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19일 월요일

패기 하나로 건넌 55년

 


하와이에서 필라델피아까지, 한 이민자의 회고

프롤로그 — 거울 속의 나

아침에 거울을 보다가 문득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다. 마음은 아직 젊은 날에 머물러 있는 것 같은데, 거울 속에는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이 서 있다. 내가 기억하는 나와 지금의 내 모습 사이에는 긴 세월이 놓여 있다.

처음에는 그 차이가 서운했다. 그러나 55년의 미국 생활을 돌아보니, 거울 속의 노인은 낯선 사람이 아니었다. 젊은 날의 내가 수많은 날을 견디고 살아온 모습이었다.

그 세월을 처음부터 되짚어 보고 싶다.

1장 — 패기 하나만 들고

젊은 날, 내 손에 쥔 것은 많지 않았다. 넉넉한 돈도, 앞날을 보장하는 계획도 없었다. 가진 것이라곤 젊음과 패기뿐이었다. 나는 그 패기를 믿고 가족의 손을 잡은 채 낯선 미국 땅으로 건너왔다.

하와이에 처음 발을 디디던 날의 햇살이 아직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낯선 하늘과 공기, 익숙하지 않은 말들 사이에서 가족과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 부딪쳐 보기로 했다.

하와이는 내 긴 이민 생활의 첫 정거장이었다.

2장 — 롱비치에서 배운 미국 생활

하와이를 거쳐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롱비치의 한 제약회사에 들어갔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여러 분야를 거치며 일을 배웠고, 그곳에서 미국 사회의 일하는 방식과 직장 생활을 익혔다.

그러나 내 삶은 한곳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다음 목적지는 동부였다. 지금처럼 내비게이션이 있던 시절이 아니었다. 종이 지도를 펼쳐 놓고 길을 확인하며 열흘 동안 자동차로 대륙을 횡단했다. 시카고를 거쳐 뉴저지에 잠시 머문 뒤 뉴욕에 도착했다.

지금 생각하면 무모할 만큼 먼 길이었다. 그러나 젊었기에 가능했고, 앞날을 향한 기대가 있었기에 떠날 수 있었다.

3장 — 뉴욕에서 보낸 공부의 시간

뉴욕에서는 큰 병원의 약사 인턴 자리를 얻었다. 롱비치 제약회사에서 일하며 쌓은 경험이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직장을 얻었다고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부족한 공부를 더 해야 했다. 주말이면 대학 강의를 들으러 다녔고, 강의 내용을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 두었다가 반복해서 들었다. 알아듣지 못한 부분은 테이프를 되감아 다시 들었다.

그렇게 바쁘게 지내느라 뉴욕에 살면서도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전망대에 한 번 올라가 보지 못했다.

젊은 시절에는 그것이 아쉬울 수도 있었겠다. 그러나 지금은 별로 후회하지 않는다. 남들이 뉴욕의 풍경을 즐기는 동안 나는 내 앞에 놓인 공부와 일을 감당하고 있었다.

그때는 몰랐다. 그렇게 되풀이한 공부와 노력이 훗날 내 삶의 밑천이 되리라는 것을.

4장 — 동양인이 드물던 작은 도시에서

펜실베이니아에서 약사 시험을 볼 기회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도전했다. 1차 필기시험에 합격했고, 2차 실기시험까지 통과해 마침내 약사 면허를 손에 쥐었다.

나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물론 노력도 했지만, 기회가 주어지고 그 기회를 붙잡을 수 있었던 것은 감사한 일이었다.

첫 직장은 오하이오주 영스타운과 가까운 뉴캐슬의 한 가톨릭 병원이었다. 당시 그곳에서는 동양인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말도 문화도 익숙하지 않은 사회에서 자리 잡는 일이 어찌 쉽기만 했겠는가.

그래도 맡은 일을 하나씩 해 나갔다. 낯선 곳에서 사람들의 신뢰를 얻는 데 특별한 비결은 없었다.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해내는 것, 결국 그것이 가장 확실한 길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약사로서의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5장 — 필라델피아에서 이어진 직업 인생

이후 필라델피아로 옮겨 유펜 아동병원에서 일했다. 앞선 의료 환경 속에서 새로운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그다음에는 개인 약국에서 환자들을 가까이 만났고, 마지막으로 유나이티드헬스에서 근무한 뒤 은퇴했다.

돌이켜보면 제약회사에서 시작한 내 직업 생활은 병원과 약국을 거쳐 여러 분야로 이어졌다. 처음부터 이런 경력을 계획했던 것은 아니다. 그때그때 주어진 기회를 따라갔고, 새로운 일을 배우며 다음 자리로 나아갔다.

내가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내 능력에 비해 과분한 경험과 기회를 얻었다."

그것은 단순한 겸손의 말이 아니다. 지나온 길을 돌아보면 내 힘만으로 이루었다고 말하기 어려운 일이 많기 때문이다. 기회를 준 사람들, 함께 일한 동료들, 나를 믿어 준 사람들이 있었다. 내가 노력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 노력만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다.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많은 사람의 도움과 운이 함께했다는 사실을 나이가 들어서야 더 깊이 깨닫는다.

에필로그 — 황혼에 돌아보는 55년

하와이의 햇살에서 시작해 필라델피아의 황혼에 이르기까지, 55년의 세월이 흘렀다.

하루하루를 살아갈 때는 길고 힘들었다. 낯선 환경에 적응해야 했고, 일해야 했으며, 공부도 해야 했다. 앞날을 걱정하면서도 가족을 위해 한 걸음씩 나아가야 했다.

그런데 지나고 나니 그 긴 세월이 한순간처럼 느껴진다.

그렇다고 허무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 세월 속에서 만난 사람들, 함께 나눈 시간들, 직장에서 배운 것들, 그리고 가족과 함께 일구어 온 삶이 남아 있다. 내가 지나온 시간이 헛되지 않았다고 느끼는 이유다.

젊은 날의 패기는 사라진 것이 아니다. 낯선 땅을 향해 떠나게 했던 용기가 이제는 달라진 몸과 환경을 받아들이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힘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이제는 더 높이 올라가거나 더 많은 것을 이루어야 한다는 조급함도 예전 같지 않다. 지나온 삶을 돌아보고, 내게 주어진 시간을 무리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침마다 거울 속의 노인을 바라본다. 한때는 낯설고 서운했던 얼굴이다. 이제는 그 얼굴에 지나온 세월의 흔적이 보인다. 젊은 날의 패기와 수고, 가족을 위해 애썼던 시간과 미처 이루지 못한 일들까지 그 얼굴 안에 들어 있다.

그 앞에서 조용히 한마디 건네고 싶다.

"수고했네. 패기 하나로 참 멀리도 왔구먼."

55년의 삶을 돌아보니, 내가 대단한 사람이어서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라 그저 주어진 날들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왔기에 오늘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 남은 날들은 지나온 세월을 증명하려 애쓰기보다, 그 세월을 받아들이며 담담하게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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