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25일 일요일

한국전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미아리 고개에 육중한 물체가 굉음을 내면서 내려왔다. 대포를 맞아도 끄떡없다는 북한 탱크

국군은 6월27일 밤까지 인민군을 완강하게 저지했으나, 홍릉 방면으로 진출한 탱크 2대로 인해, 미아리 방어선이 무너졌다.

돈암동에서 탱크를 목격한 강문봉 대령은, 채병덕 총참모장에게 "적의 전차가 서울 시내까지 진입했습니다." 하고 보고했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인민군의 주력부대는 진격하지 않고, 미아리 고개에서 후속부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세를 파악하지 못한 총장은, 최창식 공병감에게 한강 다리를 폭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시영 부통령과 채병덕 총장, 육군본부 참모들이, 한강대교를 넘자마자 다리가 폭파되었다.

6~8시간의 여유가 있었는데, 너무 일찍 폭파한 것이다. 

이에 6개 사단, 4만 4천 명은 중장비도 버린 채 도보로 후퇴했다. 

50대 이상의 차량이 한강에 빠지고 500명이 죽었다.  
  
지휘관의 오판으로 병력과 물자수송에 막대한 손실을 입어, 이승만 대통령은 폭파 책임자인 최창식 대령을 구속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상부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는 것이 판명되어 석방되었다. 

한강 인도교는 폭파되었지만, 화물을 수송하던 한강철교는 통행이 가능해서, 인민군은 낙동강까지 진격할 수 있었다.  

세상이 바뀌었다. 
 
'인민공화국 만세' '영명한 김일성 장군 만세' '스탈린 원수 만만세' 

좌익들은 인민군 만세를 부르고 집집마다 인공기를 걸었다.

학생들은 인민공화국을 지지하고, 이승만 정권을 타도를 외쳤다. 

인민군이 한 청년을 잡아와서, 군중들에게 반동분자냐고 물었다.  

어떤 사람이, 그렇다고 말하자 바로 총살을 했다. 이게 인민재판이다.

21일에는 붉은 완장(先發隊)들이 짐을 싸기 시작했다.

6, 25는 노 대통령이 감당하기에 너무 버거웠다.

세계 전사상 가장 혹독한 전투

장전호 전투

1950년 11월 26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북진하던 미 해병 제1사단 1만 2,000명이 개마고원의  장진호(長津湖)에서 중공군에 포위되었다.  

12만 명이 인해전술로, 나팔을 불고 꽹과리를 치며, 끝없이 몰려왔다. 

17일간 혈투 끝에 미군은 포위망을 뚫었지만 그 대가는 너무 컸다, 

사망 2,500명, 부상 5,000명. 그러나 중공군은 미군의 10배가 넘는 피해를 입었다. 

지옥보다 더한 추위(colder than hell), 장전호 주변은 기온이 영하 40도로 떨어졌다. 

M-1 소총이 얼어 소변으로 녹이려 했지만 그대로 얼어붙었다. 

동상(凍傷)에 걸린 다리는 톱으로 잘라야 했다. 

수혈 팩이나 모르핀은 얼어붙어 무용지물이 되었다.

적군을 피해, 밭고랑에 엎드렸다가 동사한 병사도 있었다.

포탄보다 무서운 살인적 추위는, 교전에  따른 것보다 사망자가 더 많이 나왔다.  

장진호 전투는 열악한 조건에서 중공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그래도 포위망을 뚫고, 민간인 10만 명을 구출한 비터 빅토리였다. 

장진호 전투로 중공군 남하가 2주간 지연이 되자, 미군은 역사상 최대 규모의 흥남철수작전을 성공시켰다. 

피란민 1만 4000명을 태우고 거제도로 향했다.

단장의 미아리 고개
화약 연기 앞을 가려 눈 못 뜨고 헤매일 때
당신은 철삿줄로 두 손 꽁꽁 묶인 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 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 고개
6.25의 아픈 흔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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