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14일 일요일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글쓴이

엔도 슈사쿠 遠藤周作

그는 1923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으며, 1935년 세례를 받았다. 1950년 6월 일본 전후 첫 프랑스 유학생으로, 리옹 대학에 입학해 프랑스 가톨릭 문학을 공부했다. 1955년 발표한 <백색인>으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고, <바다와 독약>으로 신초사 문학상과 마이니치출판문화상을 수상했다. 1966년 <침묵>으로 다니자키준이치로상을 수상했다. 엔도 슈사쿠는 일본의 대표적인 가톨릭 문학 작가로서 평생 동안 신과 구원이라는 문제에 천착했다.

재미없는 성경을 한 번 더 읽는 방법

 

Q. 성경을 읽으려고 펼쳤지만, 정말 재미가 없습니다. 그 재미없는 책을 어떻게 읽었습니까? 성경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문제없이 읽는다 해도 재미는 없겠지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이라는 것이 예수님의 생애를 있는 그대로 충실하게 쓴 책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쓴 것이라고 할지라도 성경은 ‘문학’이기도 합니다. 즉 현실의 소재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쓰는 사람의 이념에 의해 감쪽같이 변화될 수 있는 것을 문학이라고 한다면, 초대 그리스도교 저자들에 의하여 어떤 의미에서 소재를 변용시켜 창작한 것이 성경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학생 시절 나도 성경을 읽으면서 재미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성경이 재미없는 이유가 예수님을 중심으로 읽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수님을 둘러싼 사람을 중심으로 읽어 보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 달라붙어 ‘선생님과 함께 죽겠습니다.’ 라고 말했던 제자들도 최후에 로마군이 왔을 때는 거미 새끼가 흩어지듯 사방으로 달아났습니다. 제자 중의 우두머리인 베드로마저도 예수님의 예언대로 닭이 울기 전 세 번이나 ‘나는 그런 사람(예수님) 모른다.’ 고 말했지요. ‘아, 이 정도라면 나와 별로 다를 게 없지 않은가!’ 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이때의 베드로에게서 나 자신을 본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분명히 말해서 예수님의 사도들은 모두 유다였습니다. 성경에는 유다만 배신자로 되어 있지만 모두 유다와 같은 점이 있었습니다.

복음서가 쓰인 순서는 마르코 복음서가 제일 오래 되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마태오, 루카 순입니다. 시대가 내려갈수록 예루살렘 그리스도교의 중심인물이던 베드로의 배신은 점점 희석되고 있습니다. 즉 수정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읽다 보면 상당한 재미가 느껴집니다. 제일 오래된 마르코 복음서에는 예수님을 배신한 것이 분명히 쓰여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점점 약해지고 있습니다. 어쨌든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신한 것은 확실한 사실입니다. 배신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후 초대 교회를 세우고 마지막에는 모두 순교합니다. 이와 같이 그분을 배신할 정도의 겁쟁이들이 어떻게 용감한 인간이 되었을까요? 용감한 인간이라는 말이 좀 이상하지만, 비유를 굳이 사용한다면 겁쟁이가 어떻게 용감한 인간으로 바뀌었는가 하는 것이 내게는 성경에서 재미있는 부분이었습니다. 약한 인간 인간을 강한 인간으로 변화시키는 그 무엇 X, 무엇인가가 거기에 작용했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읽다 보니 ‘글쎄?’ 하는 하나의 분명한 주제 theme 가 발생했습니다.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겁쟁이가 용감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문제가 말입니다.

