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28일 토요일

나누고 싶은 이야기 ;**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

 

적응이란,

고집을 버리는
과정이라는 것.

시간이란,
여행을
떠날 수 있는
기회라는 것.

추억은 지혜의
보따리라는 것.

기적은
꽤나 가까이에
있다는 것.

고마움을
되새기면
외롭지 않다는 것.

이별은 또한
홀로서기라는 것.

줄 것은 항상
넘친다는 것.

최후까지
행사해야 할
권리가 있다는 것.

슬픔도
힘이 된다는 것.

절망조차
희망의 씨앗을
품고 있다는 것.

스스로를
조금 더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

~ 위지안 /
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 ~

14억 중국인을 울린 여인이 있다. 그녀의 이름 위지안. 서른 살이 채 되기도 전에 
중국 명문대 강단에 섰으며, 사랑하는 남편과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아들이 있었다.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이었지만, 유방암 말기 판정을 받고 그녀의 삶은 절정에서 나락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절망과 고통 속에서도 그녀는 보석 같은 삶의 이치를 깨닫고, 많은 사람들에게 ‘오늘 내가 살아갈 이유’를 전했다. 화내지 않고 떠날 수 있어서 감사하다는 그녀는 2011년 4월 19일 새벽 3시, 결국 눈을 감았다. 

노르웨이 오슬로대학에서 유학하던 시절. 그녀는 노르웨이의 숲에 푹 빠져 있었다.



위지안은 노르웨이 오슬로대학교에서 유학을 마친 후 환경학과 경제학을 접목해 중국 학계의 주목 받는 엘리트였다. 서른이 채 되기도 전에 세계 100대 명문대 안에 꼽히는 푸단대학교 강단에 섰고, 그녀가 제안한 프로젝트마다 줄줄이 국가의 승인이 떨어졌다. 곁에는 대학교수인 배우자와 건강한 아들이 있었다. 어릴 적부터 지는 것을 싫어하던 그녀는 그것이 공부든, 놀이든, 먹기든 항상 또래보다 월등했다. 늘 남들 이상으로 노력했고,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온갖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녀가 생각하는 성공의 법칙이란 결국 ‘치열함’이었다.

살아생전 그녀가 가장 사랑했던 남편과 아들.



운명의 변화를 감지했던 건 2009년 10월. 하루쯤 편하게 쉬어야겠다는 마음으로 일찌감치 집 근처 슈퍼를 향하던 그녀는 자전거 핸들을 트는 순간 격렬한 허리 통증을 느꼈다.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지만, 그녀는 자신의 몸 상태보다 강의며 프로젝트며 집필하던 책 원고 따위 등을 먼저 걱정하고 있었다. 그저 하루 20시간을 쏟아 부어도 모자랄 지경에 휠체어를 타고 이 병원 저 병원을 뛰어다녀야 하는 게 짜증스러웠을 터였다.

허리 근육이 손상됐다는 진단을 받고 찜질이나 물리치료를 받기 시작했지만 통증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급기야 유명한 마사지 전문가를 찾아 근육 스트레칭을 시작하기에 이르렀지만, 그것이 그녀의 죽음을 재촉하는 일이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훗날 알게 된 사실이지만 혈액순환제를 먹고 근육 스트레칭을 한 탓에 암세포가 훨씬 빠른 속도로 몸속 구석구석 전이되고 있었다.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통증이 계속되자 그녀는 남편과 함께 더 큰 병원을 찾았다. 그러나 복잡한 검사과정을 거쳐 알아낸 진실은 ‘유방암 말기’라는 절망적인 현실이었다. 극심한 통증으로 경련까지 일으켰던 그녀는 바늘 끝이 피부에 닿을 때마다 근육이 수축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인정하기 어려웠지만 그녀는 자신의 운명이 송두리째 바뀌었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했다. 앞날이 창창한 대학교수에서 앞날이 얼마 남지 않은 초라한 말기 암 환자로 전락해버렸다는 잔인한 현실을.


말기 암 환자로 산다는 것

병원생활은 충격의 연속이었다. 멀쩡해 보이던 남자가 몇 시간 뒤 사망하기도 했고, 겨우 임신에 성공한 여자가 말기 암과 씨름하다 아이를 낳고 세상을 등지기도 했다. 자신이 누워 있는 이곳이 얼마나 위태로운가를 생각하던 그녀는 유서를 써보려고도 했다. 그러나 남편이 신겨준 양말에 적힌 ‘不離不棄(불리불기, 헤어지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다)’라는 글자를 보자 마음속으로 준비했던 유서가 재가 되어 바람에 날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노르웨이 오슬로대학에서 유학하던 시절. 그녀는 노르웨이의 숲에 푹 빠져 있었다.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절대 포기하지 말 것. 그녀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단 하나의 절대명령을 내렸다. 좌절과 분노를 딛고 일어나 앞으로 남겨진 시간들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고민하던 그녀는 자신이 깨닫고 있는 모든 것들을 일상의 에피소드와 함께 인터넷에 연재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2010년 4월부터 매일 오전과 오후, 두 차례에 걸쳐 중국판 트위터 ‘웨이보’에 그녀의 글이 올라왔다. 삶과 죽음의 무게를 완전히 내려놓은 채 순수한 마음으로 써내려간 그녀의 글에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훔쳤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녀의 불행에 가장 마음을 다친 건 가족이었다. 그러나 식구들은 마치 그녀가 언제 말기 암에 걸렸느냐는 듯 평범하다 못해 명랑한 태도로 그녀를 대했다. 그건 아픈 딸, 아픈 아내를 위한 최고의 배려였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애틋함 앞에서 그녀는 힘을 얻기도, 마음을 내려놓기도 했다.

