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4일 수요일

너그럽지 못한 한국인들

우리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는 인간관을 가만히 뜯어보면 결코 인간적이지 못하다. 어울려 살아가는 모습은 분명 인간적인데 남을 재는 잣대는 전혀 아니올시다.

 

 

우리의 인간관은 ‘인간은 …해야 한다’는 당위적 인간관이다. ‘지도자는 도덕군자요, 흠결이 없어야 한다’는 명분적 인간관, 근엄한 인간관쪽이다.

그러다보니 아무도 신뢰 못하고, 아무도 존경 못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그런 사람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100% 실행할 수 없는 잣대로 사람을 재단하니 그 누구도 만족시켜주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공허한 미덕의 강조보다 바람직한 인간의 행동이 무엇인지, 명분의 개발보다 구체적 행동전략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인물을 평가한다면 지연?학연이나 당리당략, 내 편이냐 네 편이냐는 좁은 관점에서 벗어나 훨씬 자유롭고 정확하게 인물을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유태인들이 구약성경의 다윗왕의 패륜행위는 접어두고 그들 최고의 영웅으로 기렸다면, 기독교인들은 신약성경에 나오는 베드로를 대표적인 성인으로 추앙한다.

그러나 예수의 수제자인 베드로도 로마군 총칼 앞에서 스스로 살기 위해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하는 ‘배반죄’를 저질렀다. 만약 지금 한국적인 관점이라면 베드로는 성인 명단에서 추방돼야 마땅하다. 그렇지 않은가.…

엄정한 종교적 관점에서도 인간에 대한 판단이 이러할진대 세속적으로 사는 우리들이 인간과 사회를 보는 눈은 좀 더 인간적이고 관용적이어야 할 필요가 있다.

살아가면서 내가 남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려면 내가 먼저 남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해와 관용이 필요하다. 남을 너그럽게 이해해 줄 때 상대방도 나를 너그럽게 이해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너무 팍팍하다. 상대방의 허물이나 실수를 먼저 본다. 그러니 온전한 인간관계, 인간관이 바로서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좀 더 현실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왜 남을 용서하지도 못하고, 왜 남에게 관용스럽게 대하지도 못하고, 왜 스스로 행복해하지도 못한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바로 자기 자신에게도 그렇게 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스스로에게 관용적인가. 자신이 저지른 지난날의 잘못을 용서해 주었는가. 어쩌다 나오는 실수를 껄껄 웃으며 대범하게 포용하는가.

 당신은 자신을 좋아하는가. 만족하는가. 스스로 자존감(self-esteem), 자신감(self-respect), 이 높은 편인가.…


우리의 행복지수가 낮고, 남의 비판을 못 참고, 남을 용서해주는 것이 도대체 이런 것들과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가.

진정한 용서는 자기를 용서하는 데서 출발한다.

삶의 길목에서 흔들리는 자신부터 용서하자.

주위로부터 지적받고 위축되는 자신부터 용서하자.

스스로 미워지고 형편없게 느껴지는 자신부터 용서하자

인생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끊임없이 다시 새롭게 일어나 도전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의 실망감을 물리쳐 보자.

그런 다음에 곰곰이 생각해보자.

당신의 삶에 부딪혀오는 타인을 좀 더 이해해줄 수는 없는 지를…

우리가 남을 용서 못하고, 관용스럽게 대하지도 못하는 이유는, 바로 자기 자신에게도 그렇게 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출처 : 마음건강 길(https://www.mindgil.com)


**좋은 사람은 좋은 사람을 만나고
따뜻한 사람은 따뜻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당신이 좋은 사람이기 때문에
당신이 지금 좋은 사람을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솔직하고 따뜻하게 상대를 대하므로
상대가 당신에게 따뜻함을 느끼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을 못 만난다며 투덜대기 전에
스스로가 어떤 생각으로 상대를 대하는지를
돌아보는 것도 필요합니다.** 옮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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