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5일 월요일

잔소리의 가치를 다시 생각하며

 


지적이 사라진 시대

요즘은 누구도 남을 쉽게 지적하지 않는다. 자칫 간섭으로 보일 수 있고, 꼰대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상대를 존중한다는 명분 아래 서로의 삶에 적당한 거리를 두려 한다. 그러나 문득 생각해 보면, 우리가 잃어버린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건전한 지적과 충고가 아닐까 싶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완성된 존재가 아니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타인과 어떤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지를 배워야 한다. 과거에는 그 역할을 부모와 가족, 이웃과 공동체가 맡았다. 때로는 잔소리로, 때로는 꾸중으로, 때로는 따뜻한 충고로 사람을 다듬어 갔다. 당시에는 귀에 거슬렸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 말들 속에 삶의 경험과 질서가 담겨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런데 오늘날은 상황이 달라졌다. 부모는 자녀의 인격 형성보다 성적과 경쟁력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학교는 인성보다 성취를 중시한다. 사회는 성장과 성공을 이야기하지만 성숙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적게 이야기한다. 덕분에 많은 것을 배웠지만 정작 자신을 돌아보는 훈련은 부족해진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특히 디지털 시대에는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분명 긍정적인 변화다. 하지만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능력만큼 다른 사람의 비판을 받아들이는 능력도 중요하다. 듣기 좋은 말만 듣다 보면 자신의 한계를 발견할 기회를 잃게 된다. 성장의 출발점은 칭찬이 아니라 부족함을 인정하는 데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돌이켜보면 인생에서 도움이 되었던 사람들은 늘 나를 칭찬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때로는 불편한 진실을 말해 주고, 내가 놓친 부분을 지적해 주고,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을 때 멈춰 세워 준 사람들이었다. 당시에는 서운했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는 그 말들이 오히려 고마움으로 남는다.

물론 모든 잔소리가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상대를 억누르거나 상처 주기 위한 말은 충고가 아니라 폭력에 가깝다. 그러나 진심 어린 지적은 다르다. 그것은 상대를 바꾸려는 욕심이 아니라 더 나은 방향을 바라보는 관심에서 비롯된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자유가 아니라 피드백일지도 모른다. 개성과 권리는 충분히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혼자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어렵다. 누군가의 조언과 지적이 있을 때 비로소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나이가 들수록 잔소리를 듣는 일은 줄어든다. 부모도 떠나고, 친구들도 굳이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노년으로 갈수록 오히려 자신을 돌아보는 일이 더욱 중요해진다. 젊은 시절에는 듣기 싫었던 잔소리가 사실은 나를 붙들어 주던 울타리였음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인생은 칭찬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때로는 불편한 말 한마디가 삶의 방향을 바꾸고, 따끔한 지적 하나가 사람을 성장시킨다. 그래서 지적과 잔소리의 진정한 가치는 상대를 불편하게 만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사람으로 살아가도록 돕는 데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알아서 잘하는 시대'일수록 우리에게는 나를 다듬어줄 타인의 시선과 거울이 필요하다. 부모의 따뜻한 잔소리든, 동료의 날카로운 피드백이든, 누군가 나에게 건네는 지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비로소 우리는 모난 구석을 깎아내고 모범적인 사회적 존재로 끊임없이 다듬어질 수 있다.

세상이 아무리 달라져도 사람답게 사는 데 필요한 기본까지 달라질 수는 없다.
시대는 변해도 예의와 책임, 배려와 양심은 여전히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마지막 기준이기 때문이다.

* 인정하긴 싫지만, 부정못할 우리민족의 슬픈 자화상

 




고난의 길을 걸어 온 우리 조상님들의 실상을 색다른 각도에서 조감해 보는 글입니다.

* "악랄했던 세계 노예 제도와 한반도 수난의 역사적 고찰"

1,800년대 말 콩고가 벨기에의 식민지였을 때 있었던 실화입니다.
벨기에 식민지 시작 전에 2천만 명이었던 콩고 인구가 식민지가 끝날 때 850만 명으로 줄었습니다.

전 인구의 60% 이상인 1,250만 명의 인구가 죽어야만 했던 이유는 벨기에 사람들이 양 손목을 잘라 버렸기 때문에 밥을 먹을 수가 없어 굶어 죽었습니다.

