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76이고 나는 80입니다.
지금은 아침저녁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지만속으로 다투기도 많이 다툰 사이입니다.
요즘은 망각을 경쟁하듯 합니다.
나는 창문을 열러 갔다가 창문 앞에 우두커니 서있고,
아내는 냉장고 문을 열고서 우두커니 서 있습니다.
누구 기억이 일찍 들어오나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은 서서히 우리 둘을 떠나고, 마지막에는 내가 그의 남편인 줄 모르고,
그가 내 아내인 줄 모르는 날도 올 것입니다.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그것을 무어라고 하겠습니까. 인생? 철학 종교?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
나이가 든다는 것은 단순히 몸이 늙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 몸의 주인이라고 믿어왔던 기억이 하나둘씩 나를 빠져나가는 과정을 조용히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어느 날은 문득, 내가 누군지도 모르게 되는 순간이 올 수 있다는 사실이 가슴 깊은 곳을 서늘하게 스치고 지나갑니다. 그 서늘함은 바람처럼 스쳐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오래 머물며 삶의 무게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깊은 울림입니다.
🌫️ 기억이 빠져나가는 순간의 막막함
창문을 열려고 걸음을 옮겼다가 그새 왜 그곳으로 갔는지 잊어버리고 창문 앞에 멍하니 서 있는 나.
아내는 무엇을 꺼내려고 냉장고 문을 열어놓은 채 그 앞에서 한참을 서 있다가 자신이 무엇을 하려 했는지 기억나지 않아 작게 한숨을 내쉬는 모습.
그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앞이 막막해지고 가슴이 울컥해집니다.
젊은 날에는 이런 순간이 올 거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기억은 늘 나의 편이었고, 나를 지탱해주는 든든한 기둥이었습니다. 하지만 황혼의 나이에는 그 기둥이 서서히 부서지는 소리가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들려옵니다.
🌫️ 시인은 이 참담함을 차분하게 정리한다
시인은 말합니다. 우리의 삶이란 결국,
“서로 모르는 사이가 서로 알아가며 살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이 얼마나 담담하면서도 얼마나 가슴을 저미는 말인지요.
젊은 날에는 서로를 알아가기 위해 애쓰며 살았고, 중년에는 서로를 지키기 위해 애쓰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황혼의 나이에는 서로를 잊지 않기 위해 애쓰며 살아갑니다.
아내가 나를 잊을까 두렵고, 내가 아내를 잊을까 두렵습니다. 서로의 이름을 부르던 목소리가 어느 날 낯설게 들릴까 봐 가슴이 조용히 떨립니다.
🌫️ 진리는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시인은 또 우리를 나무라듯 말합니다.
“진리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는데 우린 너무 먼 데서 살았습니다.”
이 말은 황혼의 마음에 유난히 깊게 박힙니다.
우리는 너무 먼 곳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성공, 명예, 인정, 남들의 시선, 끝없이 높아지는 기준들.
그 모든 허상들을 붙잡느라 정작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사람,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마음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채 세월을 흘려보냈습니다.
이제야 깨닫습니다. 진리는 멀리 있지 않았다는 것을. 내 곁에서 숨 쉬고 있던 사람, 내 곁에서 웃고 울던 사람, 그 사람이 바로 진리였다는 것을.
🌤️ ‘아내와 나 사이’라는 거리
이제는 압니다. ‘아내와 나 사이’라는 거리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라는 것을.
젊은 날에는 그 거리가 멀어지는 줄도 모르고 각자의 삶을 살아내느라 바빴습니다.
중년에는 그 거리를 좁히려고 애쓰면서도 서로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황혼의 나이에는 그 거리가 조금이라도 멀어질까 두려워 서로의 기억을 붙잡아주며 살아갑니다.
아내가 냉장고 앞에서 멈춰 서 있을 때, 나는 조용히 다가가 “당신, 물 꺼내려 했지요.” 하고 말해줄 것이고,
내가 창문 앞에서 멍하니 서 있을 때, 아내는 내 손을 잡고 “여보, 바람 쐬려고 했잖아요.” 하고 말해줄 것입니다.
그렇게 서로의 기억을 붙잡아주며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세월 속에서도 끝까지 서로를 잊지 않으려 애쓰는 것.
그것이 황혼의 사랑이고, 황혼의 삶이며, 황혼의 품위입니다.
🌇 황혼의 노을 아래에서
황혼의 노을은 젊은 날의 노을과 다르게 보입니다. 그 빛은 더 느리고, 더 깊고, 더 따뜻합니다.
노을 아래에서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다시 부르고, 서로의 손을 다시 잡습니다.
기억이 흐려지는 세월 속에서도 손의 온기만큼은 잊지 않으려 애쓰며 오늘 하루를 살아냅니다.
그리고 조용히 깨닫습니다.
삶은 결국 서로 알아가다가 다시 모르는 사이로 돌아가는 여정일지라도,
그 여정 속에서 서로의 손을 잡아주던 순간만큼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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