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8일 목요일

나는 희망(希望)의 증거(證據)가 되고 싶다.


 서진규 씨가 하버드 대학 박사과정 시절에 딸과 함께 하버드 동상 앞에서 찍은 사진.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 1948년 가난한 어촌에서 엿장수의 딸로 태어난 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녀는 고사리손으로 밥 짓고 손빨래하며 집안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학창 시절에도 공부를 잘했고 박사가 되는 게 꿈이었지만, 가난 때문에 대학 진학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고등학교를 마친 뒤 바로 가발공장과 식당 종업원으로 일했지만 늘 꿈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미국에서 가정부를 찾는다는 신문 광고를 보곤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혈혈단신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하지만 길어진 수속으로 가기로 했던 가정집은 이미 다른 가정부를 고용한 상황이었습니다. 가진 돈은 겨우 100달러가 전부였고 더욱이 영어는 거의 불가능했던 그녀는 낯선 땅에서의 차가운 현실을 직접 맞아들여야 했습니다. 그 뒤로 한 식당에 취직하게 되었고 그 이듬해 꿈에도 그리던 유학 생활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그녀는 하루를 24시간이 아닌 1,440분으로 쪼개며 낮에는 식당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할 정도로 하루를 꽉 채워 살았습니다. 1976년 미 육군에 들어가 '최우수 훈련병'으로 표창을 받았으며 50세가 넘은 나이에 하버드 대학교에서 박사 과정까지 마쳤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서진규 씨로 소령으로 예편한 미군 예비역 장교이자 작가입니다. 그녀는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역경이 오히려 나를 강하게 연단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희망 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꿈을 위해 달려갈수록 힘들고 벅찬 건 잘하고 있다는 방증일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꿈은 꿈꾸는 사람을 가혹하게 다루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꿈을 가져야 합니다. 꿈은 모든 절망을 이기는 희망을 주고 고난을 이겨내는 묘약이기 때문입니다. -행복 비타민 글에서 - <보내온 메일 옮김>

지독한 가난, 학업포기, 식당 직원, 가발공장 여공, 그리고 미국의 최고의 명문 대학 하버드 박사가 된 한인 서진규 박사에게 따라다니는 이름이다. 그녀에게는 숱한 시련이 찾아왔다. 그러나 그녀는 "왜 나만 불행한 거야. 왜 나한테만 이렇게 많은 시련이 몰려오는 거야. 하나님도 무심하시지."라고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시련을 통해 가슴 깊숙이 성공을 향한 `희망`의 씨앗을 뿌렸다. 그리고 `희망`을 현실로 바꾸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 계획을 착실하게 실행으로 옮겨 35년 만에 아메리칸 꿈을 이뤄냈다. 가발공장 직원이던 자신을 미군 소령, 하버드대 박사로 탈바꿈시켰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가발공장 직공에서 하버드 박사가 된 한인 서진규 박사의 억척 삶의 이야기 2부, 희망으로 아메리칸 꿈을 이뤘다를 함께 한다.

1967년 풍문여고 졸업, 1971년에 도미, 1975년 미 육군에 입대, 1987년 미국 메릴랜드대 경영학과 졸업, 1992년 미국 하버드 대 석사, 1996년 미 육군 소령 예편, 2006년 하버드대 국제외교사-동아시아 언어학 박사 이것이 서진규 씨의 이력서다. 서 씨가 40살이 넘을 때까지 하버드 대학과는 먼발치에서 생활했다고 한다. 서 씨로부터 미국에 온 이야기부터 들어본다.

서진규: 가정부를 찾는다는 신문광고를 보고서 그 길 밖에는 제가 미국에 갈 길이 없었기 때문에 그래서 가정부로 미국으로 갔고, 또 그때까지도 제가 박사가 되어서 나중에 정의의 사도가 되겠다는 그 꿈은 항상 가지고 있었지요. 그런데 사실 미국에 와서 가정부는 않 했어요. 가정부로 왔는데 수속하는데 2년이 걸리다 보니 진짜 가정부가 필요한 가정인데 2년 동안 안 나타나니까 남미에서 여자아이를 데려다가 일을 시키고 있더라고요. 그래서 가정부는 안 했는데, 미국에 도착했을 때. 만 22살, 영어는 겨우 화장실을 찾아가는 실력, 그러고 돈도 100 달러 밖에 없었고요. 그렇지만 그 당시 그것이 오히려 저에게는 영어로 disguised blessing 위장된 축복이라고 하던가요.

서진규 씨의 희망은 이제 시작된다. 하버드 대학에 가는 길목이다.