벨기에 사람들은 왜 그렇게 많은 콩고 사람들의 손목을 잘랐을까요?
콩고에서 고무가 많이 났는데 벨기에 사람들은 콩고 사람을 노예로 부리면서 나무에 흠집을 내고 고무 채취를 시켰습니다.

고무 채취량이 목표를 채우지 못하면 채찍으로 마구 때렸습니다. 채찍에 맞기 싫어서 콩고 사람들은 나무를 잘라서 목표했던 고무 채취량을 쉽게 늘렸습니다.

그런데, 고무 채취량이 늘어서 좋기는 한데 벨기에 사람 눈에 숲 속의 고무 나무가 마구 잘라 없어져 버려서 조만간 고무 채취량 이 대폭 쪼그라들것이 눈에 보였습니다. 그래서 고무 나무를 자르는 콩고인 들의 양 손목을 잘라 버리면서 그 아이들의 손목까지 다 잘랐습니다.

이 세상에서 식민지가 가장 많았기에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이 인도에서 목화를 재배하고 전 세계로 제일 많이 수출해서 어마어마한 돈을 벌었습 니다. 물론 인도 사람들을 노예로 부리며 목화를 재배했고, 방적기로 실을 짜고 베틀로 면제품을 만들었지요.

영국이 인도에서 철수 할 때 베를 짜던 기계는 다 부수고 인도 사람들의 양 손목을 다 잘랐습니다. 식민지 때 노예 생활하면서 영국인에게 배운 기술로 면제품 만들어 수출하고 돈을 버는 것을 막기 위해서 였지요.

그 당시에 실크와 양모 외 저렴하고 착용감이 좋은 천은 없었습니다.
면제품은 지금의 반도체처럼 최신기술이고 첨단 산업 이었습니다. 오죽했으면 문익점이 붓뚜껑에 목화씨를 숨겨 가져 왔겠습니까.

1,250만 명을 죽인 벨기에 보다는 너그럽지만 인도인 면직공의 양 손목을 자른 영국도 잔혹하기는 그지 없습니다.

식민지착취를 하려면 이 정도는 해야 착취라고 부를 수 있고, 식민지 사람들 학대 하고 잔인하게 죽이려면 이 정도는 해야겠지요. 식민지착취는 이렇게 하는 것이라고 벨기에와 영국이 보여줍니다.

일본은 조선에서 착취해 갈 것이 거의 없었습니다. 석유 한방울도 안 나고, 고무도 없고, 식량은 모자라서 굶어 죽는 조선인이 널려 있었습니다.
도박에 알콜 중독에 딸자식을 팔아 먹는 일은 다반사 였지요.

산이란 산의 나무는 다 패서 난방용 땔감과 밥 할 때의 불쏘시개로 사용했기 때문에 100여 년 전 사진에 조선의 산은 벌건 민둥산 이었습니다.

산에 나무가 없기에 비가 오면 나무 뿌리가 물을 머금지 못해 홍수가 나고, 산과 언덕의 황토가 하천에 쓸려 와서 강바닥이 높아졌습니다. 조금만 비가 와도 넘쳐서 홍수에 사망자가 발생하고 굶어 죽는 일은 다반사 였습니다.
큰 비가 와도 농사를 망쳐 굶어야 했고, 가뭄이 와도 굶어 죽었습니다.

치산치수는 간 곳 없고 오로지 농사지을 때 하늘만 바라보는 천수답에서 무식하고, 못난 조선인에게 가난과 굶주림은 피할 수 없는 생지옥 이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조선에 수 억 그루의 나무를 심은 것은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 이었습니다.

하수도 시설이 없어서 음식물 쓰레기는 담 밑에 구덩이를 파고 그냥 버렸기에 여름이 오면 파리가 들끓고 썩은 냄새가 온 마을에 퍼졌고, 태풍과 장마가 들면 썩은 음식물 국물이 우물로 흘러 들어 수인성 전염병이 창궐하여 떼죽음을 당하면서 죽었지만, 당시 미개한 한방에서는 치료약도 없었고 병들어 죽는 이유도 몰랐습니다.그냥 "역병이 돌았다"였습니다.

식민지 시대 이전에는 도로는 좁고 포장되어 있지 않았기에 비만 오면 뻘로 변해 짚신이 푹푹 빠졌지요.

대부분의 길이 좁아서 마차도 못다니니 가마가 유일한 운행수단이었지 않습니까? 가마는 바퀴가 없으니까 좁은 길도 가능 했지요. 조선시대 가마에 바퀴 달려 있는 모습 보셨나요?

