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5월 16일 토요일

늙음과 아픔, 삶의 지혜



늙는다는 것은 단순히 시간이 흐른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익숙했던 몸과 세계가 조금씩 낯설어지는 과정이다. 예전에는 밤을 새워도 괜찮았던 몸이 이제는 하루의 피로를 오래 붙들고 있고, 쉽게 잊지 않던 이름 하나가 혀끝에서 한참을 맴돈다. 거울 속 얼굴에는 세월이 남긴 흔적이 켜켜이 쌓여 간다. 사람들은 흔히 늙음을 슬픔으로 말하지만, 사실 늙는다는 것은 삶이 지나온 시간을 몸에 기록하는 일에 가깝다.

하지만 늙는 것과 아픈 것은 다르다. 늙음은 자연의 방향이지만, 아픔은 삶을 멈춰 세우는 경험이다. 나이가 들면 몸 여기저기가 약해질 수는 있어도, 모든 노인이 고통 속에 사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천천히 늙어 가면서도 자신의 속도로 걷고, 웃고, 사랑한다. 반대로 젊은 나이에도 병으로 인해 하루를 버티기 힘든 사람도 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늙음을 두려워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두려운 것은 ‘아픔 속에서 자신을 잃는 일’인지도 모른다.

저녁의 등불을 켜며: 늙음과 아픔의 곁에서

삶의 계절이 깊어갈수록 몸과 마음이 머무는 풍경도 조금씩 단순해진다. 돌아보면 참 오랜 세월을 이 넓고 분주한 세상 속에서 살아왔다. 한때는 더 많이 채워야 하고, 더 멀리 나아가야 한다고 믿었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인생의 저녁노을이 길게 드리워진 지금, 삶이 내게 가르쳐 주는 가장 큰 지혜는 '더하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에 있다.

요즘 들어 부쩍 '늙는다는 것'과 '아픈다는 것'에 대해 깊이 묵상하게 된다. 이 두 가지는 나이가 들면 불현듯 한 묶음처럼 찾아와 우리를 시험하지만,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 결은 확연히 다르다.

늙음은 자연이 우리에게 선물한 거대한 '정리 정돈'의 시간이다. 세월은 내게서 거친 활력과 팽팽한 젊음을 가져간 대신, 사물의 본질을 지시등 없이도 알아보는 맑은 눈을 남겨주었다. 젊은 날에는 보이지 않던 세상의 이면이 보이고,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허상인지 분별하는 안목이 비로소 생겨난다. 인간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수많은 이들로 북적이던 마당을 지나, 이제는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깊은 정서적 안식을 주는 소수의 맑은 인연들만 남았다. 겉치레를 걷어내고 남은 이 소박한 관계들이야말로 노년에 누리는 가장 큰 사치일 것이다. 참으로 고맙고 아늑한 비움이다.

그러나 이 평온한 길목에서 불쑥 마주하는 '아픔'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성숙이 아니라, 일상의 리듬을 사정없이 흔들어 놓는 불청객이다. 매일 아침 거르지 않던 5,000보의 걸음이 무거워지고, 일주일에 두세 번 푸른 잔디를 밟으며 골프채를 휘두르던 경쾌한 순간들이 몸의 통증 앞에 멈춰 설 때, 마음은 나약해지기 마련이다. 아픔은 시선을 자꾸만 안으로만 가두고, 삶의 영토를 좁히려고 협박한다.

여기서 노년의 진짜 공부가 시작된다. 늙음은 담담하게 수용하되, 아픔에는 영혼이 잠식당하지 않는 지혜가 필요하다. 몸의 어디 한 곳이 삐걱거린다고 해서, 반세기 넘게 가꾸어 온 삶의 존엄과 지혜까지 고장 나는 것은 아니다. 아픔은 그저 낡아가는 육체가 보내는 당연한 신호일 뿐, 내 존재의 전부가 될 수 없다. 완치라는 집착을 내려놓고, 조금 까다로워진 오랜 친구를 달래듯 몸의 불편함과 나란히 걷는 법을 배워간다.

중요한 것은 '포기한 것'을 아쉬워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내게 허락된 것'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비록 청년의 속도는 아닐지라도, 오늘 내가 내디딜 수 있는 만큼의 걸음이 있고, 곁에서 오랜  세월 동안 변함없는 온기로 동행해 준 아내의 손이 있으며, 잔잔하게 차 한 잔 나눌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프랑스의 작가 주베르는 *"인생의 저녁은 저녁의 등불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육체는 조금씩 가벼워지고 약해질지라도,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지혜와 마음의 평온이라는 등불만큼은 밤이 깊어갈수록 오히려 더 선명하게 빛난다. 몸의 아픔이 그 고요한 저녁의 불빛을 흐리게 두지 않으리라. 오늘도 나는 내게 주어진 소박한 일상의 리듬을 사랑하며, 더없이 맑고 가벼워진 마음으로 등불의 심지를 돋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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