서진규: 가정부를 못하는 바람에 아리랑이라는 식당에 취직을 하게 되고, 뉴욕에서 당시 최고의 식당이었기 때문에 팁도 많고 해서 갑자기 대부자가 된 기분, 그리고 그 이듬해에 꿈에도 그리던 유학생활을 시작하게 되지요. 낮에는 대학생이고 저녁에는 식당에서 일하면서 사랑도 하게 되고, 이렇게 주어진 일을 가장 현명하게 풀어가다 보니까? 나중에 하버드 대학까지 가는 그런 결과를 가져온 거지요.

서진규 씨는43살 때 하버드에서 석사과정을 밟게 된다.

서진규: 제가 처음에 하버드를 간 것은 사실 미군에 입대해서 미군에서 장교가 되고 나서 지역 전문가 과정이 있습니다. 지역 전문가를 도전했을 때 사실 떨어졌습니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여자였기 때문에 일본 남자들과 협상을 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실패를 할 것이다. 그게 이유였는데 결국 설득해서 시험 봐서 뽑혔고, 그런 사명을 이루기 위해서 제가 하버드를 도전하게 됩니다. 지역 전문가 과정에서는 대학원도 보내주고 언어도 가르쳐주고 해서 일본어도 좀 유창하게 했거든요. 사명을 가지고 하버드에 도전하니까? 전에는 겁이 나서 생각도 못했는데 오히려 하버드가 뒷산같이 보이고 자신감을 가지고 43살부터 석사과정을 시작합니다.

서진규 씨가 하버드 대학에서 20살 아래 세계의 천재들과 함께한 이야기다.

서진규: 저와 경쟁하는 사람들은 저보다 20살이 어린 세계 천재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저에게는 사명감이 있잖아요. 제가 실패를 하면 우수한 여군 장교들 갈 길이 진짜로 없어진다는 그 사명감. 그 사명감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사실은 그게 무서운 힘을 발휘하는 것 같아요. 그 사명감 하나 붙들고 멋있잖아요. 사명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내가 하버드에서 공부한다는 생각, 그렇게 하면서 공부를 했더니 나중에 석사과정에서 제가 A 마이너스의 학점을 받으면서 2년 후에 석사 학위를 따더라고요.

서진규 씨는 어린 시절 박사의 꿈을 성취하기 위해 그 과정을 하나씩 이루어 갔다.

서진규: 이왕에 하버드까지 들어 왔으니까? 그때는 이미 인정해주는 교수님도 생기고 자신감도 생기고 해서 박사과정에 도전하게 되고 첫해는 떨어졌지마는 그 이듬해 합격했어요. 그러고 합격은 했지마는 현역 장교였기 때문에 저는 일본으로 다시 발령을 받아 갔는데 지역 전문가로 뽑힌 게 대성공을 한 것입니다. 제가 성공을 하고 나니까? 미군에서 제도를 바꿔서 제가 있는 동안에 우수한 여군 장교들을 배치하기 시작했고, 그게 20년 후에는 바로 저의 딸이 가게 되는 그런 문을 열게 되고 길을 닦게 되는 계기였더라고요. 군에서 20년이 끝난 다음에는 저는 아직도 박사에 꿈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하버드로 돌아왔는데, 그때는 50살이 다 된 나이였고, 저보다 30살이 어린 학생들과 같이 경쟁하는데 뭐! 처음에는 굉장히 나이에 대해서 신경을 쓰게 되고, 실력에 대해서 자격지심도 느꼈지만, 또다시 자신에게 내가 박사를 따는 것은 한국에서 밑바닥에서 태어난, 멸시받던 가시나도 결국 자기가 꿈과 사명감으로 하면 세계 최고 학교인 하버드의 박사도 될 수 있다는 꿈을, 성공의 가능성을 세계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게 목표였기 때문에 그런 멋진 사명감을 가지고 공부를 했더니 물론 시간은 많이 걸렸어요. 결국은 제가 한국 나이로는 59살에 박사 학위를 따내는 결과를 얻어내더라고요.

하버드에서의 희로애락을 물었다.

서진규: 세계 최고의 학생들이 모였잖아요. 거기서 또 서열이 생기거든요. 그런 과정에서 학생들이 좌절하고 자살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 중간에 제가 섞여 있는 거예요. 같은 학생으로서 공부는 좀 못 따라가도, 저는 인생에 대한 것은 누구보다 자신이 있으니까 동료 학생들이 마음 놓고 자기들의 고민을 털어 놓았을 때 저는 심리학자 이상으로 그들의 마음을 설득하고 희망을 주고 그들에게 용기를 주고 일으켜주는 그런 일을 많이 했어요.

서진규 씨가 딸과 함께 하버드 대학을 다녔다는 이야기는 자랑스러운 한인의 상이다.