착취를 통해 잘 먹어서 무거운 양반을 두 명 내지 네 명이 가마를 손으로 들고 실어날랐습니다.

바퀴가 있으면 편하게 끌고 다닐 수 있는 것을 알지만 도로는 도로가 아니었습 니다.
일제시대에 와서야 전국적으로 新作路가 생기기 시작했지요.
그 당시 중국과 일본엔 손수레에 바퀴를 달고 사람을 실어날랐습니다.
양반 6-10%, 중인 20%, 상놈과 노비가 70%의 인구 구성이었던 조선에는 일자 무식자가 전 인구의 70%를 넘었습니다.

훈민정음을 창시한 위대한 세종대왕은 어디로 갔나요? 1443년에 훈민정음을 창제 했지만 상놈과 노비에게 가르쳤던 적이 없기에 그들은 사용하지 못했습 니다. 양반가의 아녀자가 배운 정도였지요. 양반은 죽어도 천박한 언문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일본인은 이들을 포함한 모든 조선인에게 공교육을 도입해서 일본어 뿐아니라 한글을 보급했습니다. 일제시대 이전까지는 양반만 동네서당에 가서 한자를 배웠지 한글을 배우지는 않았습니다.
상놈과 노비는 서당 근처도 가 본 적이 없구요.

조선반도 전역에 국민학교를 만든 일본인들은 안 가겠다 는 조선인의 손목을 이끌고 국민학교에 입학시켜서 일본어와 한글, 산수 등을 가르쳤습니다.

일본인이 조선에 초등학교만 지었나요? 중고등학교와 대학도 세웠고 이들에게 영어와 과학도 가르쳤습 니다. 경성대학이 지금의 서울대이지요.

저수지를 만들고, 상하수도 를 건설했고, 철도를 놓고, 도로를 닦고, 다리를 놓고, 빌딩을 짓고, 병원을 짓고, 발전소를 짓고, 공장을 만들었습니다.

임진왜란 때에 민초 조선인 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본군에게 물도 떠주고 밥도 지어주며 적극 협력했습니다. 이씨 조선 왕족과 양반의 가렴주구에 진절머리를 냈던 상놈과 노비는 차라리 일본의 지배 가 더 낫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요. 그러니, 왜군에게 친절했던 조선인의 기록이 남아 있겠지요.
1910년 한일 합방이 되기 전 150년간 조선의 인구는 거의 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불과 35년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인구는 거의 두 배로 늘었습니다.

저수지와 상하수도의 보급, 치료해 주는 의료와 양반의 착취가 없었기에 질병을 예방ㆍ치료하며 저수지 물로 가뭄 걱정없이 농사지어 먹고 살 수 있었고, 아이 낳고 키우면 죽지도 않아 인구 증가는 폭발적이었습니다. 당연히 조선인의 평균 수명 이 늘어 났지요.

저절로 조선인 평균 수명이 늘어 난 것이 아니라 일본인이 의대를 설립하여 의사를 양성하고 조선인의 병을 고쳐주고 수명을 늘려 준 결과였습니다.

일본이 조선에 이렇게 투자 한 것은 나중에 식민지 에서 착취하기 위한 선 투자 라구요? 천만의 말씀 입니다. 조선을 식민지로서 가 아니라 중ㆍ러 대륙 으로 들어서기 위한 관문 으로서 우리와 합방 하여 우리를 일본에 편입시키려는 목적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천연자원을 수탈하려는 목적을 위해 식민지 삼고 철도를 건설했다고 보는 지엽적인 해석도 있으나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는 근시안적 관점 입니다.

일본이 조선에 35년여간 투자한 몇십억 달러의 자산가치에 비하면 수탈액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적으므로 식민지의 목적을 자원수탈로 볼 수가 없지요.

일본은 류큐왕국이었던 오키나와가 지금의 일본이 된 것처럼 조선인을 일본사람 수준으로 올리고 조선을 일본의 일부로 만들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은 태평양전쟁때 미국에 도전했다가 패망으로 항복하여 미국의 뜻에 따라 한일합방이 깨어져 우리가 빼앗긴 나라를 되찾아 독립할 수 있었습니다.
그 35년여의 기간 동안 우리가 나라와 주권을 잃은 자존심 손상만큼2 아이러니컬하게도 얻은 것도 많습니다.

