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8일 토요일

80세의 벽을 어떻게 넘을까?

 우정(禹晶)의 일상의 단상

80세의 벽을 어떻게 넘을까?



힘들고 외롭지만 인생 80대의 강을 잘 건너야 한다.

초겨울 날 나비가 마지막 남은 꽃 한 송이 위에서 혼자 꿀을 낚는다. 친구도 없이 저 혼자 남은 꽃을 따라 힘차게 날개짓을 한다. 마치 아무 걱정도 없다는 듯이 흘러가는 세월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또 한편에서는 꽃들이 부드럽게 피었다가 여기저기서 떨어지고 있다. 이런 모습들이 노년기인 나에게는 생존의 강렬한 상징으로 다가온다. 정원의 꽃들이 병들어 시들고 생명을 다하는 모습이 내 잘못처럼 여겨진다. 하루 동안에도 즐겁고 슬프고 아프게 지나간다. 게다가 내 친구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오랜 친구들의 죽음은 인간이 직면해야 할 가장 힘든 일 중의 하나라고 했다.

이번 글에서 다루려는 제목은 80세 벽을 어떻게 넘느냐의 문제이다.며칠전에 《80세 벽》이라는 책을 읽었다. 일본 노인정신의학자 와다 히데키가 쓴 책이다. 세계 최고의 장수국가인 일본에서 생이 다할 때까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좋아하는 음식을 즐기며 자유롭게 독립적으로 살기를 원하는 노인들이 어떻게 80대 벽을 넘느냐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많은 시사점을 준다. 나도 80대벽을 넘어가는 노인으로서 100세 인생을 살아가는 시대에 어떻게 건강하게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가를 같은 맥락에서 살펴보려는 것이다. 나의 늙어가는 일기이기도 하다.

생물학적 경계

무리 건강한 삶이더라도 노년기에 이르면 ‘80대 턱걸이 노인’이 되기 쉽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턱걸이’란 하나의 경계 혹은 전환점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이다. 흔히 옛부터 아홉수 넘기기가 어렵다는 말도 그렇다. 다시 말해 9로 끝나는 나이를 말하는데 10년 단위의 마지막 해를 가리킨다. 아홉수는 마지막 관문으로 완전상태(10)직전의 숫자로 인생이 완성되기도 전에 불행이 찾아온다는 속설이 담겨있다. 예를 들어 70대에 이르러서는 79세를 잘 넘겨야 80대를 살아간다는 말이다. 80대로 접어드는 고비를 잘 넘기지 못하면 그 이후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이 주저앉고 만다는 가정이다.


이와 관련해 나는 80대 시점을 하나의 생물학적 임계점으로 본다. 미래의 90대, 100세 시대로 살아가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생물학적 경계다. 더구나 80대의 문턱을 넘어가는 것은 단순한 생각만이 아니라 실제로 몸의 쇠퇴를 느끼는 체험적 단계이다. 홀로 아프고 홀로 고뇌하며 홀로 세월을 보내게 된다. 나이가 바뀐다는 사실은 유아기로부터 노년기까지 조금씩 성숙(엄밀히 말하면 늙어감)해가는 몸과 의식의 변화이다. 몸과 마음도 같이 움직이게 마련이다. 일상생활 속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느끼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기차에 탑승하는 일, 강을 건너는 일, 삶의 휴식을 취하는 등의 신체적 터닝포인트의 순간이다. 건강하느냐에 따라 피안과 차안으로 갈라지게 된다. 80대를 관리하지 못하면 멀지 않아 휠체어, 보행보조기, 네발 달린 이동보조기에 몸을 의지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힘들고 외롭지만 인생의 ‘80대의 강’을 잘 건너가야 남은 세월을 즐겁게 보낼수 있다.

음, 분명히 인생은 살만하다고 하는데, 그러면 노년기는 어떤 모습으로 어떤 방법으로 존재해야 하는가?. 노년기의 사회적 관계는 어떠해야 하나?. 늙었다고 아무짝 없는 쓸모없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이러한 문제는 우리 삶에서 가장 강렬하고 시급한 질문이다. 이게 나 만의 생각일까? 그렇지 않다. 베르그송은 내가 살아간다는 것은 다름 아닌 내가 존재한다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리고 무엇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감정, 감각이 바로 내가 ‘존재함’을 확신 하는 계기가 된다고 했다. 이것이 내 존재의 시작이요 삶의 여정이다. 누구나 노화를 겪는다는 사실에서 80대에 이르면 내 존재에 대하여 심각하게 성찰해야 할 시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문제는 품위 있게 미소를 지으면 살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지나친 말인지 모르지만 80대의 벽은 어렵고 잔인하기만 하다. 80대로 접어들면 추함과 질병, 상실감 속에 살아갈 확률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몸이 “아프다- 몸이 좋아졌다”를 반복한다. 동시에 노년기에는 만성질병에 허덕이면서 다양한 모습으로 변하게 된다. 심리적으로 현실과 허구, 실재와 환상, 기억과 망각 속에서 힘들게 살아가게 된다. 슬픔도 기쁨도 용기도 잃게 된다. 뿐만아니라 젊음에서 노년으로 변해가는 데 있어서 단순한 생물학적 변화는 물론 정체성의 변화를 겪는다. 시냇물 소리, 청개구리 소리, 매미 소리가 젊었을 때 듣던 소리와 다르게 들린다. 젊은과 늙음이 같이 간다. 젊음과 노년기의 이중적인 겹을 인정하는 게 노년기의 삶이다.

