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가 넘는 시간입니다. 눈을 감으면 50여 년 전, 낯선 공기와 서툰 언어 속에서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 했던 그 젊은 날의 이방인이 보입니다. 삶의 뿌리를 낯선 땅에 다시 내린다는 것은 끊임없는 긴장과 도전의 연속이었습니다. 남들보다 뒤처지지 않으려, 소중한 가정을 지키고 자식들을 어엿한 사회의 일원으로 키워내려 참으로 치열하게 발걸음을 재촉했던 세월이었습니다.
그렇게 숨 가쁘게 달려온 길 끝에, 마침내 황혼(黃昏)의 문턱에 섰습니다.
황혼은 태양이 빛을 잃어가는 시간이 아니라, 하루 중 가장 붉고 찬란한 빛을 세상에 뿌리는 시간입니다. 격정적인 낮의 열기가 가라앉은 지금에야 비로소 보이는 현실이 있습니다. 그토록 움켜쥐려 했던 세상의 명예나 물질, 복잡한 인간관계의 소음들은 저녁노을 속으로 담담히 흩어지고, 결국 내 곁에 남은 것은 가장 본질적이고 순수한 것들뿐입니다.
반세기를 미운 정 고운 정으로 함께 버텨내며 깊은 온기를 나누는 동반자의 눈빛, 제 몫을 다하며 든든하게 뿌리내린 자식들의 안녕, 그리고 무엇보다 내 안의 소란을 잠재우고 찾아온 마음의 평온과 여백. 이것이 50년 미국 생활이 내게 남겨준 가장 값진 훈장입니다.
젊은 날에는 채우지 못해 조급했다면, 지금은 비워낼 수 있어 자유롭습니다. 불필요한 집착과 욕심을 털어낸 자리에 비로소 나만의 보폭과 온전한 평화가 들어앉았습니다. 이제는 세상의 속도에 맞출 필요도 없고, 누군가에게 증명해 보일 필요도 없습니다.
50년이 넘는 긴 여정 동안 묵묵히 나만의 길을 걸어왔듯, 남은 길 역시 서두름 없이 내 속도대로 걸어가려 합니다. 치열했던 삶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 황혼의 빛처럼, 오늘도 내게 주어진 이 고요한 여백을 감사히 누리며 꼿꼿하고 아름답게 걸어가겠습니다.
주님, 50년 넘는 이민의 삶을 은혜로 인도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세상의 욕심과 소음을 비워내고, 주님이 주신 마음의 여백과 평온을 누리게 하소서.
평생을 동행해 준 아내와 든든하게 자라준 자식들에게 평안을 주시고, 남은 길도 조급함 없이, 나만의 보폭으로 묵묵히 걸어갈 건강과 지혜를 주소서.
마지막까지 꼿꼿하고 아름답게 걸어가도록 인도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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