세계 5대 부국이었던 일본과, 세계에서 가장 못 살았고 무식했던 조선과의 격차는 너무나 컸습니다. 

해방 이후에는 일본인이 남기고 간 공장·기업·토지·철도·전력시설 등이 귀속재산으로 미군정과 대한민국 정부에 넘어갔으며, 

이것이 한국 경제의 초기 산업 기반이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오늘날의 두산·한화·SK·신세계·LG·동국제강 등 

일부 대기업의 전신이 일본인이 운영하던 기업이나 시설에서 출발했다는 사례도 제시합니다.

또한 1965년 한일협정에서 일본으로부터 받은 무상 3억 달러와 차관 2억 달러가 이후 한국의 경제개발에 활용되었으며, 

일본이 남긴 산업시설과 기술 역시 한국 경제 발전의 한 기반이 되었다고 주장합니다.

 

글의 후반부에서는 미국의 역할도 강조합니다. 해방 이후 귀속재산 처리, 6·25전쟁 참전, 한미상호방위조약, 

경제·기술 원조 등을 통해 미국이 한국의 안보와 경제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합니다.

결론적으로 이 글은 일본의 식민지배를 무조건 미화하자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수탈과 탄압만 강조하지 말고 

조선의 내부적 문제와 일제강점기에 이루어진 근대적 변화, 해방 후 

미국과 일본이 남긴 경제적 유산까지 함께 살펴보자고 주장합니다.

 

즉, 글의 핵심 메시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역사는 한쪽 면만 보아서는 안 된다. 식민지배의 잘못은 분명히 기억하되, 당시 조선 사회의 내부적 문제와 

일본이 남긴 산업·사회기반시설, 그리고 해방 후 미국과 일본의 역할까지 종합적으로 살펴야 보다 

객관적인 역사 인식에 이를 수 있다.”

 

※ 다만 원문에는 콩고의 희생자 수, 영국이 인도인의 손목을 잘랐다는 주장, 일제의 산림·교육·인구 증가, 귀속재산 규모, 

조선인의 신분 구성, 한일병합에 대한 조선인의 태도 등 역사학계에서 사실관계나 해석에 

논쟁이 큰 내용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위 요약은 원문의 주장을 압축한 것이며, 그 내용 전체가 역사적 사실로 검증된 것은 아닙니다.

 

-한국근현대사연구회-

2026년 10월 4일 일요일

보고서에 따르면 2035년까지 매년 170만 개의 숙련 기술직 일자리가 생겨날 전망이지만, 전문가들은 누가 이 자리를 채울지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숙련 기술직에 대한 수요는 이미 높은 수준이며, 연구진은 향후 10년 동안 이 분야의 일자리가 꾸준히 증가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수요일 발표된 '미국 숙련 기술직 현황(State of America’s Skilled Trades)' 보고서에 따르면, 2035년까지 매년 170만 개의 숙련 기술직 일자리가 새로 생겨날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미국 국민의 경제적 기회 확대를 위해 활동하는 비영리 단체인 '잡스 포 더 퓨처(Jobs for the Future)'와 '버닝 글래스 연구소(The Burning Glass Institute)'가 이 보고서의 연구를 주도했습니다.


연구진은 2035년 말까지 숙련 기술 분야에서 60만 개 이상의 순수 신규 일자리가 창출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전기 기사, 배관공, 유지보수 작업자, 목수 등은 현재 인력난을 겪고 있는 대표적인 고수요 직종으로 꼽힙니다.


전국적인 인프라 수요는 숙련 기술직 일자리 창출을 이끄는 주요 요인입니다. 버닝 글래스 연구소의 맷 시겔먼(Matt Sigelman) 소장은 CNBC '메이크 잇(Make It)'과의 인터뷰에서 "AI 데이터 센터와 같은 대규모 인프라 프로젝트"와 신규 주택 단지 조성, 상업 시설 확충, 전력망 확장 등이 필요한 "성장 지역"이 해당 분야의 일자리 증가를 촉진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따라서 미국 노동통계국(BLS) 데이터에 따르면 2026년 9월 전체 실업률이 4.2%로 상승하고 비농업 부문 고용 증가 폭이 예상치를 밑돌았음에도 불구하고, 숙련 기술직 분야의 일자리 기회는 계속해서 늘어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시겔먼(Sigelman)은 순 일자리 창출 수치만으로는 은퇴하는 인력을 대체해야 할 필요성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지적합니다.


