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한 세상 살면서 다들 잘 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것이 여의치 않은 게 우리 삶의 조건이다.
태어난 이상 자립해야 하고, 그것을 위해 온갖 준비를 하여야 하는데 그것이 그리 녹록지 않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형상이란 도무지 공평하지 않다. 좋은 조건을 지닌 데다가 뭐든지 수월하게 풀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태어날 때부터 불리한 위치에 있을 뿐만 아니라 하는 일마다 어렵다. 이렇듯 사람은 다 다르다. 어떤 박복한 이는 척박한 환경도 모자라 불구의 몸으로 태어나기도 한다.
양호한 조건을 갖췄다고 다 행복한 것도 아니다. 이것을 가졌으면 저것을 가져야 하고, 그런 다음 또다시 위를 향해 부단히 애써야 하므로 우월한 위치에서 출발했어도 쉴 틈이 없다. 그렇게 살다 보면 세월이 후딱 흘러 어느새 늙고 병들어 여기저기 아프기 시작한다.
몇 해 전에 만난 어떤 부인은 자기 아들이 쟁쟁한 해외 명문대를 나왔는데, 이러한 그가 현재는 그저 대기업의 사원일 따름이란다. 뒷바라지하는 과정에서는 조선을 준다고 해도 바꾸지 않을 정도로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단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평범한 봉급쟁이라는 사실에 이게 뭔가 하는 심정이 들어 분통 터진다고 하였다.
그 부인의 말에 나는 잠시 주춤했다. 그 부인의 심정을 이해해주어야 할지, 삶은 원래 그런 거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과도하게 아들 뒷바라지에 열중한 탓이라고 해야 할지 얼른 판단이 서질 않아서였다. 잠시 후 대체 무엇 때문에 그 부인이 그토록 허탈해하는지 살펴보니, 다름 아니라 시기심 때문이었다. 자기는 아들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헌신했는데, 아들이 장가간 후에는 아내와 처가에 잘하는 게 도무지 소화되지 않았다. 다시 말해, 본가보다 어린 손녀를 돌봐주는 처가에 더 기우는가 싶어 그녀는 회한에 사로잡혔다.
그런데 얼마 전에 홀로 계신 노모를 부양하는 문제로 형제들 간에 갈등이 생겼다며 나를 찾아온 남자가 있었다. 그가 고민하는 문제를 다루기에 앞서 간략히 가족관계를 살피는 과정에서 그에게 다운증후군을 앓는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평생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아들을 키우느라 마음고생 했을 그에게 나는 이렇게 위로의 말을 건넸다.
“심적으로 매우 힘드셨겠네요.”
“그런 것 없습니다.”
위로의 말에 아무렇지도 않은 듯 호쾌하게 응답하는 그 남자. 평생토록 돌봐야 하는 아들을 키우면서 그렇게 거뜬하게 대꾸하는 것에 의아했던 나는 물었다.
“개의치 않는다는 말씀인데, 좀 더 상세하게 말씀해주시겠어요?”
“처음에는 아들이 시원찮다는 것을 알고 기가 막혔지만, 할 수 없는 일이잖아요. 아무리 봐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더라고요.”
여전히 그는 상큼하게 응수하면서 말을 이었다. 잘난 자녀를 키우는 게 훨씬 기분 좋고 신나겠지만, 잘났든 못났든 자기 앞에 던져진 생명체를 어쩌겠느냐며 감수하는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잘난 자녀도 장성하면 다들 자기 살기 바빠 남처럼 되어버리는데, 잘나나 못나나 별 차이가 없다고 여긴단다.
잘난 자녀도 독립하면 남처럼 된다는 대목에서 나는 몇 해 전에 만났던 그 부인을 떠올렸다. 잘난 아들도 다 크고 나니까 일개 봉급쟁이에 불과하다는 그녀의 말을 기억하며 나는 수긍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인제는 아들이 집안의 대를 잇는다는 의미가 퇴색한 세상이다. 그러다 보니 자녀는 분신이 아니라 자기를 의지해 태어난 타인일 따름이라는 인식이 확산해있다. 즉 자녀는 키우는 동안 온갖 맛을 느끼게 해주는 존재이지 그 이상의 의미가 아니란다. 이런 마당에 잘난 자식에 집착하고 시원치 않은 자식에 분노하거나 슬퍼하는 식의 차별을 부질없다고 여기는 그 남자, 시류에 맞는 사고를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대단한 경지에 오른 것 같기도 하여 나는 그를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그 남자가 돌아간 뒤 ‘차별하는 마음을 넘어서기 위해 나는 숱한 책과 씨름하였는데, 그는 다운증후군 아들을 키우면서 훌쩍 성장하였구나.’ 하고 생각했다. 아울러 이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더니, 정말 그렇다고 여겼다. 장애인 아들로 일찍이 고생한 덕분에 그는 다른 이들보다 집착하는 마음을 제법 털어낸 듯 보이니 말이다. 자식을 집착이나 성가심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는 그 수준이 어찌 대단하지 않은가.
대상이 어떠하든 개의치 않고 그저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기울인다는 것, 그런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성실하게 대상을 대하는 태도야말로 형상에 매이지 않고 본질을 대하는 초연한 자세가 아닐까 싶다.
장성숙/ 극동상담심리연구원, 현실역동상담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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