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0월 1일 목요일

10월, 결실과 세월 사이



 미국에 건너와 산 지도 어느덧 오십오 년이다. 낯선 땅에서 약학 일로 한평생을 보내며 숱한 계절을 지나왔지만, 나이를 먹을수록 시월만큼 마음을 붙잡는 달이 없다. 이제 여든다섯이 되어 맞는 가을은 젊은 날의 가을과 결이 다르다.

시월은 땀 흘린 대가를 거두는 달이라 한다. 돌아보면 내 삶도 그렇게 거둔 것이 있다. 자식들은 저마다 가정을 이루어 성실히 살아가고, 손주들은 대학을 마치고 제 몫을 해 나가고 있다. 큰 부를 쌓은 것은 아니어도, 이만하면 한 해 농사를 잘 지었다 싶어 마음이 넉넉해진다. 씨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을 나는 일에서도 삶에서도 믿어 왔다.

요즘 나의 하루는 단출하다. 아내와 일주일에 두세 번 골프장에 나간다. 같은 세월을 함께 늙어 온 사람과 선선한 가을 아침에 필드를 걷는 일은 큰 복이다. 공이 어디로 가든 크게 다툴 일이 없고, 두 다리로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고맙다. 아침에 커피 한 잔에 조용히 하루를 시작하는 소소한 즐거움도 내 몫의 가을이다.

그러나 시월은 내게 그리움의 달이기도 하다. 열흘이면 어머니의 기일이 돌아온다. 어머니를 떠나보낸 지 어느새 오십일 년이 흘렀다. 그 세월 동안 나는 이국땅에서 바쁘게 살았고, 어머니는 늘 가을 낙엽처럼 조용히 마음에 내려앉아 계셨다. 아버님이 가신 지도 삼십일 년이다. 살아 계실 때 살갑게 따뜻한 말 한마디 더 건네지 못한 것이 이제야 마음에 남는다. 장남이라는 자리가 무뚝뚝함을 핑계 삼게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요즘은 가까운 사람에게 감사와 칭찬을 아끼지 않으려 한다. 표현하지 않은 마음은 끝내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뒤늦게 배웠다.

낙엽 따라 가버린 세월.

돌아보면 아쉬움이 없지 않다. 그러나 나는 세월에 쫓기지 말고 동행하자고 마음먹었다. 나이 드는 일을 거스르지 않고, 몸과 마음의 속도에 맞는 작은 일과와 작은 인연과 작은 기쁨을 꾸준히 지켜 가는 것이 노년의 품위라고 생각한다. 노년은 거창한 완성이 아니라 조용한 유지다. 그 유지가 흔들리지 않는 한 사람은 쉬이 무너지지 않는다.

오늘은 어제 세상을 떠난 이들이 그토록 살고 싶어 했던 바로 그날이다. 어제는 추억으로 간직하고, 내일은 기대하되, 오늘을 온전히 사랑하려 한다. 훗날 많은 사람을 남기기보다 좋은 사람을 남기고, 나 자신도 좋은 사람이 되어 떠나는 것이 소원이다.

떨어진 잎이 흙으로 돌아가 이듬해의 거름이 되듯, 내가 살아온 시간도 자식과 손주들 안에서 다시 싹을 틔울 것이다. 올가을도 그렇게 익어 간다. 나도 함께 익어 간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