천욕탕에 몸을 담근 노인이 신선이 계시를 하듯 느릿느릿 말을 계속한다.

“인간의 몸이란 세월이 가면 누구나 다 녹이 슬고 부스러지게 되어 있지.

 그런데 말이요. 남이 갑자기 병으로 쓰러져 병원에 가는 걸 보면서도 사람들은 

자기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착각을 하는 거야. 죽음도 그래. 눈 앞에 닥쳐오면 

갑자기 어쩔 줄 모르고 허둥대지. 나이를 먹어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야. 

누구에게나 죽음이 온다는 건 관념으로 알지만 그건 먼 훗날이고 아직은 아니라는 거지. 

당연히 늙음과 병 그리고 죽음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말이요. 반면에 말이요”

노인의 말이 예사로 들리지 않는다. 나는 조용히 다음말을 기다리고 있다.

“남이 돈을 벌고 잘되면 자기도 꼭 그렇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고 따르는 거야. 

사람마다 타고난 그릇이 다르고 거기에 담을 분량이 다른데 말이야. 

그걸 인정하지 않는 거지. 우선 돈이라는 게 그렇소. 여기 바닷가에서 하늘 높이 

떼를 지어 날아가는 갈매기를 돈이라고 가정해 보시오.

 누구에게나 그게 보이지만 누구나 잡을 수 있는 건 아니지.잡을 수 있는 사람은

 특별한 기술을 가진 극소수의 사람이 아니겠소? 부자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요.”

노인은 이미 한 경지를 간 것 같다. 그가 덧붙였다.

“어제 내가 아는 사람이 나를 찾아왔었소. 나이를 먹으면서 서서히 오른쪽 몸이 

마비가 되어간다는 거야.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수술을 얘기하면서 성공확률이 

반반이라고 한다는 거요. 그 사람은 참고 견딜지 아니면 수술을 하고 다시 

골프를 칠지 고민한다는 거야. 

짧은 나머지 여생동안 생각하는 게 골프라는 걸 보면 좀 안타깝지. 

자신만이 아니라 남을 위해야 차원이 상승하고 천국을 갈 수 있는데 말이요. 

왜 칠십대로 아직 눈이 괜찮은 노인 중에는 눈이 안보이는 사람이나 

세상사를 끊은 더 늙은 노인에게 신문읽어주기를 하는 사람도 있지 않소? 

버려진 현수막을 모아 가방을 만들어 나누어주는 할머니도 있다는 말을 들었소.” 

“인생의 저녁을 어떻게 보내셨습니까?”

“구십년의 인생길에서 여러 사람을 만났고 그들에게서 여러 가지 슬픔과 기쁨을 봤지. 

살아보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이 되기를 기대하지 않는 게 더 평안을 얻는 방법이오. 

일들이 일어나는 대로 받아들이는 거지. 나쁜 것은 나쁜 것 대로 오게 하고 좋은 것은 

좋은 것 대로 가게 하는 거요. 그 때 삶은 순조롭고 마음의 평화가 오는 게 아닐까?”

노인들중에는 진흙단지 안에 보석을 담고 있는 분이 더러 있는 것 같다. 

그런데도 젊은 사람들 중에는 늙은 모습만 보고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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