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11일 일요일

인생을 다 살았다고 할 때는 언제인가?

 인생을 다 살았다고 할 때는 언제인가?

이 제목을 명상하기 전에 한 인생이 인생이라고 생각하며 산 해가 얼마나 될까를 계산해 보라. 이 세상에 태어난 아기에게는 인생이라는 말을 붙이기 어렵다. 어린아이 시절을 거쳐 인생이라는 것을 느끼기 시작할 때는 어리광을 떨쳐버린 뒤이다. 인생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부터 고민과 갈등도 따라붙고 삶과 죽음도 때때로 생각한다. 그러다가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늙은 때가 되면 인생이라는 말을 깊이 생각은 하나 활동은 이미 줄여가는 때가 되어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정으로 인생을 산다고 말하면서 활동하는 기간이 얼마나 될까?

스위스의 한 노인이 계산기로 무엇인가를 열심히 합산하면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 노인은 자신의 인생 말기에 자신의 80년 동안의 삶을 시간 양으로 계산하면서 깜짝 놀랐다.

* 잠자는 시간 26년

* 식사하는데 소비한 시간 6년

* 세수하면서 허비한 시간 228일

* 출근길에 넥타이를 매면서 허비한 시간 81일

* 다른 사람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기다린 시간 5년

* 혼자 멍하니 공상으로 보낸 시간 5년

* 담뱃불을 붙이는데 소비한 시간 12일

인간이 무엇을 하다가 다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결국 흐르는 물과 같은 세월에 떠밀려 지난날을 돌아보니 인생의 마지막 정거장에 가까이 온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인생은 과정 속에서 살다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결코 목적을 다 이루었다고 장담할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다. 비록 성공한 사람이라도 지금의 그 성공이 목적지였던가? 성공을 목적으로 두고 열심히 뛰어온 결과가 성공이라고 부르는 지점에 온 것이지 그 상태가 목적지는 아니다. 그런고로 인생은 절망의 대상도 아니고 성공의 대상도 아니다. 차이가 있다면 다른 사람보다 좀 더 많은 것을 가졌고, 많은 일을 하였고, 많은 것을 소유해 본 경험을 가져본 것뿐이다.

그래서 인간은 과거를 가지고 기뻐하고 어깨에 힘을 주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자세히 생각해 보면 과거는 과거일 뿐 현재에 가지고 놀 것이 못된다.

평범한 사람들은 자녀를 낳아서 성인이 되면 결혼시켜 분가하는 일을 부모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다. 그러면 미국에서는 자녀의 나이 18세가 되면 독립적인 생활을 하겠다고 집을 나가는 젊은이가 많다. 그렇다면 부모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것일까? 자녀들은 독립적인 생활을 원한다. 그들에게 자유를 주는 것이 오히려 부모의 의무를 다하는 것일 것이다. 그렇다면 부모가 자녀를 위해 의무를 다하는 일은 무엇일까? 이런 사건이 있었다.

장난이 심한 아이가 가족과 함께 강가로 소풍을 나갔다. 소년은 강가에 도착하자마자 강물에 뛰어들었다. 그 때 어머니가 타일렀다. ‘깊이 들어가지 말고 놀아야 해!’ ‘걱정 마세요!’ 소년은 큰 목소리로 대답을 하고 다시 강물에서 놀기 시작했다. 그곳에는 다른 아이들도 있었기 때문에 소년은 송사리나 가재를 잡으며 그 아이들과 금방 친해졌다. 그런데 소년은 그런 놀이가 금방 시시해지기 시작했다. ‘우리 수영이나 할까?’

아이들도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다지 수영을 잘 하는 아이는 없었다. 가장자리에서만 물장구를 칠뿐이었다. 장난꾸러기 소년은 혼자서 조금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갔다. 장난꾸러기는 아이들과 어른들을 놀려줄 생각으로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그 때 갑자기 웅덩이가 나타나고 물살이 빨라져 도저히 솟구쳐 나올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아이들이 소리쳤다.

