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주일이라 성당에 다녀왔다. 아침에 좀 늦장을 부리는 바람에 본당의 아침 미사를 놓쳐서 오후에 집에서 도보로 20분 거리에 있는 성지의 순교자 기념 성당으로 갔다.
그곳 신부님은 독특한 점이 있다. 우선 말을 더듬는다. 더듬는다고 하지만 첫음절을 반복해서 말하는 일반적인 그런 더듬거림이 아니고 첫음절을 말하고는 다음 말이 바로 이어지지 않고 잠깐 멈췄다가 말하는 식인데, 갑자기 톤이 높아지기도 하며 자음이 들리지 않고 호흡 소리만 나기도 하는 그런 식이다. 내가 청력이 다소 나빠 그 신부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들려야 할 말소리가 안 들릴 땐 숨이 끊기는 것 같기도 해 몹시 답답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런 신부님이 인기가 꽤 좋다. 다른 신도들은(대부분 이 지역 분들이 아니라 성지 순례 차 온 신도들이다) 그 신부님의 말씀을 용케 잘 알아듣고 웃기도 하고 심지어 박수를 치기까지 한다. 아내도 이 신부님의 강론은 이상하게도 가슴에 잘 와닿는다고 이쪽 성당에서 미사 보는 것을 선호한다. 아내가 얼마 전 양쪽 발 무지외반증 수술을 받아 아직 거동이 불편해서 오늘은 성당에 함께 오지 못했는데, 집을 나서는 나에게 “강론 말씀 잘 들으시고 저한테 꼭 전해 주셔야 해요,”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래서 오늘은 내가 정신 차려 강론 내용을 잘 듣고 아내에게 그대로 전해줘야 할 형편이다.
다행이랄까 오늘 강론은 평소 친숙한 마태오 복음 25장을 중심으로 했기 때문인지 내가 못 알아들은 신부님 목소리 쪽도 비교적 쉽게 퍼즐 맞추기를 완성할 수 있었다. 요지는 항상 깨어 있으라는 것이었다.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처녀들 열 명 가운데 다섯은 어리석고 다섯은 슬기로웠으니, 슬기로운 처녀들처럼 항상 지혜의 기름을 준비해 등을 밝히고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라는 강론 말씀을 놓치지 않고 저녁 식사 때 아내에게 고스란히 전해줬다.
밤중에 잠잘 시간이 되어 침대 위에 누웠다. 그러나 바로 잠이 오지 않아 오늘따라 어눌한 신부님 강론이 아내 말처럼 내 가슴에 와닿았던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하고 생각을 해 보았다. 그러다가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 아주 오래전, 내가 평검사 시절에 다녔던 서울 영등포구 한 성당의 신부님이 떠올랐다.
그분은 나이가 좀 드시긴 했으나 젊은 사제 못지않게 모든 일에 열성적이고 정의감이 강하며 세상 돌아가는 일에 대해서도 몹시 비판적인 발언을 자주 했다. 거기까지는 나 역시 동조하는 바도 있어 큰 거부감 없었으나 정치적인 발언까지 자주 하니까 그것은 듣기가 좀 거북했다. 물론 성직자라 해도 정치적 소신이 없을 수는 없겠으나 자신의 소신이 바로 하느님의 뜻과 같다고 하면서 신도들도 거기에 따라야 한다는 식으로 강론을 할 때는 성당에서 마음의 안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적 고문을 당하는 느낌까지 들었다. 나중에는 독일 기자가 찍었다는 핏빛으로 물든 광주 5·18 현장의 끔찍한 대형 사진들을 본당 회랑 벽면을 도배하듯이 전시하고는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는 군부독재를 연장할 기호 ○번은 절대 찍지 마십시오.”라고까지 강한 톤으로 강론했다. 나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그 성당을 나가는 것을 포기했다.
나 역시 그 신부님의 영향을 받았는지 기호 ○번을 찍지 않았으나 바로 그 기호 ○번이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그러고 나서도 꽤 지나도록 나는 주일 미사를 보지 않았다. 그 한참 뒤에 그 성당에 주임신부가 새로 부임하여 분위기가 아주 달라졌다는 얘기가 들렸다. 새로 오신 신부님은 외국인인데 정치적인 말씀은 전혀 안 하고 온화하며 신앙에만 충실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도 기대를 품고 다시 성당엘 나갔다.
먼저 그동안 냉담하여 미사에 빠졌던 것을 참회하기 위해 고해성사를 보았다. 나는 이만저만 해서 그동안 신앙을 게을리했음을 반성한다고 고백하고는 이제 ‘정치 신부’가 갔으니 열심히 성당에 나오라고 격려 말씀과 적절한 보속을 내려주실 것을 은근히 기대했다. 그런데 웬걸! 갑자기 신부님이 고백소가 쩌렁 울릴 정도로 큰소리로 “교회는 하느님을 뵈러 오는 거지 신부 보러 옵니까?” 하고 화를 벌컥 내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해내기 힘든 보속을 명했다.
