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23일 토요일

무서운 말, 고마운 말



 “이 새끼야, 돈 안 가져왔는데 뭐하러 학교 와? 빨리 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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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탈옥수로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신창원은 어린 시절 어머니가 간암으로 돌아가시고 매우 가난하고 불우한 가정 환경에서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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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엄마가 들어왔으나 새엄마는 동생이 아무리 아파도 모른 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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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난 신창원이 하루는 부엌칼을 들이대고 오늘 내로 집을 나가라고 협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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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모는 그날로 집안의 패물을 챙겨 집을 나갔고, 신창원은 아버지로부터 죽도록 얻어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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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6학년 때에는 서울로 도망갔다가 가출 소년으로 잡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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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에 들어가면서 가난한 집안 사정 등으로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받고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야단맞는 횟수가 잦아지면서 학교를 포기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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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 뒤인 1982년부터 소년원과 교도소를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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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를 중퇴한 신창원은 1982년 2월 절도죄로 김제경찰서에 붙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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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훈방 조치하자 그의 아버지는 아들의 버르장머리를 고친다고 다시 끌고 가서 “소년원에 보내 달라”고 사정해 소년원에 송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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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신창원은 오히려 이 사건으로 인해 본격적으로 반항적인 인생을 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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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창원은 소년원에 들어가면서 마음을 돌이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또 다른 범죄를 배우고 계속해서 범행을 하게 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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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에 한 번씩 갔다 올 때마다 그의 범죄는 나날이 담해졌으며, 결국에는 강력 범죄까지 저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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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를 중퇴한 신창원은 1982년 2월 절도죄로 김제경찰서에 붙잡혀 소년원에 송치된 뒤 바로 풀려나 다음해 상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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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음식점 배달원을 비롯한 여러 일을 전전하다 계속 절도죄를 짓게 되고 경찰에 체포되어 수감 생활을 하던 중 탈옥을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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훔친 거액의 돈으로 인심을 쓰고, ‘부잣집만을 털고 사람을 해치지 않는다’는 일기를 통해 신화를 만들어 내며 ‘성공한 탈옥수’를 꿈꾸던 신창원은, 그러나 한 시민의 제보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제압하자 마침내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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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창원은 그의 저서《신창원 907일의 고백》에서 자신이 범죄자가 된 계기를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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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5학년 때 학비를 못 내자 담임 선생님이 “이 새끼야, 돈 안 가져왔는데 뭐하러 학교 와? 빨리 꺼져.”라고 소리쳤는데, 그 순간 자신의 마음 속에서 악마가 태어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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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나를 잡으려고 군대까지 동원하고 엄청난 돈을 쓰는데 나같은 놈이 태어나지 않는 방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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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너 착한 놈이다.’하고 머리 한번만 쓸어 주었으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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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창원은 후에 “사회에서 문제아라고 치부해 버린 아이들은 정에 굶주린 불쌍한 애들”이라며 “저 같은 범죄자가 다시는 없게, 사회와 가정에서 문제아들에게 사랑을 주십시오.” 라며 사회의 관심을 당부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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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에 돌을 던지는 사람은 재미로 던지지만 그 돌에 맞아 죽는 개구리는 재미로 죽는 게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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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모욕적인 말 한 마디는 어린 신창원의 마음에 큰 트라우마가 되었고, 심한 모멸감과 반항심을 갖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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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에 난 상처는 시간이 지나면 아물고 새 살이 돋아나 깨끗해질 수 있지만, 가슴의 상처는 오래도록 아물지 않고 아픔을 주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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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코 속담에는 “말이 입힌 상처는 칼이 입힌 상처보다 깊다.”는 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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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가 시작된 이래 칼이나 총에 맞아 죽은 사람보다 혀끝에 맞아 죽은 사람이 더 많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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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모욕적인 말 한 마디는 신창원의 인생을 망쳐놓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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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자랑스럽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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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고의 외과 의사로 인정받고 있는 이국종 교수는 어린 시절 지독한 가난에 허덕이면서 부유한 삶은 꿈조차 꾸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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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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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가장인 아버지는 6·25 전쟁 때 지뢰를 밟아 한쪽 눈을 잃고 팔다리를 다친 장애 2급인 국가유공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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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종 소년은 중학교 때까지 학교에 국가유공자 가족이라는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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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아버지’라는 이름은 그에게 반갑지 않은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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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신의 아들’이라고 놀리는 나쁜 친구들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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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아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을 때마다 술의 힘을 빌려 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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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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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종 교수는 중학교 때 축농증을 심하게 앓은 적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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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를 받으려고 이 병원 저 병원 문을 두드렸는데, 국가유공자 의료복지카드를 내밀자 다른 병원에 가보는 게 낫겠다며 내치듯 돌려보냈고, 여러 병원을 전전했지만 문전박대를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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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이 교수는 아직 어렸지만 우리 사회가 얼마나 냉정하고 비정한지를 뼈저리게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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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자신을 받아줄 다른 병원을 찾던 중, 그는 자기 인생을 바꾸어 놓는 의사 한분을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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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산’이라는 외과 의사였다. 그분은 두 손에는 날카로운 매스를 들고 있지만, 가슴에는 따뜻한 사랑을 품은 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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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어린 이국종이 내민 의료복지카드를 보고는 그는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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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자랑스럽겠구나!” 인술(仁術)의 의사 이학산은 진료비도 받지 않고 정성껏 치료해 주면서 “열심히 공부해서 꼭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하고 격려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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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한 마디가 어린 이국종의 삶을 결정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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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산 선생님은 나라를 위해 싸운 훌륭한 아버지를 두었으니 진료비도 받지 않겠다 하셨고, 그 후 이국종 소년이 병원에 갈 때마다 열심히 공부하라고 용돈까지 챙겨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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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산 선생님은 모두가 이 교수와 그 가족을 무시하고 그들에게 등을 돌릴 때, 군말없이 두 손을 내밀어 소년 이국종을 보듬어주면서 차가운 세상에도 꽁꽁 얼어붙은 마음을 녹이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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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이국종은 마음 속 깊이 감사함을 느꼈고, 그분과 같은 좋은 의사가 되고 싶다는 꿈을 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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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가 되어 가난한 사람을 돕자, 아픈 사람을 위해 봉사하며 살자’라는 대표하는 삶의 원칙도 그 때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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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종은 가난과 장애로 인해 무시받았던 서러움을 맛보면서 “아픈 사람에게 만큼은 함부로 대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고, 이를 실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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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국종은 지금 대한민국 최고의 외과의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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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는 돈 낸 만큼이 아니라, 아픈 만큼 치료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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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그의 대표적인 삶의 원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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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산이 없었으면 오늘날의 이국종이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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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말 한 마디,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의 가시같은 말 한 마디는 한 사람의 인생을 파멸로 몰아넣었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깊이 생각하고 위로해주는 사람의 따뜻한 말 한 마디는 한 사람의 인생을 아름답고 복된 인생으로 바꾸어 주었다.

이한규 칼럼니스트

출처 : 열린뉴스통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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