이 보고서에 포함된 124개 숙련 기술직 직종 종사자 중 4분의 1 가까이가 55세 이상인 반면, 25세 미만 근로자는 전체 인력의 11%에 불과합니다. 더 넓은 노동 시장을 살펴보면, 55세 이상 인구의 경제활동참가율은 2024년 이후 하락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시겔먼은 숙련 기술직 인력의 향후 변화를 언급하며 "앞으로 5년 안에 기술직 일자리 12개 중 1개는 새로운 인력으로 채워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업계가 신규 일자리 충원과 은퇴자 대체라는 이중고를 겪으며 고군분투하는 상황을 두고, 이러한 인력 확보 노력을 '제자리걸음'에 비유합니다.


수많은 기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숙련 기술직은 여전히 ​​부정적인 인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수요일에 발표된 애드 카운실 연구소(Ad Council Research Institute)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기술직에 종사할 경우 타인에게 존중받는다고 느낄 것이라고 답한 학생은 33%에 그친 반면, 의료 분야 종사에 대해서는 50%가 그렇다고 답했습니다.

이 온라인 설문조사는 2026년 6월부터 7월까지 고등학생 3,009명과 고등학생 학부모 2,501명을 대상으로 실시되었습니다. 표본오차는 학생의 경우 ±1.8%, 학부모의 경우 ±2%입니다.


애드 카운실(Ad Council)의 연구에 따르면 십 대들은 숙련 기술직에 대해 ‘적당한 수준의 존중’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나, 실제 데이터상으로는 졸업 후 진로로 기술직을 고려하는 비율이 9%에 불과했습니다. 반면 대학 진학(고등교육)을 고려하는 비율은 56%로 여전히 가장 선호되는 진로로 꼽혔습니다. 한편, 십 대의 71%는 기술 학교에 진학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길 것이라고 답했으며, 학부모의 81% 또한 자녀가 숙련 기술직을 선택한다면 자랑스러워할 것이라고 응답했습니다.

시겔먼(Sigelman)은 사람들이 흔히 숙련 기술직을 '뭉뚱그려' 이야기하는 탓에, 실제로 존재하는 124가지의 다양한 숙련 기술직 진로가 가려진다고 말합니다.


노동부의 '직업 고용 및 임금 통계 조회 시스템'의 최신 데이터에 따르면, 일부 숙련 기술직은 최근 대학 졸업자의 평균 초임인 56,153달러보다 낮은 급여를 받기도 하지만, 많은 직종은 이 평균을 상회하는 급여를 지급합니다. 높은 급여를 받는 직종의 경우, 엘리베이터 및 에스컬레이터 설치·수리 기사의 연간 중위 임금은 109,910달러에 달합니다. 원자력 발전소 운전원 또한 연간 중위 임금이 122,890달러로 10만 달러가 넘는 고소득을 올립니다.


시겔먼은 "애드 카운실(Ad Council)의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사람들이 숙련 기술직을 점점 더 잘 인식하고 존중하고는 있지만, 실제 진입으로 이어지는 과정에는 간극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자녀나 자기 자신이 숙련 기술직에 종사하는 모습을 상상하지 못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청년 근로자들이 숙련 기술직에 뛰어들기로 결정하더라도, 해당 산업은 고등교육 프로그램이나 정식 도제 훈련 과정을 거쳐 실제 취업으로 이어지는 비율이 낮다는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숙련 기술직 현황(State of Skilled Trades)' 보고서에 따르면, 이러한 경로를 통해 경력을 시작한 사람 중 절반에 못 미치는 인원만이 해당 과정을 수료합니다. 도제 훈련이나 고등교육 과정을 수료한 후 5년이 지난 시점까지 해당 분야에 종사하는 비율은 각각 29%와 34%로 떨어집니다.

숙련 기술직 현황 보고서에 따르면, 이직률은 종종 더 큰 구조적 문제의 징후이며, 그중 일부는 기술직이라는 직종 자체에 내재된 문제입니다. 목수의 경우, 공사 지연이나 악천후로 인해 견습생들이 교육 과정을 이수하는 데 필요한 근무 시간이 줄어들어 일부 견습생들이 그만두게 됩니다. 예를 들어, 배관공 지망생들은 한 주 안에서도 지역별로 다른 다양한 면허 요건에 직면하여 주 경계는 물론 카운티 경계를 넘어 일하기가 더욱 어려워집니다.


