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18일 목요일

세상을 살맛나게 만드는 따뜻한 손길 - 기부 중독

 기부는 용기 있는 행동이다. 기부는 타인을 위하면서도 자신을 위한 행위이기도 하다

금전적으로 여유로워서가 아니라 도덕적 만족감으로 기부하는 것
자존감·행복감 높아지는 기부활동… 남뿐만 아닌 나 위한 일이기도해

중독, 하면 부정적인 이미지가 떠오른다. 어떤 물질이나 대상을 지나치게 탐닉하면서 자기 자신은 물론 주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고,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피폐해진 모습이 연상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이른바 좋은 중독이다.

기부는 대표적인 좋은 중독이다. 기부(donation, 寄附)란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선 또는 대의를 위해 재산 등을 내어주는 것을 가리킨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을 가엾이 여겨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나누는 것은 오직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윤리와 도덕이다. 기독교와 불교 등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기부와 봉사 같은 선행을 신자들의 덕목 혹은 의무로 강조하고 있다.

기부하면 자연스레 생각나는 인물이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인 미국의 빌 게이츠다. 그는 아내와 함께 재단을 설립해 2019년까지 약 350억 달러(한화 약 41조 7천억 원)를 기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기부금이 사용되는 영역은 공공도서관 고속통신망 개선, 대학생 장학금, 결핵과 소아마비 퇴치, 빈곤층을 위한 모바일 금융서비스 사업, 결핵과 말라리아 백신 개발 연구, 어린이 치료약품 연구비, 빈민 지역 교육환경 개선, 저소득층 장학 사업 등 전 세계 모든 분야에 걸쳐 있다. 지난해 지구촌을 강타한 코로나 퇴치를 위해 바이러스 검출과 치료 개선, 보호 백신 개발에 1억 달러(한화 약 1185억 원)를 기부하기도 했다.

우리나라 역시 근래 들어 기부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면서 기부 문화가 정착되고 있다.

한국인 중에 기부의 대명사로 불리는 인물이 있다. 가수 김장훈 씨다. 그는 지난 연말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해 기부와 관련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기부한 금액이 200억 원에 달한다고 했다. 전성기 때는 연 수입이 대략 80억 원 정도였는데, 이 중 광고 수입은 자신이 ‘기부 천사’로 알려지면서 들어온 거기 때문에 수입 전액을 기부했다고 한다. 유독 사람들에게 베푸는 걸 좋아하는 그는 명절에 매니저에게 만 원짜리를 신문지에 싸서 500만 원을 보너스로 건네주기도 했고, 스태프에게 국산차와 외제차 합쳐서 무려 열아홉 대나 선물로 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심성도 곱지만 통도 남달리 컸다.

“제가 이렇게 기부를 많이 하게 될 줄은 몰랐고, 큰 사명감도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다 보니 그냥 하게 된 거죠. 떼돈을 벌어서 어떤 복지 사각지대 중 한 곳이라도 해결됐으면 하는 꿈이 있어요. 기부나 봉사활동은 한 번 하면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아름다운 중독이죠.”

 

그에 못지않은 선행 부부가 있다. 가수 지누션 멤버였던 션과 배우 정혜영 씨 부부다. 이들은 현재 전 세계 400명이 넘는 어린이들을 후원하고 있다. 2남 2녀를 둔 부모인 이들이 지금까지 기부한 금액만 약 55억 원에 이른다고 한다. 연예계에서 대표적인 잉꼬부부로 알려진 두 사람은 국내 최초로 루게릭 요양병원 착공을 준비 중이라고 밝혔다. 2020년 세밑에도 가난한 노인들의 겨우살이를 위해 연탄 나르는 봉사를 하고 와 SNS에 소감을 올렸다.

“125번째 션과 함께하는 대한민국 온도 1도 올리기. 날씨가 추워져 연탄이 창고에 없으면 더욱 추위를 느끼실 어르신들을 위해 한걸음에 달려왔습니다. 가장 어려울 때가 더욱 열심히 돕고 나눌 때인 것 같습니다. 오늘은 30가구에 100장씩 3000장 지금 시작합니다.”

