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음은 심신이 노후화되고 쇠퇴하는 과정이다
. 늙으면 환경적 자극에 대해 반응하고 적응하는 속도가 느려진다. 사회적 역할과 책임이 감소한다
과거에 대한 관 심이 커진다. 늙으면 관계와 교류의 어려움이 커진다. 세대 간의 간극이 벌어지고 동배 간에도 격차가 커진다. 동시대인들이 비슷하게 자랐더라도 살아 온 길이 다르면 서로 달라진 만큼 소통의 벽은 높아진다. 늙으면 늙었다는 말을 듣기 싫어하고 유수 같은 세월의 무정함을 한탄한다.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 것을 애달파하고 자주 말하게 된다. 그 까닭은 나이 들어 효율이 떨어 진 탓이기도 하고 시간감각이 무디어진 탓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이유는 시간이 더디 갔으면 하는 절절한 바람 때문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인생은 언제나 초행길이다. 늙음도 물론 초행길이다. 늙어 본 경험을 가진 젊은이는 없다. 개개인에게 늙음은 새롭고 경이로우며 탐구와 모험을 자극하는 도전일 수 있다. 늙음이라는 신천지는 흥미로우며 거기서 배울 것도 깨달을 것도 많다. 늙음을 배우고 깨우치는 일은 삶 의 보람이요 기쁨일 수 있다
늙어갈수록 사람들과의 관계를 지혜롭게 선별해야 한다. 인지상정을 바로 가진 사람들과 교류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장수의 비결이라 하지만 그 많은 사람들이 좋 은 사람일 때만 그러하다. 이끗을 노리는 사람들, 표변을 일삼는 사람들, 열등감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멀리해야 한다. 나보다 우수하고 자긍심이 강한 사람들을 가까이 해야 한다. 대인관계 형성에서 동년배들끼리의 교류에 좁혀 들어갈 일은 아니다. 세대간의 교류도 소 중히 해야 한다. 세대종단적 관계를 넓히면 좋은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날 수 있다. 동배끼리의 어울림에서는 동병상련, 공동화제, 터파(攄破)의 위로와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늙은이들끼 리 해찰하는 여유로움을 즐길 수도 있다. 그러나 침체와 퇴영, 하릴없는 한탄의 전염이 우려 된다. 젊은이들과의 교류에서는 젊음의 전이를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세대 간의 생활리듬 차이가 문제로 될 수 있다. 늙음의 품격에 자칫 손상을 입을 수도 있다. 젊은이들과 어울릴 때는 관대하되 문란하지 않도록 각별히 마음써야 한다. 외로움이라는 느낌은 어느 연령대에서나 경험한다. 다만 그 색깔이 나이에 따라 다를 뿐이 다. 그런데 늙었기 때문에 더 외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노인들은 외로움을 잘 다독 여 극복하기도 하고 외로움에 적응하기도 해야 한다. 외로움이라는 사치를 누릴 줄도 알아야 한다. 홀로 있을 때 깊은 사색도 가능하다. 스스로 몰입할 일도 있고 끝없는 위안을 품고 있는 무위자연도 있다. 인간에게서만 위로를 얻으려고 지나치게 매달리면 더 힘들어질 수 있다. 사람들과의 어울림이 오히려 외로움의 여 진을 남길 수도 있다. 군중 속의 고독이 시리다면 홀로 있음의 안도감을 찾는 쪽이 낫다.
만난 사람들은 언젠가 헤어지고,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 이별의 원인은 만남이요 죽음의 원인은 태어남이라는 말을 들었다. 이승에 발을 디디게 된 것이 인간의 숙 명이라면 죽음의 직면도 인간의 숙명이다. 조물주는 이 세상의 창생을 만들 때 무결점주의를 지키지 못한 허물을 덮기 위해 사멸이라는 수습책을 도입했을 것이다. 여하간 안타까운 일이 나 별 수 없다. 죽음에 대한 사색은 인간필생의 과제이다. 늙으면 그것은 더 진지하게 대해야 할 과제가 된다. 죽음을 바라보면 삶에 대한 시각도 바로잡아질 수 있다. 죽음에 대비하는 삶 은 보다 많이 의미 있고 풍요로워질 수 있다.
늙음의 응달과 고뇌는 현실에 가까우며, 바람직하고 즐거운 늙음은 이상에 가깝다고 생각 하는 게 중론이 아닌가 싶다. 아닌 게 아니라 나 역시 그런 의심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그러 나 이상이 있는 것은 이상이 없는 것보다 낫다. 목표와 희망은 달성이 확실치 않은 미래의 영 상이다. 목표와 희망이 완전히 달성되면 그것은 이미 목표와 희망이 아니다. 모든 희망을 달 성한 사람에게는 희망이 없다. 그러나 거의 모든 인간은 미완성인 목표와 희망을 안고 생을 마감한다. 고로 살아 있는 인간에게는 언제나 목표와 희망이 있다. 우리는 스스로 세운 인생 의 목표를 보다 많이 달성하기 위해 부지런히 노력해야 한다. 목표의 완결에 가까울수록 생 의 마무리는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불완전한 구석을 전혀 남기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인간은 인간을 스스로 불완전하다고 정의하고 있으며 인간사회의 문화는 과오용인의 범 위를 벗어나지 않는 우리의 실책을 관용한다. 이런 저런 이치를 생각해 늙음의 최적 기준에 미달하는 다소간의 차질에 대해 너그러워질 필요도 있다. 관용의 대상에는 남뿐만 아니라 나 도 포함된다. 남보다도 나에 대한 관용은 정말 어렵다. 나의 모자람을 위무하고 평정심을 지 키기 위해 많은 수양을 쌓아야 한다 (퍼온 글)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말들 중에 자주 인용되는 말이 있는데 그 말은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입니다. 사람이 할 일을 끝까지 다하고 마지막은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말은 쉽지만 이 진리를 따라 살기란 그렇게 용이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원래 성품이 과정을 생략한 결과만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씨는 뿌리지 않고 열매를 기대하는어리석음입니다
예수가 최후의 만찬 후 겟세마네에서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라 기도하고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 “저들의 죄를 사하여주소서”하고는 “다 이루었다.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면서 숨을 거두었다. 그리고 종교적 믿음이건, 상징적인 의미이건 부활하였다. 죽음을 앞두고 보인 예수의 모습은 범인은 흉내 낼 수 없는 초인 그 자체이며, 진인의 전형이다. 진인사대천명이 동양에만 국한된 사상이 아니며, 신앙생활에도 두루 통하는 정신이라 볼 수 있는 예이다. 누구나 수시로 조용히 결과를 기다리는 때를 맞이한다.
매순간 우리를 괴롭히는 욕심과 불안감으로 생기는 미련을 떨쳐버리고, 체념이 아닌 마음 한 켠에 여유라는 공간을 비워두고 느긋하게 오늘을 즐겁고 가볍게 살 일이다. 그것이 진인사대천명 하는 삶이라 생각한다.
천명(天命)에 의탁하여 인생을 마무리하기로 작정한다면 평안을 얻을 수 있을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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