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세의 문턱에서
가을이 문턱을 넘어 들어오면, 계절이 바뀐다는 생각보다 먼저 내 삶의 계절을 헤아리게 된다. 젊을 때는 시간이 앞으로 펼쳐진 길처럼 보였다. 해야 할 일도 많고 가야 할 곳도 많아서 시간은 늘 모자랐지만, 끝이 보이지는 않았다. 어느 나이를 넘기고 나니 시간은 길이 아니라 수량이 되었다. 얼마나 남았는지는 알 수 없어도, 무한하지 않다는 사실만은 분명해졌다.
올해로 여든다섯의 문턱에 서 있다. 창밖의 나뭇잎이 물드는 것을 보면 내 인생도 어느덧 늦가을에 닿았구나 싶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쓸쓸함만 있는 것은 아니다. 봄의 꽃은 화려했고 여름의 숲은 무성했지만, 그때는 바빠서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가을 나뭇잎은 가장 마지막에 가장 고운 빛을 낸다. 떨어질 때가 가까워서 더 선명한 것인지도 모른다.
미국에 와서 산 세월이 어느새 55년이다. 약국에서 일하던 시절에는 하루가 분 단위로 쪼개져 흘러갔고, 쉬는 날에도 마음은 다음 일을 향해 있었다. 그때는 시간을 벌고 쓰는 것이 일이었다. 지금은 아침에 차 한 잔을 마시고, 아내와 함께 골프장에 나가 천천히 걷는다. 점수는 예전만 못해도 괜찮다. 같은 나이의 아내와 나란히 걸을 수 있다는 것이 그날의 가장 큰 성적이다.
달력을 넘길 때마다 한 해가 시작되었다기보다 한 해가 지나갔다고 느낀다. 봄꽃이 피면 또 한 번의 봄을 맞이한 것이 아니라, 다시 오지 않을 봄 하나를 사용한 것이다. 그래서 요즈음 내게 시간은 귀하다. 비싼 시계가 있어서가 아니라 남은 양이 적기 때문이다.
젊은 날에는 사람을 얻기 위해 시간을 썼다. 나이가 들면서는 사람을 잃지 않기 위해 시간을 쓴다. 안부 전화 한 통, 함께 먹는 밥 한 끼가 예전보다 훨씬 무겁게 느껴진다. 그리고 이제는 무엇을 더 가질 것인가보다 무엇을 내려놓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오래 붙들고 있던 서운함, 끝내 이기고 싶었던 다툼, 이루지 못한 계획들이 가을 잎처럼 하나씩 손에서 풀려 나간다. 놓고 나면 의외로 가볍다. 나무가 잎을 떨구는 것은 잃는 일이 아니라 겨울을 건너기 위한 준비라는 것을 이제야 알겠다.
남은 시간이 길지 않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하지만 그 사실이 삶을 선명하게 만든다. 중요하지 않은 일에 마음을 쏟을 이유가 없고, 사소한 일로 마음을 상할 이유도 없다. 언젠가 끝난다는 사실이 오히려 오늘 하루를 또렷하게 비춰 준다. 가을이 되어서야 삶의 의미가 새로워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듯하다.
그래서 지금 내게 남은 시간은 미래를 위한 저축이 아니다. 매일 조금씩 꺼내 쓰는 마지막 예금과 같다. 현명하게 늙는다는 것은 이 예금을 아끼는 일이 아니라 잘 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루를 채우려 하지 않고 하루를 음미하려 한다. 아침 햇살이 드는 창가, 낙엽 위를 걷는 발소리, 아내가 건네는 가십(gossip) 같은 것들을.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다만 이제는 안다. 인생은 길어서 소중한 것이 아니라 끝이 있기 때문에 소중하다는 것을. 그래서 오늘도 조용히 하루를 살아낸다. 남은 시간을 헤아리기보다, 그 시간 속에 나 자신을 가만히 놓아두면서. 늦가을 햇살이 그렇게 고요히 마당에 머물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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