 

유명인이나 사업가들만 기부를 하는 건 아니다. 평범한 시민, 월급쟁이, 자영업자는 물론 자신의 생계조차 빠듯한 어려운 사람들도 자신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놓인 이들을 돕는다.

 

서울 관악구청 앞 삼거리에서 31년째 구두를 닦고 있는 강규홍 씨는 남몰래 선행을 이어온 기부 천사다. 1990년 봄에 파산한 뒤 30대 중반에 구두닦이를 시작한 그는 지금껏 한 평 남짓한 좁은 공간에서 부인과 함께 종일 구두를 닦는다. 그러면서도 관악구 내에서 구두닦이를 하는 동료들과 함께 관악녹지회를 만들어 꾸준히 봉사활동을 해오고 있다. 관악녹지회는 어려운 이웃을 돕기 위해 해마다 ‘사랑의 구두닦이’ 행사로 마련한 수익금을 사회단체에 기부해 왔다. 작년 11월에도 210만 원을 소년소녀가장, 무의탁 노인 등 어려운 이웃을 위해 사용해달라며 ‘희망온돌 따뜻한 겨울나기’ 성금으로 기부했다. 2020년 성금은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조금씩 모아 마련한 것이다. 코로나19로 ‘사랑의 구두닦이’ 행사를 못한 탓이다. 2020년 모금액 210만 원을 합치면 지금까지 총기부금은 1억 2770만 원에 달한다.

“예전에는 비 오는 날이면 손님이 없어 동료들끼리 술 먹고 고스톱 치면서 하루를 보냈죠. 그러다가 보람 있는 일을 해보자고 뜻을 모아 봉사활동을 시작했어요. 주위 어려운 가정에 연탄도 사서 날라주고, 전기밥솥이나 전기장판도 사줬죠. 어르신들에게 식당에서 음식도 대접해드립니다. 남을 돕고 살 수 있어 뿌듯합니다. 죽기 전까지는 봉사하며 살아야죠.”

 

폐지를 주워 한 푼 두 푼 모든 돈을 기부한 할머니도 있다. 서울 성북구 월곡동의 좁은 골목길에 사는 장선순 씨다. 25년째 이곳에 살고 있는 그녀는 저녁 7시만 되면 폐지를 줍기 위해 동네를 돌아다닌다. 자정 무렵까지 리어카를 끌고 다니며 버는 돈은 2000원 남짓이다. 2018년 여름 낮에 폐지를 줍다가 더위로 쓰러진 다음부터 해가 진 뒤에만 일을 나간다. 배운 것도 없고 몸도 성치 않은 할머니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폐지를 주워다 파는 게 전부였다. 그녀는 그렇게 모은 피 같은 돈을 자신보다 더 힘든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내놓았다. 그동안 월곡1동 주민센터에 기부한 금액은 2015년 7만2970원, 2016년 10만6260원, 2017년 8만2710원, 2018년 38만1180원으로 총 64만 원이 넘는다. 그녀는 1000원짜리 지폐와 동전만 가득 찬 봉투를 들고 가 기부했다. 많은 돈을 버는 사업가나 유명인이 기부한 수억, 수십억 원의 거액보다 더 의미 있고 가치 있는 눈물 나는 기부가 아닐 수 없다.

“TV에서 배고픔에 떠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가슴이 미어져서 기부를 결심하게 되었어요. 배고팠던 내 어린 시절과 자식들에게 못해 준 게 떠올랐죠. 하지만 내가 능력이 없어서 고작 이것밖에 못 버는 걸 어떡해요. 그래도 입고 먹는 것 아껴 번 돈인 만큼 내 10원은 남들 10억 원만큼의 가치라고 생각해요. 나는 최소한으로 먹고 입으면 돼요.”