물론 나는 그 이후 그 성당을 계속 나갔고 그 외국인 신부님이 참 강론을 알아듣기 쉽게 잘하신다고 감탄하기도 했는데, 내가 고백했을 때 그분이 왜 그렇게 화를 내셨는지는 내내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
잠이 오질 않아 이리저리 뒤척이다 보니 그보다도 몇 년 더 앞선 일들까지 생각이 났다.
나는 정말 검사 생활을 신나게 했다. 검사가 하는 일이, 나쁜 짓을 범하고서도 빠져나가려고 하는 자를 증거와 법리로 꼼짝없이 얽어매어 잡아넣는 것도 신명이 났고, 억울함을 당해 자살 직전까지 간 피해자를 도와주어 살맛 나게 해주는 것 또한 뿌듯한 보람이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그런 것들이 모두 다 싫어졌다. 내가 신나 했던 그런 것들이 매일 비슷하게 계속되는 일상이 되니까 그다지 감흥이 일어나지 않고 덤덤했고 어떤 때는 오히려 지겹기까지 했다. 또 내가 늘상 만나는 피의자나 피해자라는 사람들이 다 피하고 싶은 저급한 사람들뿐이다 보니 그것 역시 지긋지긋했다. 손발에 동상 걸려 가면서까지 새벽시장에 나가 생선을 팔아 동생 대학 등록금을 마련한 또순이 노처녀의 돈을 사기 쳐 간 백수 도박꾼, 피해 신고를 못 하게 할 목적으로 남편이 보는 앞에서 부인을 능욕한 강도강간범 같은 망종 피의자들만 조사하다 보니 좀 지쳐 버렸다. 또 피해자라는 사람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일확천금을 바라고 혹해서는 사기꾼한테 돈을 갖다 바치고는 그걸 빨리 안 찾아준다고 매일 검사실에 와서 소리소리 지르는 사람이나, 특혜를 바라고 공무원에게 꽤 많은 돈을 찔러줬다가 일이 제대로 안 풀리자 그 공무원이 겁박해서 갈취당한 것이라고 신고를 한 건설업자 같은 경우가 그렇다. 이런 생각이 들자 과연 내가 검사 생활을 계속 해야 하는가 하는 회의(懷疑)가 일어나고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싫고 만나는 게 짜증스러웠다.
그럴 즈음 어느 장례식장에 갔다가 소설가인 한 친구를 만났다. 대학 시절에 함께 문학 동호 활동을 했던 친구인데, 그는 나와 달리 졸업 무렵에 어느 문예지 추천을 통해 데뷔를 했고, 그 뒤 지방대학에서 후학을 가르치면서 꾸준히 장·단편 소설을 발표해 왔다. 평론가들 사이에서도 설득력 있는 문장과 인간성에 대하여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치열한 신뢰가 돋보인다는 식으로 그의 작품에 대해 상당히 좋은 평을 받고 있었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는 선술집으로 자리를 옮겨 많은 얘기를 나눴다. 나는 지난번 그가 어느 문학상을 탈 때 다른 사람이 자기를 만난 것이 행운이 되도록 살아왔다면서, “이제 소설가로서 이렇게 큰 상을 탔으니 제 소설을 읽은 것이 큰 행운이 되도록 좋은 소설을 열심히 쓰겠습니다.”라고 수상 소감을 말한 것이 꽤 인상적이었다고 말문을 열었다. 그러자 그는 며칠 전 신문에 보도된 대형 해외 취업 사기 사건 같은 것은 품이 많이 들어가는 어려운 수사일 텐데 용케 해냈다고 하면서, 그런 사건의 선량한 피해자들을 도와주는 맛에 검사 노릇을 하는 것이 아니냐고 화답했다. 얘기가 길어지자 결국 나는 이제 검사 노릇도 싫고 도대체 인간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짜증스럽다고 신세타령을 해 버리고 말았다. 내가 속앓이를 하고 있었는데, 그래도 대학 시절에 여자 문제까지도 다 털어놓고 얘기하던 사이이니 그에게 내 고민거리를 털어놓으면 마음이 좀 풀릴 거라는 기대도 좀 했다. 그러나 그의 반응은 정말 엉뚱했다.
“아니, 사람을 만나면서 준비를 전혀 하지 않다니…. 준비를 안 하고 만나면 상대방에게 행운을 주기는커녕 그쪽을 이해하기도 어려워!”
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데 그가 이렇게 덧붙여 말했다.
“그러한 피해자나 피의자 너머에 있는 보편적인 인간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다면 우리는 무슨 맛으로 사는가?”
