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1일 토요일

아버지와 아들의 너무나도 다른 인생길

 아버지와 아들의 너무나도 다른 인생길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일은 명성황후가 일본의 낭인(무뢰배)에게 시해된 일이다.

명성황후가 시해되던 날
일본 낭인과 일본공사 미우라에게 길 안내를 한 사람은 조선인 우범선이다.
그는 당시 별기군 대대장 이었는데
황궁을 지켜야 했던 군인이 오히려 적의 앞잡이 노릇을 했다.
이 일로 보복을 두려워한 그는
일본으로 망명해 일본여자와 결혼을 하고 아들을 낳는다.



그러나 우범선은 아들이 여섯 살 되던 해
조선인 자객에게 피살된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그의 아들은 고된
생활 속에서도 일본인어머니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농림성에 취직을 한다.
그러나 창씨 개명과 일본 국적 취득을 반대하다 결국 사표를 내고
도키이 종묘회사의 농장장으로 직장을 옮긴다.

해방 뒤 일본에서 채소나 과일의 종자를 수입했던 우리나라는 우범선의 아들이 육종학(종자개발) 전문가 임을 알고 그의 귀국을 적극적으로 추진한다.
그는 처자식 및 어머니와
생이별을 하고 홀로 귀국해 한국 농업과학 연구소 소장에 취임한다.
그 뒤 제주도 감귤, 강원도 감자, 병충해에 강한 무와 배추의 종자를 개발해 한국 농업의 근대화에 커다란 업적을 남긴다.
그러자
정부에서 그에게 농림부 장관직을 제안했으나 거절하고 종자개발에만 헌신했다.
농업 근대화의 뛰어난 공적을 인정받은 그는 1959년 대한민국 문화포장을 받는다.
그가 다름아닌 씨없는 수박으로 잘 알려진 우장춘 박사다.

 父子의 삶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역사적 아이러니이다.

우장춘 [  ] 

 

아버지는 조선 말기의 무신 우범선()이며, 어머니는 일본인이다.

그는 일본에서 출생하여 극심한 빈곤과 주위의 학대 속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히로시마[]에서 마치고, 1916년 도쿄제국대학실과[: 전문대학]에 들어가 1919년 졸업과 동시에 일본 농림성 농업시험장에 취직하여 1937년 퇴직할 때까지 18년간 육종연구에 몰두하였다.

 1936년 동경제국대학에서 농학박사학위를 받았으나 한국인이라는 것과 정규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승진이 되지 않다가, 퇴임 직전에 기사()로 승진하면서 퇴임하였다. 그는 1950년 정부의 초청으로 귀국하여, 사망하던 1959년까지 만 9년 5개월간 한국농업과학연구소장·중앙원예기술원장·원예시험장장을 역임하였다.

연구 업적은 1926년「종자()로써 감별할 수 있는 나팔꽃 품종의 특성에 대하여」를 비롯하여 모두 19편의 논문이 있는데, 초기에는 나팔꽃이나 피튜니아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다가 드디어 겹꽃이 피는 피튜니아 계통을 육성해 냈다.

그는 이어서 유채()의 유전과 육종연구에 들어가 1931년「유채품종의 특성조사」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논문을 발표하던 중 1935년 십자화과속의 식물에 관한 게놈분석을 시도한 박사학위 논문을 발표하여 연구의 절정을 이루었다.

이 논문의 중요성은 현존종()을 재료로 하여 또 다른 종을 실험적으로 합성해 냈다는 데 있다. 이것을 ‘종의 합성’이라고 하며, 세계적으로 이 방면 연구의 새 길을 터놓은 것이다. 즉, 염색체 수 10개의 일본 재래종 유채와 염색체 9개의 양배추를 교배해서 염색체 19개의 고유 유채를 만들어 우리의 주위에 이러한 종간잡종()이 있음을 밝힌 것이다.

또, 이 연구에서 학리적으로 밝힌 점은 다윈의 진화론에 나오는 “종은 자연도태의 결과로 성립된다.”는 설에 수정과 보충을 가한 것이다. 즉, 종은 기존의 종간 교잡으로 새로운 종을 낳고 이것은 그들이 지니고 있는 세포 내 염색체의 배가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1945년에 발표된 「채소의 육종기술」은 그의 오랜 연구와 경험을 체계적으로 확립한 결론이며, 이 논문에서 말한 예언이 현재 성공적으로 대부분 실용화되고 있다.

그는 1950년 정부 초청으로 귀국한 뒤 그의 지식을 바탕으로 그때까지만 해도 거의 일본에 의존하던 채소 종자를 국내에서 완전히 자급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우리나라 육종학도와 종묘기술자를 양성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그의 국내 업적으로 큰 것을 들면, 채소 종자의 국내 자급 해결 외에 무균종서() 생산으로 6·25전쟁 이후의 식량난을 해결하는 데 크게 기여한 것이다. 사망 전에는 「수도이기작()에 관한 연구」를 통하여 세상의 이목을 끌기도 하였다.

 그가 1959년 8월 11일 사망하자 정부는 부산시문화상에 이어 두번째의 문화포장을 수여하였고, 전국민의 애도 속에 윤일선()을 위원장으로 하는 사회장으로 치렀다. 유해는 수원시에 소재했던 구 농촌진흥청 구내의 여기산()에 안장하였다. 매년 8월 10일이면 그가 양성한 제자들과 전국의 원예인들이 모여 그를 추모하는 행사를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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