호텔 요리사였던 그녀의 아버지는 투병 중인 딸을 위해 매일 온갖 약재를 넣고 끓인 물을 배달했다. 신을 믿지 않으며,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한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았던 아버지는, 그러나 약재를 끓이기 전 간절하게 기도를 올렸다. 남편이 우연히 목격하지 않았더라면 절대로 알지 못했을 비밀이었다.

어린 시절 위지안은 누구보다도 씩씩하고 건강한 아이였다.

머리가 M자로 벗겨지기 시작해 ‘맥도널드’라는 애칭을 가진 그녀의 남편은 거동을 할 수 없는 아내의 엉덩이를 닦아주며 빌고 또 빌었다. 꼭 살아서 50년 동안 당신의 엉덩이를 닦아줄 수 있게 해달라고…. 자궁 방사선 치료를 망설이던 그녀에게 남편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기도 했다. “당신은 이미 엄마잖아. 욕심이 남아 있다면 이제는 사는 데에만 다 쏟아부어줘.” 그녀가 여성성을 잃고 싶지 않아 갈등하고 있을 때, 남편은 아내를 잃을까 봐 애를 태웠다.

남편은 아내의 병마 앞에서 대단히 헌신적이고, 또 열정적인 모습으로 바뀌어갔다. 그녀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남편에게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때마다 자신이 꽤 행복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괜한 비수를 꽂는 날도 있었다. 비수가 날아간 방향은 모든 딸들의 보루(堡壘), 어머니였다.

“애를 또 낳을 것도 아닌데, 유방이야 수술해도 상관없지 않겠니?”

어머니의 그 한마디가 결국 그녀의 신경을 건드리고야 말았다. 워커홀릭이었던 딸이 둘째를 낳아 키운다는 건 어머니의 상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첫째 아이도 건사하지 못해 시댁에 맡겼는데 둘째를 어떻게 낳느냐”는 어머니의 지적은 예리했지만, 뭔지 모를 분노가 폭발했다.

“엄마도 그랬잖아. 나를 외가에 맡겨놓고 일만 했잖아. 엄마는 자기밖에 모르잖아. 할머니 돌아가셨을 때도 곁에 없었으면서, 엄마가 나한테 나무랄 자격 있어?”

손톱을 잔뜩 세워 어머니를 사정없이 할퀴어버린 날, 그날 이후 그녀의 마음에는 응어리가 하나 더 생겼다. 하지만 늘 바쁘다는 핑계로 아픈 딸에게조차 얼굴을 자주 보여주지 않았던 어머니는 사실 나무를 심고 있었다. 숲에서 에너지를 구하겠다는 딸의 얘기에, 어머니는 그저 딸의 꿈이 숲을 가꾸고 나무를 심는 것이겠거니 하고 뜻있는 여성들을 규합해 나무 심기 운동에 나섰던 것이다. 어머니의 순박한 마음에 그녀는 또 한 번 코끝이 찡해졌다.


미안해, 아들

엄청난 고통이 따르는 검사를 받을 때도 울지 않았던 그녀가 눈물을 펑펑 쏟을 때가 있었다. 바로 아들을 떠올릴 때다. 학자로서의 성공을 위해 어린 아들을 시댁에 떼어놓고 나온 지 석 달 만에 그녀는 말기 암 판정을 받았다. 참 모진 운명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건대 아들은 임신 사실을 깨닫게 된 그 순간부터 그녀의 인생을 조금씩 바꾸어놓았다. 좋아하는 커피나 정상적인 근무는 포기해야 했지만, 아이가 배 속에서 배를 힘껏 걷어찰 때면 순간적으로 그녀의 온몸에 따뜻한 기운이 퍼졌다. 그렇게 아이는 엄마에게 여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또 생명을 잉태한다는 것이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알게 해주었다. 사랑을 준다는 것이 그처럼 행복하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해 하늘은 ‘잉태’라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여자들을 훈련시키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가 건강한 엄마로 아이를 품에 안은 시간은 다 합해봐야 고작 1년이 조금 넘는 정도다. 아들이 걸음마를 시작할 무렵, 그녀는 ‘성공한 여자’가 되기 위해 아이를 시댁에 맡겨둔 채 떠나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픈 여자’가 되어버렸다.

살아생전 그녀가 가장 사랑했던 남편과 아들.

자신에게 과연 엄마의 자격이 있기나 한 걸까 자책감이 밀려들었다. 19개월 된 아들이 아장아장 병실을 걸어들어 왔을 때, 그래서 그녀는 몸이 으스러질 각오를 하고 팔을 조금씩 벌려 아이를 불렀다. 가슴이 빠개지도록 아팠지만, 몸보다 마음이 천 배, 만 배는 더 아팠다.

그녀의 간절함 때문이었을까. 아들을 구하기 위한 필사적인 모정은 의학적으로 납득하기 힘든 기적을 빚어내기도 했다. 암으로 잠식된 뼈는 벌레 먹은 나무처럼 구멍이 숭숭 뚫려 있어, 작은 충격에도 치명적인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아들을 향해 과속으로 달려오는 자동차를 발견한 그녀는 반사적으로 뛰어나가 19㎏이나 되는 아이를 안아 올렸다. 걷기조차 버거웠던 상태였으니 기적으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러나 모두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2011년 4월 19일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삶의 모든 흔적을 곱씹고, 그 안에서 인생이 선물한 진정한 행복을 뽑아내 많은 사람들에게 선물한 그녀는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만일 나에게 허락된 생이 여기까지라면, 그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부모로부터, 남편으로부터 그리고 친구들로부터 인간이 받을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사랑을 받고 그것을 오롯이 껴안은 채 떠날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을 누렸으니까…. 좋은 삶이었고, 이 세상은 어지러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후회 없이, 화내지 않고 떠날 수 있어 참 좋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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