우리는 건강과 풍요속에 정신질환에 시달리고 있다. 분노와 혐오, 무관심으로 가득한 세상, 경제사회적으로 각종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 우울증, 불안증세, 공황장애, 번아웃증후군, 분노조절장애, 식이장애 등 이른바 ‘문명의 병’에 노출돼 있다. 그 중에서도 뇌질환이 가장 무섭다. 문고리를 잡고 나가야 하는지 들어가야 하는 지를 분간 못할 때가 온다. 이런 정신질환은 뇌가 망가지고 부서지는 현상이다. 특히 치매로 인해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잃게 된다. 장수사회로 진입하면서 역설적으로 치매국가로 변하는 모양세다. 말인즉 인구 고령화로 국내 치매 환자는 2017년 72만 명에서 2026년에는 100만명을 넘어설 것이며 2030년엔 127만명으로늘어 날 것으로 전망한다. 치매 환자 중 70세 이상 노인이 전체의 89%, 알츠하이머 환자가 72%를 차지한다. 그게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누구나 치매 예비환자일수 있다. 80대 이상 노인들의 경우 알츠하이머, 중증 치매에 걸리지 않았다면 운이 좋은 사람이다.

아픈 몸을 살아가는 노년기

며칠전에 미국의 시인이자 저널리스트인 매건 오로크(Meghan O’Rourke) 가 쓴 《보이지 않는 질병의 왕국》(The Invisible Kingdom, 2022)을 재미 있게 읽었다. 저자는 한마디로 노년기는 질병과 동거하는 시기라고 했다. 서서히 늙어가다가 어느 날부터 갑자기 늙어버리는 '가속화 노화' 현상을 지적한다. 심지어 병명도 모르는 질병에 허덕이는 사람들, 자기 병을 이해하지 못하고 병과 함께 사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기에 만성질병에 맞서서 우리가 질병을 바라보고 질병을 경험하고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방식으로 환자로서의 개인, 외부환경, 그리고 상호작용관계에서 찾아봐야 한다고 했다. 참으로 인생은 영욕(榮辱)의 삶이다. 환상과 현실이 뒤섞여 있다. 노인기에는 슬픔, 빈곤, 질병, 외로움 등이 닥친다. 어떤 노인은 허리가 굽거나 뚱뚱이로, 혹은 똥 뱃살의 몸으로 살아간다.그러다 보니 머릿맡에 약봉지만 싸여간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에 따르면 약물 10종 이상 60일 이상 복용하는 사람의 비율이 75-84세의 경우 14.5%였다. 85세 이상에서는 15.6%로 높아졌다. 약이 싸이는 이른바 ‘처방연쇄’(prescribing cascode)현상이 일어난다.

그렇다고 병원을 멀리할 수도 없는 일이다. 내 몸 흘러가는 대로 놔둘 수도 없다. 프랑스 철학자 메를리퐁티(Merlean-Ponty)가 말하듯이 우리의 삶은 아무에게나 양도할 수 없는 나만의 자원이고 나 자신일 뿐이다. 현재의 나를 알고 미래의 가치 있는 ‘나’를 만들기 위해 남다른 노력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병이 들고 나서 치료하는 것보다 평소 건강상태를 점검해 병을 예방하는 ‘정밀건강’(precision health)이 더 중요하다. 참고로 내가 건강전문가는 아니지만 80대 이후 노년기에 건강수명을 유지하기 위해서 의사들이 지목하는 중대 질병 및 이에 대한 대비책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뇌졸증: 말하고 듣는 기능의 상실, 팔다리편측마비→ 경동맥초음파 뇌혈관 MRI