서진규
: 제가 하버드를 가는 바람에 처음에 하버드를 신청했다. 떨어지고 조지타운대학에서 공부하던 딸이 3학년부터 하버드로 전학을 오게 되잖아요. 그래서 엄마와 딸이 동시에 같은 교정에서 같은 교수님 지도받아가면서 신기하게 그래서 우리는 유명인사가 되기도 했고, 거기서 딸과 같은 곳에서 같은 학문을 파고들고 공부를 하고 있어 남들은 누려볼 수 없는 최고의 행복을 누렸지요. 그런데 결국 나이가 50살이 넘고 실력은 젊은 사람들보다 떨어지니까 그런 데서 고뇌가 많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힘든 점도 많았고, 젊은이들은 막 피어나는데 저는 내리막길 인생 인가하는데 대한 슬픈 그런 것도 있었고, 못해낼까 봐! 굉장히 두려움도 있었고, 그렇지만 아무튼 해내고 나니까? 오히려 제가 이겨 나왔다는 것에 많은 사람이 꿈과 희망을 찾아내는 것 같더라고요.

서진규 씨는 딸 성아가 항상 든든하고 자랑스럽다.

서진규: 저의 딸은 한국의 한 방송사 ‘일요 스페셜’ 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했을때 어린 시절 꿈이 뭐냐고 물었는가 봐요. ‘저는 나중에 커서 엄마의 복제인간이 되는 게 꿈이 였어요’라고 답한 말을 나중에 전해들었을 때 그때 느낌은 진짜 눈물이 쏟아질 정도의 기쁨, 환희, 아, 내가 살아온 보람이 있었구나! 자기 자식에게 그런 칭찬을 듣는다는 게 너무도 굉장한 기쁨을 주었고요. 딸이 엄마의 복제인간이 되기 위해서 자기 나름데로 굉장히 노력하다 보니 엄마가 하버드 갔으니까 자기도 하버드를 가야 한다는 그런 생각으로 공부를 열심히 했어요. 고등학교 졸업할 때 미국 대통령상도 탔지요. 대통령상은 250만 명이 해마다 졸업할 때 141명에게 주는 상인데 거기에 뽑혀서 상도 탔고 고등학교 졸업할 때 전교에서 1등, 학생회장, 처음에 하버드 떨어져서 조지타운대학을 갔지만, 2년 후에는 결국 하버드로 와서 하버드를 졸업했고 그리고 ROTC(학사장교)를 했어요. ROTC에서 4년 연속 1등도 했어요. 지금은 미군 소령입니다. 그리고 군에서도 다른 동료보다도 1년 빨리 진급하고 하여튼 굉장히 잘하고 있습니다.

서진규 씨는 한국에서 세 권의 책을 냈다. 1999년,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 2000년, 희망은 또 다른 희망을 낳는다. 2007년, 서진규의 희망이다. 그의 책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서진규: 한국에서 일요스페셜을 통해 갑자기 유명인사가 되고 나니까 제 책이 굉장히 인기가 있게 됐어요. 처음의 책은 제 인생에 대한 책인데 ‘나는 희망의 증거가 되고 싶다.’ 책을 썼는데 나오자마자 2주 만에 10만 권이 다 팔리고, 두 번째 인쇄판 10만 권도 다 팔리는 등 굉장한 인기가 있더라고요. 딸을 키운 이야기 책 ‘희망은 또 다른 희망을 낳는다.’가 2000년에 나왔는데, 이 책 역시 큰 인기를 얻었고, 그리고 2007년에는 제가 하버드에서 늦깎이 공부벌레로서 성공했던 그런 내용으로 책을 펴냈어요. 그리고 첫 번째 책은 일본에서도 ‘희망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이런 타이틀로 출판됐었어요. 이번에 미국에서 제 책들중 1권과 3권을 합쳐서 영어로 출판하는데 일단 1부를 제가 미국에 도착하는 데까지 작년 10월에 출판됐고, 2부는 제작 중에 있습니다. 올해 안에 2부 3부가 나올 것으로 보입니다. 제 책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희망을 찾고, 인생이 바뀌고, 자살하려던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이야기를 듣고 아무튼 행복한 느낌이 들었어요.

서진규 씨는 한국에서 천 번도 넘게 강연도 했다. 그는 앞으로 미국의 오프라 윈프리(유명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사회자 겸 봉사자)처럼 살고 싶단다. 그리고 앞으로 미국 국무장관이 되는 것이 꿈이다.

서진규: 1999년에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국에서 1,000회 이상을 강연했어요. 강연을 통해 수많은 사람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일을 했고, 지금은 미국에서 활동하는데, 제가 2006년에 박사 학위를 끝내고 2년 동안 건강이 나빠서 한국에서 활동을 못하고 치료만 했어요. 지금은 다 낳았어요. 그래서 다시 또 다른 꿈을 꾸면서 미국에서도 강연으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면서 꿈과 희망을 주고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서 돈도 많이 벌어서 오프라 윈프리처럼 그런 위치로 가서 말과 행동으로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것뿐만 아니라 이 사람은 큰일을 할 수 있는데 재력이 부족해서 공부를 못하는 젊은 학생들이나 가난한 기업가들을 도와주는 일도하고, 한 6년 내지 7년 후에는 미국의 국무장관 꿈도 꾸고 있습니다.

