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2칸 임대주택서 숨진 11조원 부호, 13년간 숨겼던 비밀
별세 DFS 척 피니의 일생, NYT 등 연일 재조명
1984년부터 007 작전처럼 전재산 기부
지분 매각 과정서야 드러난 기부왕의 실체
수의(壽衣)에는 주머니가 없다. 그렇다 한들 10조원의 재산을 사후(死後)가 아닌 살면서, 그것도 한창 나이때부터 사회 곳곳에 나눠주고, 만년엔 빈털털이 노인으로 살다 홀연히 떠날 수 있는 이는 세상에 몇 없을지 모른다. 92세의 나이로 영면에 든 세계 최대 면세점 업체 DFS 창립자 찰스 프란시스 피니(이하 ‘척 피니’)가 ‘미국 부호들의 영웅’이라 불리며 추앙받는 이유다. 미 매체 포브스는 “이런 부자 중 누구도 살아 있는 동안 재산을 그렇게 완전히 기부한 사람은 없었다”고 했다.
“살면서 모든 것을 기부하고 가겠다”고 선언한 피니는 약속을 지키고 지난 9일 샌프란시스코의 침실 2개짜리 아파트에서 마지막 숨을 거뒀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수일이 지난 현재까지도 뉴욕타임스 등 미국 주요 매체들은 그의 업적을 기리는 기사를 연일 쏟아내는 등 전세계적으로 추모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뛰어난 사업 수완과 해외여행 수요가 급증하던 경제적 배경이 맞물려 면세점 사업으로 50세에 막대한 부를 이룬 피니는 1984년 자신의 인생을 바꿀 큰 결심을 한다. 그는 자신이 소유한 DFS의 지분 38.75%를 자신의 재단인 ‘애틀랜틱 필랜스로피’(1982년 설립)로 비밀리에 양도했다. 재단의 설립 목적은 전 세계의 교육, 인권, 과학, 의료 증진을 위해 80억 달러(10조8000억원)를 기부하는 것이었다.
13년 동안 피니는 기부 활동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포브스는 이 익명의 자선가에 ‘자선 활동의 제임스 본드’라는 별명까지 지어줬다. ‘제임스 본드’의 정체는 1997년에야 그가 LVMH에 지분을 매각하면서 드러나게 됐다. 그전까지는 ‘돈만 아는 억만장자’로 매도됐던 피니가 자신의 재산을 남몰래 기부한 사실이 알려지자 그제야 그에게 찬사가 쏟아졌다.
그가 기부를 시작한 계기는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 그는 부의 가장 잘 사용하는 방법은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이라고 말한 ‘기부 문화의 선구자’ 앤드류 카네기에게 영감을 받았다. 그는 1980년대 초 자신이 갖고 있는 자산을 하나하나 조사했다. 뉴욕, 런던, 파리 고급 아파트에 모자라 호화로운 별장도 갖고 있었다. 요트와 개인용 제트기도 있었다. 그는 문득 자신이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불안감을 느꼈고 부에 따르는 의무를 고민하게 됐다.
남몰래 선행을 실천한 어머니의 삶의 방식도 그에게 영향을 줬다. 간호사였던 그의 어머니는 매일 아침 루게릭병에 걸린 이웃을 차로 태워주려고 일부러 외출하면서도 이웃이 부담되지 않도록 출근하는 척했다고 한다.
피니는 그때부터 자신의 삶을 재정비했다. 리무진을 팔고 지하철과 택시를 이용했다. 그는 책과 서류를 비닐봉지에 담아 이코노미 클래스에 탑승했다. 뉴욕에 있을 때 값비싼 레스토랑에 가는 대신 햄버거를 즐겨 먹었다. 그가 손목에 착용한 시계는 단돈 10달러(1만4000원)짜리였다. 그는 생전 “돈은 매력적이지만 그 누구도 신발 두 켤레를 신을 수는 없다”는 말을 마음에 새겼다.
그는 평생 막대한 재산 중 200만 달러(27억원)만 남기고 기부하겠다는 약속을 지켰고, 5개 대륙에 80억 달러(10조8000억원) 이상을 기부했다. 대부분 익명 기부였다. 아동·청소년, 인구, 의료·건강, 교육, 과학·기술, 인권, 평화 등 그가 기부하지 않은 분야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다. 그가 27억 달러(3조6000억원)를 지원해 세워진 1000개 건물 중 그의 이름을 딴 건물은 하나도 없다고 한다. 2016년 12월 피니는 모교인 코넬 대학교에 700만 달러(94억원)를 기부하며 공식적으로 재단의 계좌를 모두 비웠고, 2020년 재단은 문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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