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9월 13일 일요일

노력으로 개척하는 삶의 운명



 우리 인생에는 ‘운명’이라는 놈도 존재합니다. 하지만 저는 ‘노력’으로 개척할 수 있는 ‘가능성의 영역’이 훨씬 크다고 믿습니다. ‘약자는 운명의 철학에 기울고, 강자는 노력의 철학을 신봉한다’라는 말처럼, 노년의 자기 앞가림은 부단한 노력으로 얻을 수 있음을 !!

여든의 텃밭 — 운명이 아니라 노력이 가꾸는 하루

 씨앗과 밭

사람들은 흔히 인생을 큰 나무에 비유한다. 뿌리가 깊으면 태풍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그 말은 맞다. 하지만 나는 인생을 나무보다는 텃밭에 비유하고 싶다. 나무는 한 번 뿌리를 내리면 스스로 자라지만, 텃밭은 매일 손이 가야 한다. 물을 주지 않으면 마르고, 김을 매지 않으면 잡초가 뒤덮는다. 운명이 그 밭이 놓인 땅이라면, 노력은 매일 아침 그 밭에 나가 손을 놀리는 일이다. 땅을 고를 수는 없어도, 그 땅에서 무엇을 얼마나 거둘지는 결국 손에 달려 있다.

 몸이라는 텃밭

여든이 넘으면 몸은 더 이상 젊은 시절의 그 몸이 아니다. 관절은 삐걱거리고, 어제 멀쩡했던 다리가 오늘은 뻣뻣하다. 이것을 두고 "이미 기울어진 운명"이라 한탄하며 자리에 눕는 사람이 있고, "그래도 오늘 걸을 수 있는 만큼은 걷자"며 지팡이를 짚고 나서는 사람이 있다. 둘의 차이는 체력의 차이가 아니라 태도의 차이다.

실제로 노년의 건강은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사소한 반복에서 갈린다. 하루 20분의 산책, 짜지 않게 먹는 국 한 그릇, 밤 8-9시면 불을 끄는 습관. 이런 것들은 눈에 띄지 않지만, 10년이 쌓이면 완전히 다른 몸을 만든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약자는 운명에 기대고, 강자는 노력을 믿는다"는 말의 가장 구체적인 증거라고 생각한다. 유전자와 세월이라는 운명은 누구에게나 공평하지 않지만, 그 운명 위에서 얼마나 성실히 몸을 돌보느냐는 전적으로 각자의 몫이다.

관계라는 텃밭

관계도 마찬가지다. 나이가 들수록 곁에 남는 사람이 줄어드는 것을 두고 "다 그런 것"이라 체념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실은 관계도 손이 가야 유지되는 텃밭이다. 안부 전화 한 통, 먼저 건네는 밥 한 끼, 서운했던 일을 먼저 풀어놓는 용기. 이런 작은 노력들을 게을리하면서 "사람이 다 떠난다"고 말하는 것은, 물을 주지 않고 나무가 시들었다고 탓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물론 모든 관계에 똑같이 정성을 쏟을 수는 없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 이미 마음을 정한 사람에게까지 애쓰는 것은 낭비다. 하지만 아끼는 사람, 오래 곁에 두고 싶은 사람에게는 늙어갈수록 오히려 더 부지런히 손을 놀려야 한다. 노년의 외로움은 운명이 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밭을 얼마나 부지런히 돌보았는가로 정해지는 경우가 훨씬 많다. 돈이라는 텃밭

경제적인 안정 역시 다르지 않다. 노년에 돈 걱정 없이 산다는 것은 운이 좋아서가 아니라, 젊어서부터 씨를 뿌린 사람이 거두는 결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크게 벌지 못했더라도 꾸준히 아끼고 모은 사람과, 벌이가 좋았어도 헤프게 쓴 사람의 노년은 완전히 다르다. "나는 운이 없어서 가난하다"는 말 뒤에는, 아까운 순간에 아끼지 못했던 무수한 선택들이 숨어 있을 때가 많다.

 오늘도 밭에 나간다

운명이라는 밭의 위치는 우리가 고를 수 없다. 어떤 부모 밑에서 태어났는지, 어떤 몸을 타고났는지, 세상이 언제 어떤 풍파를 몰고 올지는 우리 손을 벗어난 일이다. 하지만 그 밭에서 잡초를 뽑을지 그냥 둘지, 물을 줄지 말지는 언제나 우리 손에 달려 있다.

나는 여든이 넘은 지금도 매일 아침 그 밭에 나간다. 몸을 움직이고, 사람에게 안부를 묻고, 돈을 아끼고, 책을 펼친다.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그저 하루치의 작은 노력이다. 그러나 이런 하루하루가 쌓여 결국 "노년을 어떻게 살아냈는가"를 결정한다는 것을, 나는 지나온 세월을 통해 스스로 깨달았다. 약자는 밭의 위치를 탓하며 주저앉고, 강자는 오늘도 그 밭에 나가 손을 놀린다. 나는 후자로 남은 날들을 살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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