그가 이렇게 단호하게 나오니 그 자리는 어색해져서 대충 마무리하고 우리는 헤어지고 말았다.
그는 나와 매우 친밀하고 또 나를 믿기에 그렇게 직설적으로 말한 것일 텐데 나는 사실 뜻밖의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그가 소설가로서 성공하고 내가 작가가 될 수 없었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그 친구를 만난 이후 나는 조금 달라졌다. 다른 사람을 만나기 전에 나도 모르게 꼭 어떤 준비를 하게 됐다. 처음 만나는 사람이면 그의 전력이나 취향 같은 사전지식을 어느 정도 파악하는 것은 물론 내가 그 사람에게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는가, 아니면 최소한 내가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를 미리 챙겨 보았다. 사건 수사 관계로 만나는 사람들에게도 그냥 사무적으로만 대하지 않고 그들을 가능한 한 이해하려 했고, 다른 검사가 아니고 나를 만났기 때문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은 없는가를 찾아보려고 했다. 돌이켜보면 내가 바로 검사를 그만두지 않고 20여 년을 더 봉직한 것은 그 친구의 질책 같은 충고 덕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잠자리에 들어서 이런저런 잡념이 복잡하게 얽히는 바람에 잠을 영 못 이루는 경우도 있는데, 오늘은 여러 가지 일들이 떠올라 바로 잠들지는 못했으나 머릿속이 정리되어 그동안의 숙제가 풀리는 듯한 편안한 느낌이 든다.
나는 등불을 제대로 켜지 않아 왔다. 등잔을 가지고 있어도 기름이 부족하여 등불을 충분히 비추지 못했던 것이다.
소설가 친구의 말대로 나는 피의자나 피해자의 겉모습만 보고 환멸을 느끼기만 했지 그들의 내면에 숨어 있는 고귀한 인간성 같은 것을 찾아내려고는 하지 않았다. 또 외국인 신부님이 화를 냈듯이 나는 하느님을 맞이할 아무런 준비 없이 그냥 그 성당을 나갔기에 그 노신부님의 거북한 발언들에 거부감만 품고 정작 만나야 할 하느님도 뵙지 못하고 말았던 것이다. 순교자 기념 성당의 어눌한 신부님 강론도 그 신부님이 말을 더듬어서 알아듣기 어렵다고 아예 제대로 들으려고 마음먹지 않았기에 오늘 이전에는 잘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 맞다.
어쩌면 그때 새로 오신 외국인 신부님은 뭔가 준비가 되어 있었기에 나를 크게 혼내면서 깨우쳐 주었고, 따지고 보면 소설가 친구도 준비가 되어 있었기에 나를 질책하고 바로잡아 줄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오늘 아내가 말 더듬는 신부님 강론을 잘 듣고 자기한테 알려달라고 당부한 것도 하나의 준비이고 또 나에게 준비를 시킨 것으로 생각된다.
나는 “그러니 깨어 있어라.”라는 마태오 복음 25장 13절의 말씀을 좌우명 삼아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나의 삶의 자세로 삼아 왔고(그래서 나는 술에 취하여 해롱거리는 것을 유난히 싫어했다), 또 처음 성경을 통독할 때 지도 신부님의 가르침에 따라 제일 먼저 「사도 바오로의 데살로니카 1서」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거기에 나오는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5:6)라는 구절에 형광펜으로 밑줄을 긋기도 했었다. 그러한 것들도 내가 오늘 어눌한 신부님의 강론을 듣고 이해하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오늘 그 신부님의 강론을 듣고 나니까 ‘깨어 있다’라는 것이 흐리멍덩하지 말고 각성된 상태로 있어야 한다는 뜻도 있지마는 그보다는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 더 앞서는 것도 알만 하게 되었다.
누구를 만나기 위해서는 만나기 전에 꼭 맞이할 준비를 하자. 등불을 밝게 비추어 상대방을 잘 보고 상대방도 나를 잘 보아서 서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준비를 말이다. 그 등불은 현상만 보고 비판하지 않고 그 너머의 본질까지도 꿰뚫어 보고 사랑까지 할 수 있는 지혜를 의미하는 것이겠지….
다시 1주일이 지나 오늘도 주일이다.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성지의 순교자 기념 성당으로 미사를 드리러 지금 가고 있다.
오늘은 하느님께 오롯이 나를 내맡길 준비를 단단히 했고, 어눌한 신부님의 말씀을 좀 더 귀 기울여 잘 들고 이해하려는 청력 강화 수련도 마음속으로 했다. 그리고 성당에서 만나게 될 다른 신도들과 혹 인사라도 나누게 되면 그를 더욱 잘 이해하고 가능하면 그가 나를 만난 것이 행운이 되도록 하겠다는 마음의 준비도 했다.
나는 지금 만나러 간다. 정말로 등불을 켜고 제대로 만나기를 기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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