서진규 씨는 미국 국무장관이 된다면 자신이 했던 지역 전문가, 즉 군인 외교관 경험을 통해 남북통일에도 이바지하고 싶단다.

서진규: 남북한이 통일될 때가 다가오고 있잖아요. 한국이 자기네끼리 통일을 할 수 있다 하더라도 사실 미국의 도움 없이는 평화적으로 통일한다는 게 현실적으로 어렵잖아요. 그랬을 때 미국의 국무장관이 서진규다 하면 뭐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어요. 그래서 그런 꿈도 꾸고 있고, 요즈음 기도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이게 길이 아니면 다른 쪽으로 인도하시고 이게 길이라면 제가 지금 알지 못하는 능력까지도 깨닫게 해서 그걸 키워서 정말로 북한에서 고생하고 있는 가여운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도 길을 열어주는 일에 쓰임 받을 수 있도록 많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매 맞는 아내에게 주는 이야기도 들려준다.

서진규: 매 맞는 아내로서 사실 그 당시는 살인까지도 생각했었어요. 근데 모성애로 그걸 이겨 나오고 그게 바로 군에 입대하게 되는 동기가 되거든요. 매 맞는 사람들이 참 많더라고요. 한국에 지금도 많아요. 그래서 세계의 퍼져 있는 매 맞는 사람들에게 포기하지 말라는 것과 복수만이 선택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제가 처음 결혼해 딸을 낳고 1년도 안 되었을 때인데 남편의 폭력이 있었어요. 그리고 비하하는 말을 함부로 하고 힘센 몸으로 때린다거나 때려서 자기 위치를 가르처준다 이런 생각으로 사실 맞는 입장에서는 굉장히 두려움 같은 것 자존심 때문에 남들에게 이야기를 못 하니까 안으로는 곪아 터지고 있는 거지요. 제가 어릴 때부터 꿈이 정의의 사도가 되어서 약자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제가 물리치고 약자를 구해 주겠다는 꿈이 있고 희망이 있었는데 결국은 제가 도움도 못 받고 쓰러져가는 약자가 되어 있는 그 장면을 스스로 인식해 가면서 분노로 복수의 불길이 타올랐어요. 그 당시 제가 어떻게 하면 복수를 해줄까 그런 생각을 많이 했었어요. 그때 제가 살아남기 위해서 썼던 방법은 복수심보다 더 강한 것이 모성애가 아닌가 그 당시 딸이 3-4개월밖에 안되는 딸을 안고서 한없이 울면서 종교인이었으면 신에게 매달렸을 텐데 저는 그런 믿음도 없었기 때문에 딸만 안고 울면서 그리고 어릴 때 자신에게 했던 이야기 ‘세상이 너를 버려도 나만은 너를 지켜줄 것이다.’ 했던 그 결심 그 불쌍한 자신을 도와주겠다던 그 결심 그리고 동시에 이 딸이 무슨 죄가 있기에 살인마의 딸로 자라게 하느냐를 생각했습니다. 지금 당장 가정 폭력에 시달리고 있는 분들은 현명하게 생각하고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라도 거기를 탈출해서 또 다른 인생을 찾아가는, 그래서 나뿐만 아니라 자식들에게 큰길을 열어주는 그런 선택을 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전 세계 한인 젊은이에게 주는 충언이다.

서진규: 큰 꿈을 꾸어라! (DREAM BIG DREAM!) 이왕이면 자기가 원하는 큰 꿈을 꾸고 그리고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니까 젊은 시절에 나이 들어 할 수 없는 노동이라든가 이런 것도 실제로 해 보면서 자기가 성공했을 때 다른 사람들에게 더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고요. 그리고 제 인생철학이기도 한데 우리는 태어날 때 아무런 선택도 없고 죽는다는 사실에서도 아무런 선택도 없고 한 번 밖에 살 수 없는 인생이지마는 한 번 주어진 기회를 어떻게 살다 갈 것인가는 제가 결정하는 거니까 이왕에 태어났는데 한번 내 한계가 어디까지인가 멋지게 탐구해 가면서 행복하게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가발공장 직공에서 하버드 박사가 된 한인 서진규 박사의 억척 삶의 이야기 2부, 희망으로 아메리칸 꿈을 이뤘다를 함께 했다. 지금까지 세계의 한국인 기획과 진행에 RFA 이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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