△치매: 간병인 필요→ 인지기능검사, PET, CT촬영

△심근경색 후유증:심부전 발생→ 심전도 검사, 관상동맥 CT검사

△당뇨병: 실명, 만성신부전 말초신경염 발생→ 혈당검사로 합병증 조기 발견

△골다공증, 골절: 거동장애→고밀도 검사, 근육키우기, 걷기 등 유산소운동

△시력, 망막질환: 백내장, 황반변성→ 정기적인 안과 검진

말인즉 현재의 나, 미래에 건강한 나를 만들려면 늘 건강지식을 터득하며 몸을 잘 보듬어야 한다. 병들면 누구를 원망할수도 없다. 진정 살아있는게 무엇인가?를 알아차리는 일이다. 80대의 벽을 넘어 100세를 살아간다고 가정할 때 “미래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상상해 보라는 말이다. 치명적인 질병에 걸려 본 사람은 알것이다. 병들어 침대에 누워 지내는 것은 살아서 숨을 쉬지만 실제로 사는 것이 아닌, 삶의 상실에 다름 아니다라는 사실을. 그러니 나의 경우는 내가 경험한 림프암(암4기진단)에 대한 정보를 수시로 찾아 읽으며 대처하고 있다. 누구든지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은 자기 병에 대해 의학 정보를 모아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또한 가능한 병원과 가까이서 살아야 한다. 우리나라는 종합병원, 병원/의원, 보건소, 보건지소, 보건 진료소 등 공공의료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다. 이들 의료기관을 잘 이용하며 몸을 돌보는 일이다.

나의 80대를 어떻게?

“주사위는 던져졌다”. 80대가 그렇다, 이쯤 되니 늙어가는 노년기에 무엇이 가장 중요한지 알겠다. 그것은 건강하게 살다가 잘 죽는 것이 아닐까. 친구들이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면서 나 자신의 죽음도 멀지 않았다는 생각이 자주 들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정신의학자 알프레드 아들러(Adler)가 말하는 ‘늙어갈 용기’가 필요하다고 하지만 잠재된 욕망, 불만, 후회, 상실감을 안고 하루 하루 버티는 몸이다. 남아있는 나날? 어떻게 여생을 보낼지, 삶의 마지막을 어떻게 준비할지, 끝까지 간직하고 싶은 것은? 버릴 물건, 자식들에게 남길 물건은 무엇인지? 다시 한번 돌아보게 된다. 80살이 넘어서도 방황하지 않는 인간이 어디 있는가.

한편, 나에게 남아있는 생이 가벼울까 무거울까? 흔한 농담으로 “나는 얼마만큼 늙었나? 이만큼 늙었지”. 늙어가는 것이 내 몸의 속성이다. 나는 환자복을 입고 병원창문너머로 해가 지는 풍경을 잊지 못한다. 나는 지난 5년간 암투병 생활, 추하게 생긴 내 얼굴, 머리카락이 빠진 머리, 허약해지는 육신의 두 다리, 관절, 발목의 장애, 가물가물해지는 기억력, 눈의 시력 저하, 치아의 흔들림, 골다공증 …, 지금에도 나를 얽매고 싶지 않지만 면역력의 저하를 걱정하게 되고 감기에 걸릴까 조심하며 독감 주사를 맞는다. 공포감이나 불안상태에 빠지게 됨은 물론 인식하는 능력을 가늠하는 뇌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 늘 신경이 쓰인다. 한마디로 쇠약해진 몸으로 죽음의 공포감도 느낀다.

놀랍지만 그게 사실이다. 몸의 신비, 나의 본능, 생노병사의 과정, 늙어가는 내 몸을 어찌하랴. 아! 오늘 새벽 왜 이리 숨이차고 기침이 심할까. 이제는 아픔도 기침도 내것이로다. 누구도 나의 고통, 내 건강을 책임지지 않는다. 누구와도 내 운명을 바꿀 수 없다. 스스로의 내 존재능력을 발휘해야 할 뿐이다. 생명과 죽음의 순환과정속에서도 파랑 노랑 빨강의 조화로운 삶을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나에게 최상의 수는 아니지만 내가 살고자 하는 논지는 매일 걷는 일이다. 철학자 니체는 산책을 통한 마법을 갈망하지 않았던가. 니체는 강박신경증적으로 가장 고립된 삶을 살았지만 그는 건강을 되찾기 위해 걷기를선택했다. 나 역시 매우 일차원적인 행동이지만 무의미함, 상실감, 그리고 질병의 고통을 이기기 위해서 걷는다. 걷기는 나의 힘이다. 걷기는 일종의 건강에 대한 투자이다. 걷기에 나서면 비몽사몽 의식이라고 할까? 무의식 상태에 빠진다. 걸을 때 쾌감을 느낀다. 어떤 때는 힘들게 걸을 때 더 힘이 생긴다. 내가 80대가 되어서도 하루에 20km 이상을 걷는다는 게 기적이다. 아무렴!. 이렇게 걷는 것이 악취미라고 하겠지만 나는 어딘가 갔지만 다시 돌아와 “지금 여기”에 여전히 있다. 걸을 때는 옛적의 아이처럼 느낀다. 생물학적으로 늙어 가지만 하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다시 새로워지는 기분이다. 백세인의 공통점은 나이에 관계없이 매일 규칙적으로 걷는 것이었다.