시겔만은 "이 직종은 마치 새는 파이프와 같습니다. 더 많은 관심을 유도하기 전에, 이 분야에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을 어떻게 더 잘 붙잡을 수 있을지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신의 이름으로": 예멘 지도자, 이란의 지원을 받는 후티 반군을 상대로 총공세 명령

 사우디아라비아와 예멘 정부군은 이란의 지원을 받는 후티 반군을 상대로 대규모 공세를 준비해 왔습니다. 후티 반군은 최근 예멘 서부 해안을 따라 세력을 확장하며 해안 지역에 대한 장악력을 높였고, 핵심 해상 요충지인 바브엘만데브 해협의 통행을 위협해 왔습니다. 블룸버그는 현재 해당 작전이 개시되었다고 보도했습니다.


이 매체에 따르면, 예멘 대통령 지도위원회(Presidential Leadership Council)의 라샤드 알 알리미(Rashad Al-Alimi) 위원장은 일요일 모든 군 병력에 실전 작전 돌입을 명령했습니다.


알 알리미 위원장은 일요일 "임무가 완수되고 승리를 거둘 때까지, 지금 이 순간부터 모든 국가 군사·안보·민간 기관은 총동원되어 최고 경계 태세를 유지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그는 이번 작전이 "테러 집단인 후티 반군의 손아귀에서 국가를 해방시킬 때까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باسم الله، وباسم الشعب، وبناءً على قرارات مجلس الدفاع الوطني، نعلن اليوم بدء العمليات العسكرية لاستعادة ما تبقى من أراضي الجمهورية، وبسط سلطة الدولة ومؤسساتها على كامل التراب الوطني. pic.twitter.com/yaKsnSDpbK

— د/ رشاد محمد العليمي (@PresidentRashad) October 4, 2026

지난 토요일 보도에 따르면, 이번 공세를 위해 10만 명 이상의 예멘 친정부군이 동원될 예정이었습니다. 지난달 후티 반군이 손쉽고 빠르게 세력을 확장한 것은 예멘 내 사우디 주도 연합군에게 굴욕적인 일이었습니다.


후티 반군은 이란을 상대로 한 미국과 이스라엘의 전쟁에는 대체로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한여름 무렵, 이들은 예멘에 대한 '포위'에 대응한다는 명분으로 핵심 해상 요충지에서 사우디 선박에 대한 봉쇄를 선언했습니다. 그 이후로 이들은 사우디 왕국을 상대로 석유 시설을 포함한 공격을 거듭해 왔습니다.


토요일, X(구 트위터)를 통해 확산된 다수의 보도와 영상에는 사우디 아람코의 리야드 정유 시설에서 연기로 추정되는 것이 피어오르는 모습이 담겼습니다.


로이터 통신은 금요일, 사우디아라비아의 공군력이 예멘 지상군을 지원할 것이라고 보도했습니다. 해당 보도에서 작전에 투입된 구체적인 기종은 언급되지 않았으나, 사우디는 미국산 F-15를 비롯해 유로파이터 타이푼, 토네이도 공격기 등을 운용하고 있습니다.


바브엘만데브 해협 외에도, 골드만삭스의 최신 데이터에 따르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는 원유 물동량이 전쟁 이전 수준으로 회복된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해당 지역 내 테헤란(이란)의 영향력이 빠르게 약화되었음을 시사합니다.

투자의 지혜, 삶의 지혜



 모르는 것 앞에서 겸손하기, 아는 것 앞에서 꾸준하기

살다 보면 누구나 "내일을 미리 알 수만 있다면" 하고 생각해 봅니다. 투자의 세계에서는 그 마음이 더욱 간절합니다. 어떤 종목이 오를지, 어떤 펀드 매니저가 앞서갈지 알 수 있다면 얼마나 마음이 편할까요.

그런데 오랜 세월 시장을 지켜본 이들의 이야기는 한결같습니다. 그것만큼은 아무도 알 수 없다는 것입니다. 전문가도, 이름난 운용사도 예외가 아닙니다. 시장은 사람들의 기대와 불안, 세상의 크고 작은 사건이 얽혀 움직이기에, 지나고 나면 그럴듯한 설명이 붙어도 앞날은 번번이 우리의 예상을 비켜 갑니다.

