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聞)에는 귀(耳)가 있지만, 귀에는 문(門)이 없다
왜 경청을 해야 하는가. 생물학적으로 살피자면 귀의 특징과도 관련이 있다. 귀는 입이나 눈과는 달리 뚜껑(문)이 없다. 들어오는 소리를 차단하고자 할 때, 입과 눈처럼 닫아버릴 수가 없다는 뜻이다. 손가락이나 귓속 마개 같은 것으로 막아야 방음(防音)할 수 있다.
조물주는 왜 인간의 귀를 이렇게 만들어놓았을까. 들을 문(聞)자를 보면 문(門) 속에 귀(耳)가 있다. 그런데, 정작 생물의 귀에는 문이 없다. 한자를 잘못 만든 것일까. 아니면 귀를 잘못 만든 것일까.
여기에 의미심장한 뜻이 있다고 본 사람이 바로 노자(老子)이며, 이 내용은 도덕경에서 중요한 통찰의 보조재로 쓰이고 있다.
경청은 바로, 문이 없는 귀로 들어오고 있는 어떤 소리에 뇌가 진지하게 개입하여 그 의미를 읽어내고 그 소리의 진원지인 발언자의 내면까지 읽어내는 고도의 청취행위라고 볼 수 있다.
소리를 받아들이는 건 귀, 듣는 것은 뇌
귀에는 문이 없기에 일단 들어오는 소리를 다 접수해야 한다. 귓바퀴와 귀 안이 나사모양의 복잡한 형상을 하고 있는 까닭도, 갑작스런 소리나 다른 것의 침입에 대비한 장치들이다.
소리의 차단이나 필터는 무엇이 하는가. 뇌가 한다. 이미 들어온 소리의 유형과 내용을 빠르게 분석하여 그 소리의 '값'과 의미를 따져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결정한다. 들어온 소리와 뇌의 작동이 '듣기'를 공조하기에, 귀의 문은 사실 뇌의 인식기능으로 설계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귀로 들어온 소리를 모두 다 풀어내고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그 중에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만 뇌가 주의를 기울여 듣기 시작하는 것이다.
경청은 바로, 문이 없는 귀로 들어오고 있는 어떤 소리에 뇌가 진지하게 개입하여 그 의미를 읽어내고 그 소리의 진원지인 발언자의 내면까지 읽어내는 고도의 청취행위라고 볼 수 있다.
듣는 능력
"왕이 되는 것보다 더 높은 성공의 경지에 올랐다"는 뜻으로 쓰는 한자가 '성'(聖)입니다.
음악에서 최고 경지에 오른 사람을 악성(樂聖).
바둑 최고의 경지의 기성(棋聖).
시의 최고 경지의 시성( 詩聖).
인간 최고의 경지에 오른 사람을 성인(聖人)이라 부릅니다.
이렇게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성공 경지 핵심에 있는
'성(聖)'자는 耳(귀이)와 口(입구) 그리고 王(임금왕) 자 이 세 글자의 뜻을 함축한 글자입니다.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에 성공적으로 올랐을 때만 붙여주는 '성(聖)'자를 쓰는 순서는
耳(귀) 자를 맨 먼저 쓰고 그 다음에 口(입) 자를 쓰고 마지막으로 王(왕) 자를 씁니다.
귀(耳)를 맨 먼저 쓰는 이유는 남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듣는 것이 최우선이기 때문입니다.
다 듣고 난 후에 입을 열어야 상대가 만족하기 때문에 입(口)을 나중에 쓰게 만든 것이고
마지막에 왕(王) 자를 넣은 것은 "먼저 듣고, 나중에 말한다는 것은 왕이 되는것 만큼 어렵다."는 뜻입니다.
공자도 60세가 되어서야 "이순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했을 정도로 어려운 것이
먼저 모두 다 듣고 나중에 말하는 것입니다.
'이청득심'이란 마음을 얻는 최고의 방법은 귀를 기울여 듣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성인은 먼저 남의 이야기와 진리의 소리 그리고 역사(史)의 소리를 모두 조용히 경청하고 난 후에
입을 열어 말합니다.
그런데 열심히 듣는다고 해서 다 들리는 것도 아닙니다.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졌을 때 비로소 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순(耳順)이란 타인의 말이 귀에 거슬리지를 않는 경지며 어떤 말을 들어도 이해하는 경지입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모든 것을 관용하는 경지입니다.
말을 배우는 것은 2년이면 족하나 경청을 배우는 것은 60년이 걸리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얻기 위해, 진리를 깨닫기 위해, 지혜를 터득하기 위해 귀를 먼저 열어야 합니다.
귀에 지금도 거슬리게 들리는 말이 있다는 것은 아직도 수양이 부족하다는 증거이고
여기에 더해 아직도 듣기보다 말이 먼저 튀어나오는 것은 보통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잘 들을 수 있는 능력을 모두 갖추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은 금방금방 읽으니까요. 조금만 표정이 안 좋아도 바로 알아채죠. 그만큼 관심을 가지고 유심히 관찰하니까요. 그렇다면 누군가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는다는 것의 문제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문제가 되겠습니다. 얼마만큼 그 사람에게 애정이 있고 관심이 있느냐의 문제가 되는 것이죠. 아무리 듣기 능력이 뛰어나도 들으려는 마음 자체가 없으면 들리지 않는 법이니까요. 그래서 무언가에 귀를 갖다 대는 것은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관심을 갖는 것이 됩니다.
슬프게도 나이가 든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관심이 많았던 내가 점점 한두 가지에만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귀 기울이는 대상도 현격히 줄어드는 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절대적인 에너지양이 점점 줄어드는 것 때문이니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받아들 수도 있겠지만 씁쓸한 것도 사실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인간관계도 점점 협소해져 만나는 사람들만 만나게 됩니다. 그 중에서도 관심을 가지고 귀 기울여 들으려는 사람은 손에 꼽죠. 사회적으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가지 문제가 도처에 널브러져 있지만, 관심을 갖는 것은 몇 개 안되죠. 아니, 더 정확하게는 그것들을 안보고 안 들으려고 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너무 힘드니까요. 그렇게 점점 나도 내가 혐오했던 어른들처럼 '나'만 아는 이기적이고 협소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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