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10일 토요일

대한민국 경제 기적 일군 91세 숨은 영웅

 박정희 대통령의 초대 경제수석 30대 엔지니어 신동식

KIST 설립 등 기술 주도 경제개발 기초 닦아

세계 1등 조선업 최고령 현역으로 오늘도 ‘코리안 미러클’ 실현 중


1969년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 준공식에 참석하는 박정희 대통령과 경제 관료들. 박 대통령 뒤가 신동식 당시 경제2수석이다. /신동식 회장 제공

대기업 총수들이 총출동한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을 보면서 역대 대통령들의 방미에도 관심이 쏠렸다.

58년 전, 대한민국 대통령의 두 번째 국빈 방문도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으나 극빈국 정상은 맘 편히 환대를 누릴 수 없는 처지였다.

월남 파병에 대한 보답으로 린든 존슨 대통령이 초청해 1965년 5월 박정희 대통령이 미국을 국빈 방문했다.

공식 일정 외에 대통령은 시간을 쪼개 33세 엔지니어를 만났다.

종이에 우리나라 지도를 그리며 “3면이 바다인데 고기를 잡든 배 만들든 뭐든 해야 할 것 아닌가.

존슨 대통령이 비행기 보내줘서 타고 왔는데 자리 남으니 나랑 같이 귀국하자”고 그를 설득했다.

1932년생 신동식. 6·25 전쟁 때 학도병으로 참전했다.

피란지 부산에서 미국 군함에 실려온 군수물자와 구호품을 점검하는 일을 하면서 운명처럼 서울대 조선공학과에 진학했다.

졸업했지만 조선업 일자리는 없었다. 세계 각국에 편지를 보내 무작정 문을 두드렸다.

스웨덴 코쿰 조선소가 여비를 대주며 설계부 엔지니어로 받아줬다.

기능공 양성소에 입소해 현장 기술부터 익힌 뒤 선박 설계를 배웠다.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바다를 제패해 세계를 지배한 나라 영국으로 건너갔다.

한국인 최초로 세계적 명성의 로이드선급협회 국제 검사관이 됐다. 조선업계 꿈의 직장이었다.

1961년 일본 파견 근무 때 박 대통령과 첫 만남이 이뤄졌다.

대한조선공사 기술고문을 맡아 귀국했지만 진척이 더딘 현실에 다시 미국선급협회 검사관으로 떠났다.

4년 뒤 방미 길에 박 대통령이 그를 만나 청와대 1급 정무비서관으로 데려왔다.

말이 발탁이지, 1인당 국민소득 100달러의 가난한 나라에서 대통령 측근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는 외국 가서 돈 끌어오고, 기술 얻어오고, 원료 들여오고, 인재 모셔오는 ‘대통령 공인 국가대표 거지’ 역할을 도맡았다.

고달픈 책무를 다 감당했던 건 국가 발전에 혼신을 쏟는 전문가로 인정하고 믿어준 박 대통령의 리더십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 보고를 하느라 얼마나 많이 공부하고 고민했겠나. 국가에 유익한지 아닌지의 기준으로 판단해서 결정하라”며 맡겼고, “이게 성사되려면 나는 뭘 해야 하나”며 몸소 지원에 나섰다고 한다.


2015년 12월 15일 사무실에서 선박 설계도를 살펴보고 있는 신동식 한국해사기술 회장./김지호 기자

대한민국 경제 기적은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소)를 시발로 국책 연구소들을 만들고 기술 자립도를 높여가며 정부 주도로 중공업 육성 경제를 설계해 기업들로 하여금 실행에 옮기도록 한 덕에 가능했다.

씨앗은 1960년대에 뿌려졌다. 1966년 방한 때 존슨 대통령에게 받을 선물 보따리를 놓고 “존슨 대교를 짓자”는 등의 발상이 나왔다.

박 대통령은 “과학기술연구소를 만들어달라고 하자”는 신동식 비서관의 의견에 귀 기울였다.

대통령이 직접 홍릉 임업시험장으로 달려가 KIST 부지를 정하고 수시로 건설 현장을 들러 공사를 챙겼다.

신 비서관은 최형섭 초대 KIST 소장과 함께 해외 유학생 과학기술 인재들을 영입하기 위해 공을 들였다.

박 대통령은 이들에게 대통령보다 많은 연봉을 지급하게 하고 KIST 예산을 한 푼도 못 깎게 지시했다.

양철 한 조각 못 만드는 나라에서 초대형 조선업 마스터플랜을 보고하니 다들 정신 나간 사람 취급을 했는데 대통령은 달랐다.

조선업이 철강·기계·전자 등 산업 유발 효과도 크고 장차 해상 물동량이 늘어나 유망할 것이라는 그의 비전을 경청하고 수용했다.

1968년 청와대 직제 개편으로 경제수석이 신설됐다.

대한민국 초대 경제수석에 엘리트 관료 김학렬(경제1수석)과 36세 엔지니어 신동식(경제2수석)이 기용됐다.

조선·철강·기계·화학·전자 등 제조업 중장기 발전 계획 등을 수립하고 6년간의 공직 생활을 마감한 뒤 조선업계로 되돌아갔다.

편한 길 대신 경영난을 겪던 중소기업 한국해사기술(KOMAC)을 인수해 반세기 동안 선박 설계 및 감리를 도맡았다.

경비정, 고속정에서부터 컨테이너선, 유조선, 쇄빙선, 핵폐기물 운반선, 심해자원탐사선에 이르기까지 2000여 종 선박을 설계했다.

국내외 조선소 건설 및 운영에도 도움을 줬다.

2003년 대한민국 조선업이 세계 1위에 등극하고 그 공로로 훈장을 받은 날, 대한민국 초대 경제수석은 국립현충원부터 찾았다.

박정희 대통령 묘소에 1시간 넘게 머물며 “그렇게 염원하셨던 해양 입국의 꿈이 드디어 실현됐다”고 긴 보고를 올렸다고 한다.

‘한국 조선업의 아버지’로 세계 조선업계에는 널리 알려졌지만, 공직에 남지 않아서인지 조선업을 넘어선 한국 산업화 역사에서 그에 대한 기록을 조목조목 찾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얼마 전 뵙게 된 91세 신동식 초대 경제수석(한국해사기술 회장)에 대해 글을 남긴다.

50여 년 전 공적 못지 않게 주목할 건 세계 조선업계 최고령 현역으로 쉼 없는 도전을 이어가는 그의 청년 정신이다.

30만톤급 선박에서 승용차 2000대 분량의 온실가스가 나오는 환경 문제에 일찌감치 눈떴다.

20년 전부터 탄소 포집 기술에 관심 갖고 경쟁력 있는 노르웨이 회사를 찾아내 기술도 공동 개발한다.

매일 출근해 방대한 영문 보고서를 읽고 해외 정부 관계자나 기업들과 줌 미팅을 한다.

인도, 베트남, 가나 등지에서 중공업 발전 계획을 도와달라는 정부 요청도 이어진다.

그를 보면 대한민국 산업화의 기적이 흘러간 과거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다.

강경희 논설위원 논설실 논설위원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