그래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예측이 틀리는 일이 아니라,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잊는 일입니다. "이번만큼은 확실하다"는 믿음으로 큰돈을 한곳에 걸었다가 마음까지 다치는 분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적지 않게 봐 왔습니다.

그렇다고 낙담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 손에 쥐어진 것도 분명히 있으니까요. 내가 내는 수수료는 얼마인지, 세금은 어떻게 나가는지, 한 바구니에 몰아 담지는 않았는지, 이 돈이 언제 필요한지, 시장이 흔들릴 때 내 마음이 얼마나 버텨 줄지. 이런 것들은 차분히 살피고 다듬을 수 있습니다. 시장은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아도, 내 선택은 내가 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좋은 투자란 어쩌면 화려한 한 방이 아니라, 새는 곳을 하나씩 막아 가는 조용한 살림에 가깝습니다. 큰 수익을 장담할 수는 없지만, 큰 후회를 피할 가능성은 분명히 높아집니다.

삶도 그렇지 않을까요. 내일 일은 하늘에 맡기고, 오늘 할 수 있는 일을 성실히 해 나가는 것. 모르는 것 앞에서는 겸손하게, 아는 것 앞에서는 꾸준하게 사는 것. 투자의 지혜는 결국 삶의 지혜와 같은 곳에서 만납니다.

투자의 지혜는 삶의 지혜와 같은 곳에서 만납니다

투자에서 배우는 이치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살아오며 몸으로 익힌 이치와 놀라울 만큼 닮아 있습니다.

첫째,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인정하는 일입니다.
시장의 앞날을 맞힐 수 없듯, 우리 삶의 앞날도 누구 하나 장담할 수 없습니다. 건강이 어떻게 될지,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한 가지 전망에 모든 것을 걸지 않고, 여러 가능성에 마음의 여유를 두고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투자에서 분산이 안전을 만들듯, 삶에서도 한곳에만 기대지 않는 것이 나를 지켜 줍니다.

둘째, 내가 다스릴 수 있는 것에 정성을 들이는 일입니다.
시장의 오르내림은 내 몫이 아니지만, 수수료를 살피고 지출을 다듬는 일은 내 몫입니다.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의 평가나 세상의 흐름은 내 뜻대로 되지 않아도,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누구에게 어떤 말을 건넬지는 내가 정할 수 있습니다.

셋째, 서두르지 않고 오래 가는 일입니다.
투자에서 가장 큰 힘은 시간입니다. 조금씩, 꾸준히, 오래 두는 것이 한 번의 승부보다 낫습니다. 삶에서도 화려한 성공보다 매일의 성실이 결국 사람을 단단하게 만듭니다. 흔들리는 날에도 제 자리를 지키는 마음이 가장 큰 자산입니다.

넷째, 욕심과 두려움 사이에서 중심을 잡는 일입니다.
시장이 오르면 더 욕심이 나고, 내리면 두려워 팔고 싶어지는 것이 사람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 흔들리지 않는 것이 가장 어려우면서도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인생의 크고 작은 고비에서도 조급함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숨을 고르는 사람이 멀리 갑니다.

결국 투자란 돈을 다루는 기술이기 이전에, 불확실한 세상을 살아가는 태도를 닦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모르는 것 앞에서는 겸손하고, 아는 것 앞에서는 꾸준하며, 흔들리는 순간에는 중심을 지키는 것. 이것이 돈에도, 삶에도 똑같이 통하는 지혜입니다.

조용한 삶, 아름다운 삶

 


오늘 하루를 조용히 감사하며 사는 일

이 나이에 삶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과거를 품고, 내일을 맡기고, 오늘을 겸손히 사는 태도다

조용한 삶이란 과거를 무시하지 않고, 미래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오늘을 자랑하지 않는 삶입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삶이란 시간 앞에 겸손할 줄 아는 삶입니다. 여든 해를 넘게 살아온 지금, 이 두 문장은 먼 이상이 아니라 날마다 마주하는 현실입니다.

이 나이가 되면 지난 세월이 자주 떠오릅니다. 낯선 땅에서 일가를 이루느라 애쓴 날들, 이루어 낸 일과 이루지 못한 일, 돌아가신 부모님과 먼저 떠난 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함께 찾아옵니다. 그것을 지우려 하지 않고 "그때는 그것이 최선이었다"고 받아들일 때, 과거는 무거운 짐이 아니라 오늘을 받쳐 주는 뿌리가 됩니다.

