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온 날들을 가만히 짚어보는 일은, 인생이라는 긴 책의 책장을 뒤에서부터 거꾸로 넘겨보는 일과 닮아 있습니다. 그 속에는 숨 가쁘게 달려가던 젊은 날의 발자국도 있고, 세상의 거친 비바람을 온몸으로 받아내던 고단한 계절도 있었습니다. 그 시절 우리는 무언가를 더 채워야만 인생이 완성되는 줄 알았고, 더 높이 쌓아야만 행복에 닿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라는 맑은 거울 앞에 서고 보니, 인생의 참된 아름다움은 채움이 아니라 비움에 있었습니다. 불필요한 욕심과 집착을 덜어내고 난 마음의 넉넉한 빈터에, 비로소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지혜와 인생을 넓게 바라보는 혜안이 내려앉기 시작했습니다. 다 늙어서야 겨우 삶의 여백이 주는 평온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 비어낸 마당에 끝까지 남는 가장 소중한 풍경은 바로 내 곁을 지켜준 사람입니다. 돌이켜보면 낯선 이국땅에 처음 자리를 잡던 순간부터, 반세기가 넘는 기나긴 세월을 필라델피아의 바람 속에서 함께 늙어온 동갑내기 아내가 있었습니다. 아들 둘을 훌륭한 사회인으로 뿌리내리게 한 일등공신도, 내가 휘청일 때마다 묵묵히 버팀목이 되어준 사람도 나의 아내였습니다.
모진 풍파를 함께 견뎌낸 두 그루의 나무처럼, 이제 우리는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서로를 지탱하는 깊은 뿌리가 되었습니다. 주름진 손을 꼭 쥐며 "참 잘 걸어왔다"고, "건강하게 곁에 있어 주어 고맙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귀한 훈장이 어디 있겠습니까.
더 이상 새로 이사 갈 곳을 찾지 않고, 익숙한 이 집에서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아내의 곁을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을 먹습니다. 인생의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지금, 우리의 시간은 좁은 샛문으로 흘러가고 있지만 그 문 너머로 비쳐오는 저녁노을은 그 어느 때보다 따스하고 넉넉합니다. 내 마음의 빈터는 이제 아내를 향한 고마움과 사랑으로, 가장 담백하고도 충만하게 채워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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