‘기부’라는 긍정적 의미를 가진 말에 부정적 이미지를 내포한 ‘중독’이라는 말을 가져다 붙이는 게 이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좋은 말과 생각과 행동을 반복하다 보면 이게 습관이 되고 자연스럽게 일상적인 실천으로 이어져 중독 현상과 유사한 패턴을 나타내게 된다.

부정적 의미의 중독이 인간의 신체와 정신에 해악을 끼치는 질병이라면, 긍정적 의미의 중독은 인간의 마음과 정신에 유익을 끼치는 동시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선한 영향력을 전파하는 바람직한 탐닉과 몰입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런 조건이나 대가를 바라지 않고 조용히 그리고 꾸준히 타인을 돕고 섬기고 봉사함으로써 가장 큰 기쁨과 보람을 느끼는 것은 선행을 베푼 자기 자신이다. 실제로 미국 하버드대학과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의 연구원들이 2008년에 시행한 연구에 따르면 남들에게 돈을 쓰는 것이 전반적인 행복감의 상승으로 이어지며, 자신들이 끼치는 긍정적인 영향을 인식하면 할수록 행복감을 느끼는 정도는 더 상승한다는 결과가 나온 바 있다. 또한 미국과학진흥협회에서 발행하는 과학전문 저널 <사이언스(Science)>에 발표된 한 연구에 의하면 타인을 위한 행동에서 행복감을 느끼는 것은 보상처리와 관련한 뇌의 영역이 활성화되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고 한다.

 

물론 기부에 따른 사소한 부작용도 있다. 단순한 선행 수준을 넘어 기부자의 정신적 문제로 인해 필요 이상의 과도한 기부를 함으로써 남은 가족에게 피해를 끼치기도 한다. 가족의 동의 없이 전 재산을 기부해 버려 자신과 다른 가족의 생계가 어려워진다면 대단히 곤란한 일이다. 때로 기부 이후 소송이 벌어지기도 하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기부를 주관하는 기관이나 단체의 투명성과 정직성 문제도 심심찮게 도마 위에 오르곤 한다. 기부자의 의도에 맞게 기부금이 제대로 사용되었는지를 정확하게 감시하고 확인하는 일도 만만치가 않다.

그러나 이 모든 우려에도 불구하고, 기부는 점점 더 확산되고 확장되어야 하며 권장되어야 한다. 국가와 정부는 국가와 정부가 할 일이 있고, 민간은 민간이 할 일이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가는 인정과 베풂과 선행은 역사가 존속되는 한 끝없이 이어져야만 한다.

 

“자신이 이 세상에 살았음으로 해서 한 사람의 생명일지라도 보다 편안히 숨 쉬었음을 깨닫는 것 이것이 성공이다(to know even one life has breathed easier because you have lived. This is to have succeeded).”

19세기 미국의 사상가 겸 시인인 랠프 왈도 에머슨의 시 ‘성공이란 무엇인가?’의 마지막 구절이다. 1982년 미국 텍사스 주 달라스의 한 고등학교 졸업식에서 수석의 영예를 안은 여학생이 졸업 연설을 하던 중 이 시를 읊었다. 그 여학생이 바로 빌 게이츠의 부인 멜린다 게이츠다. 그녀는 빌 게이츠와 더불어 세계 최대의 자선단체인 ‘빌 앤 멜린다 게이츠 재단’을 이끌고 있다. 에머슨의 시처럼, 그의 시를 좌우명 삼아 타인을 위한 자선과 선행에 자신의 인생 목표를 설정한 멜린다 게이츠처럼, 인생의 성공이란 높은 자리에 오르고 많은 돈을 벌어 호의호식하며 사는 게 아니라 나로 인해 한 사람의 생명일지라도 보다 편안히 숨 쉬었음을 깨닫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기부 중독이란 기꺼이 빠져볼 만한 중독이 아닐까. 2021년 새해, 어렵고 힘든 시간이 계속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발적 기부 중독자들이 늘어난다면, 제 아무리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린다 해도 세상은 그런대로 살 만할 것이다.

(옮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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