미래에 대한 걱정도 없을 수 없습니다. 건강이 어떨지,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지 생각하면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그러나 걱정으로 오늘을 미리 써 버리면 정작 주어진 하루를 놓치게 됩니다. 할 수 있는 정리와 준비는 차분히 해 두고, 나머지는 내려놓는 것이 지혜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식사하고, 가족과 안부를 나누고, 배우자와 함께 걷거나 공을 치는 하루가 이어진다면 그것만으로도 큰 복입니다.

또한 이 나이에는 지난 성취를 내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직업과 지위는 이미 지나간 이야기이고, 이제는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느냐가 남습니다. 말을 앞세우기보다 들어주고, 가르치기보다 곁에 있어 주는 사람, 굳이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 조용하고 깊은 존재감을 가집니다.

결국 시간 앞에 겸손하다는 것은 흐르는 세월을 이기려 하지 않고 함께 걸어가는 것입니다. 과거에 감사하고, 미래를 맡기고, 오늘을 담담히 살아가며, 떠난 뒤에도 가족의 마음에 따뜻한 기억 하나를 남기는 삶. 그런 삶이야말로 인생의 후반부에 만날 수 있는 가장 기품 있고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2026년 10월 3일 토요일

코스모스처럼, 가을의 자리에서

가을꽃 하면 가장 생각나는 꽃. 코스모스가 아닐까요?

하늘하늘 춤추듯이 흔들거리는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핀 꽃길을 걸으면 가을의 낭만이 느껴집니다. 코스모스는 홀로 피는 것보다 무리 지어 피어있을 때 더 예쁩니다.





가을 길목에 코스모스가 피었습니다. 장미처럼 향기가 진하지도 않고 국화처럼 기품을 뽐내지도 않습니다. 가는 줄기에 얇은 꽃잎 여덟 장을 달고 바람에 흔들릴 뿐인데, 그 모습에 자꾸 걸음이 멈춥니다.

미국 땅에 발을 디딘 지 어느덧 55년이 되었습니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말도 낯설고 길도 낯설었습니다. 고국의 가을 길가에 흐드러지던 코스모스가 문득문득 그리웠지만, 그리움을 오래 붙들고 있을 여유가 없었습니다. 자리를 잡아야 했고, 가족을 지켜야 했고, 맡은 일을 해내야 했습니다. 약을 다루는 일을 하며 하루하루 성실하게 쌓아 온 세월이었습니다. 앞만 보고 달리느라 길가의 꽃을 볼 겨를이 없었지요.

그런데 그 시절이 지나고 돌아보니, 나는 낯선 땅에서 내내 코스모스처럼 살아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비옥하지 않은 땅에 떨어져도 환경을 탓하지 않고 뿌리를 내리는 꽃입니다. 이민 생활은 크고 작은 바람의 연속이었습니다. 버티려 애쓸 때보다 힘을 빼고 몸을 맡겼을 때 다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흔들리지 않게 되는 일이 아니라, 흔들려도 괜찮은 법을 배우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코스모스는 한 송이만 보면 소박하지만 들판에 무리 지어 피면 가을 풍경 전체가 됩니다. 제 삶도 그랬습니다. 혼자 이룬 것은 없었습니다. 곁에서 함께 흔들려 준 아내가 있었고,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아이들도 제 몫의 꽃을 피웠고, 손주들까지 모두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으니 그보다 더 큰 자랑이 없습니다. 요즘은 아내와 나란히 골프장을 걸으며 지나온 이야기를 나눕니다. 같은 세월을 같은 자리에서 건너온 사람과 함께 걷는 아침만큼 귀한 시간이 또 있을까 싶습니다.

꽃이 지면 코스모스는 미련 없이 씨앗을 떨굽니다. 붙들고 있으려 하지 않고 다음 계절에 맡깁니다. 우리가 남길 것도 그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재물이나 이름보다, 우리가 살아온 모습 그대로가 자식과 손주들의 마음에 떨어져 이듬해 작은 꽃으로 피어나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가을 하늘 아래 흔들리는 코스모스를 바라봅니다. 봄꽃처럼 서두르지 않고 늦게 피었지만, 늦었기에 더 맑고 고요합니다. 저도 이 가을의 자리에서 아내와 함께 조용히 흔들리며, 감사한 마음으로 남은 계절을 피워 가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