‘사람이 빠졌어요’ 놀란 부모는 물속으로 뛰어 들어가 살펴보았지만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근처에 있던 어른들도 함께 물속으로 들어가 소년을 찾았다. 얼마 후 한 어른이 소년을 가슴에 안고 나왔다. 소년의 몸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고, 얼굴은 시퍼렇게 변해 있었다. 숨을 쉴 리가 없었다. 소년의 부모는 그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안 돼! 애야, 눈을 떠봐! 응, 엄마야, 눈을 뜨라고!’ 소년의 어머니는 자신도 모르게 소년의 입술을 열고 자신의 입으로 숨을 불어넣었다. 사람들은 차마 이 광경을 바라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소년의 어머니가 너무 슬픈 나머지 미쳐버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소년의 아버지도 멍해진 상태로 그냥 바라만 볼뿐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정성을 다해 숨을 들이쉬고, 다시 그 숨을 아이에게 넣어주었다.

얼마나 반복했을까 소년이 몸을 부르르 떨더니 물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다시 숨을 쉬기 시작한 소년을 끌어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이 이야기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알려졌고, 훗날 물에 빠져 숨을 쉬지 못하는 사람들을 살리는 ‘Mouth to

mouth’ 방법으로 자리 잡았다. 철부지 어린이의 장난과 자식을 사랑하는 어머니의 사랑이 인공호흡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이 세상에서 부모가 자녀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많다. 그러나 그 많은 것들 중에서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닐까?

사람들은 나이가 많아지면 힘이 없어 아무것도 못할 존재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일하는 종류가 다를 뿐이지 노인의 지혜를 활용하면 훌륭한 일들이 이루어질 수 있다. 나이가 들면 다 철학자가 되고 고생을 경험한 사람들은 다 상담자가 된다. 인생은 두 번 사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패한 사람도 후배들에게 실패의 경험을 가르쳐 주어 실패의 반복을 하지 않게 지도하는 것도 인생선배로서의 큰일이다.

인간은 마지막 생명이 끝나는 시간까지 다 살았다고 말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열심히 할 일을 찾아 일 할 것밖에 없다. 인간이 다 살았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말이다.

그 이유는 인간의 생명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의 허락을 모독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을 주신이가 있는데 그분에게 물어보지도 않고 다 살았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어떤 이는 병원에서 이제 생명이 끝났다고 했는데 집으로 모셔와 보니 다시 생명을 연장한 이도 있다. 어떤 이는 생명이 끝났다고 했는데 다시 살아나서 천국을 보고 왔다고 간증하는 이도 있다. 어떤 이는 식물인간이라고 해서 목에 고무호스를 끼워 3년을 지났는데 생명을 다시 회복한 이도 있다.

이런 사건이 있었다. 부두 노동자로 야간 경비를 하는 성도가 있었다. 추운 겨울밤 지루한 야간에 평소 믿음을 중요시하게 생각지 않는 터이라 한잔 하고 싶었다. 소주병을 들고 안주로 할 것이 없나하고 살피던 중 낮에 한 동료가 낚시를 해서 복어를 잡아 줄에다 말려 놓은 것이 보였다. 그것을 가지고 들어와 난로에 구워 기분 좋게 마셨다. 몇 시간 후에 그는 복통을 일으켜 동료에 의해 병원으로 실려 갔다.

덜 씻은 복어의 독에 감염된 것이라고 했다. 위세척을 했는데도 너무 늦어 회복되지 않았다. 의사는 이제 가망이 없으니 집으로 옮길 준비를 하라고 제안했다. 사흘이 지난 뒤에 그 성도는 다시 회복했다. 자기발로 퇴원했다.

자기가 병원에 누워 몽롱한 가운데서도 의사의 말과 가족들의 말과 기도소리를 다 들었다고 말했다. 의식이 없으니 듣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하지 말고 생명이 끝나는 시간까지 열심히 말씀을 전해야 한다. 이 사람은 그 후 열심히 새벽기도에 빠지지 않았다. 죽을 준비를 단단히 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경우를 살펴볼 때 인간은 스스로 다 살았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마지막까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냐고 하나님께 물으면서 살아야 한다.

(글; 신동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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