그 다음으로 주로 하는 일은 너무나 평범한 일들, 특별히 이례적인 일이 아닌, 예를들면 짬짬이 책을 읽고 글 쓰는 일을 내려 놓지 않는다. 글쓰기는 나에게 있어서 하나의 삶이다. 걷다가 느낀 점을 정신적으로 소화해서 정리 할 때 건강도 따라 오기 마련이다. 사실 우리는 살아가는 과정에서 늘 글을 쓰는 존재들이 아닌가. 남을 감동시키는 글이 아니더라도, 글을 잘 쓰는 방법을 알 필요는 없다. 일종의 “흔적을 남기는 글쓰기”면 된다. 글쓰기를 통해서 사는 법을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글을 쓰지 않는다면 아무 말도 생각할 수 없을뿐더러 그런 생각을 해도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세계적인 미래학자인 다니엘 핑크(Daniel Pink)가 쓴 《후회의 재발견》(The Power of Regret, 2022)에서 보면 짧은 글을 쓰는 것 만으로도 병원가는 횃수가 줄어든다고 했다. 사실 노년기는 습관적으로 먹고 잠자고 사람들 만나고 카페를 찾아 여유를 즐기는 일들..... , 그다음에는 철학적 사고가 필요한 나이다. 고대로부터 말하는 것과 글쓰기는 인간이 사고하는 행위이며, 무엇이 귀하고 천한지를 알게되는 창조적이며 영적인 행동이다.

뭔가에 미쳐서 살 때에 지속가능한 미래가 보인다

100세 시대, 당신은 백년을 살아갈 수 있는 지속 가능한 미래가 보이는가?. 늙어가는 여정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예측하기 어렵지만 노년기의 삶은 하나의 서사(narration)요 상실을 줄여가는 시기다. 스스로 하고 싶은 것, 관심이 있어야 젊게 살 수 있다. 건강한 육체와 정신을 유지하려면 뭔가에 미쳐야 산다. 뭔가에 미쳐서 살 때에 남다른 즐거움, 성공의 가능성이 높아진다. 뭔가에 대한 열정은 움직임이다.도파민 효과를 높혀야 한다. 아주 작은 몸짓들, 이를테면 정원을 가꾸고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고 집안 청소를 돕는 일들이 그렇다. 삶의 의지를 가지고 늘 움직이는 것이 삶의 근간이고 원동력이다. 사는 보람을 느끼고 살아가는 것이 장수문화를 형성한다. 이와 관련해 100세 시대를 살아가는 데는 두 가지 길이 있다. 상투적인 말이지만 행복한 노후인가? 불행한 노후생활인가?하는 점이 그렇다. 즉 전자는 좋은 인생, 즐거운 삶으로 행복을 만들어가는 삶이고, 후자는 질병, 가난, 후회로 이어지는 불행한 삶이다.

그러면 당신은 어떤 모습인가?. 물론 따듯한 난로가에 앉아 가족들과 함께 종알 거리는 것을 소망할 것이다. 하지만 행복과 불행은 같이 있다. 슬픔과 기쁨이 반복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사실은 '열정'(passion)이 행복한 삶을 이끈다는 사실이다. 나이가 문제 되지 않는다. 늙은 '또라이'가 되지 말아야 한다. 끝까지 삶의 열정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늙었다고 열정이 없는 게 아니라 열정이 없어서 빨리 늙는게 아닌가?. 자신이 젊다, 늙었다는 감정을 초월하는 힘은 오직 자신에게만 있다. 상실이 없으면 충만함도 없다. 비움과 채움, 음과 양 모두가 같이 있는 법이다. 훈계 같지만 꿈을 꾸며 몽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병들었다고 해도 그것을 극복하는 능력이 초월의 세계요 깨달음이다. 묵시론적 시각으로 볼 때 80대의 문턱을 잘 넘어야 한다. 여기서 저기로, 그리고 더 잘 늙어가기 위해서 지금까지의 삶에서 '변신'의 삶으로 옮겨가야 한다. 건강없이 아무것도 할수 없지 않은가. 병들면 즐거운 갈라쇼도 볼수 없다. 존엄하게 사라져야 한다. 이상으로 내가 흠친 지식, 상상력을 당신에게 바친다.(끝)

우 정(자유기고가,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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