이와 같이 나는 스스로를 그들과 겹쳐 봄으로써 성경을 일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성경에 커다란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성경은 있는 그대로 예수님의 생애를 묘사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뒤 그분의 말씀에 대한 전승 傳承 을 담당한 공동체 共同體 가 있었습니다. 거기에 예수님의 말을 수집한 ‘예수 어록’ 語錄 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었던 듯합니다. 이 예수 어록(학자들은 이것을 Q라고 합니다)과 전승을 조합하고 여기에 그 공동체의 신앙 이념을 투입하여 쓴 것이 마르코 복음입니다. 마르코 복음을 참고로 하면서 Q 자료와 그밖에 따로 있었던 M 자료를 참조하여 역시 자기 공동체의 신앙 이념으로 쓴 것이 루카 복음과 마태오 복음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성경에 진짜로 예수님의 생애와 말씀이 반드시 그대로 쓰여 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즉 초대 교회의 공통된 기원을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집어넣고 있는 것입니다. 근대에 들어와서 예수님의 진짜 말씀이나 행동은 어떤 것이었을까 하는 신약 新約 성경 연구가 실시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아람어를 사용했습니다. 우리 손에 들어온 최초의 성경은 그리스어로 된 번역판이었으므로 그 중에서 아람어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것을 끄집어내고, 또한 문맥 등에서 그것이 예수 어록에 있던 것이겠지 또는 이 부분은 예수님을 구세주로 신격화하고 있으니 초대 교회의 이념에 의하여 쓰인 것이겠지 하는 식으로 분석했습니다. 이런 작업에서 학자들은 초대 교회의 이념을 발견하고, 또한 배후에 있는 예수님의 진짜 생각을 알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도 추정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했으며, 더 분명히 말해 그들의 시점에서 성경을 재해석하고 있는 것이므로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신약 성경에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탄생했다고 쓰여 있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메시아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고 쓰여 있으므로 예수님의 탄생지를 베들레헴으로 가져온 것은 아닐까 하는 식으로 생각하고 해부해 나가면서 학자들은 진짜를 찾아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지 않았다는 확증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12월 25일에 탄생했는지 아닌지도 알 수 없습니다. 오랫동안 12월설, 3월설, 또는 8월설까지 있었습니다.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이 나자렛에서 자랐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나자렛 예수님의 아버지인 요셉은 전국을 여행하며 떠도는 순회 巡廻 노동자였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예수님에게 형제가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가톨릭에서는 성경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형제는 사촌이었다고 합니다. ‘마리아는 동정녀’ 라는 동정녀 잉태설을 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신교에서는 형제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사촌까지도 전부 형제라고 부르기 때문에 어느 쪽도 틀리지는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추리 소설같이 성경을 읽는 것에서 출발하면 흥미가 배가 됩니다. 그러나 그러기 위해서 현대 성서학자가 쓴 책을 상당량 읽지 않으면 안 되겠지요?

 

 

 

나 개인의 성경읽기

 

성경에는 그리스도가 곧 죽는다고 몇 번이나 예고하고 예고대로 되었는데도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라는 말이 왜 나왔는지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실제적인 생애를 써 놓은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초대 교회의 사고방식을 투영(이를 케리그마 Kerygma, 즉 신앙 고백이라고 합니다) 한 신앙 고백을 쓴 것으로 창작이라고 생각해도 좋은 정도입니다.

예수님의 수난 예고가 과연 있었는지 없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어쩌면 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지 않고 돌아가신 것일지도 모릅니다. 알면서 돌아가셨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을 제자에게 과연 알렸었는지 어쨌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예고해 놓고 나중에 왜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라고 했는가 묻는다면 나는 곤란해집니다.

옛날 일부 성직자들 중에는 이것을 억지로 짜 맞추듯이 설명하는 신부도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도무지 납득할 수 없어서 교회를 떠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나는 ‘모릅니다.’ 라고 답할 수밖에 없습니다. 당시 내가 그곳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예수님의 진짜 심리를 알 수도 없습니다.

더욱이 마르코 복음, 마태오 복음, 루카 복음에 전부 똑같이 이야기가 쓰여 있다면 모를까, 같은 이야기인데도 서로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 수난의 날은 날짜마저도 서로 다릅니다. 또한 요한 복음에는 앞의 세 복음에 나와 있지도 않은 내용이 불쑥불쑥 나오기도 합니다. 어는 것이 진짜 정확한 것인지조차 알지 못한다는 것은 이용한 자료가 공통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있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초대 그리스도 교회는 갈릴래아 파 라든가 예루살렘 파 라든가 기타 셀 수 없이 많은 그룹이 있었고, 이들 각각은 자신들의 신앙 고백을 예수님 상 像 에 반영시켰다고 합니다.  마르코 복음은 갈릴래아 파 신앙의 반영입니다. 또한 예루살렘 파가 있었으며, 이들의 신앙은 루카 복음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성서학의 발전과 함께 정확한 예수님 전 傳 은 점점 더 쓰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너무 놀랐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이것이 진짜라고 생각해 왔던 예수님을 다시 생각해야 했으니까요.

아카이와 사카에 라고 하는 유명한 목사는 시나 린조(1911~1973 소설가)에게 세례를 주었던 분입니다. 아카이와 목사는 이와 같은 근대의 성경 연구를 알게 된 후 <그리스도교 탈출기> 라는 책을 쓰고는 그리스도교를 버렸습니다. 그 정도로 충격이 컸던 것입니다. 내가 그러한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소설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Q. 성경이 예수님의 생애나 말씀을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그 충격을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지금 말한 대로 그것은 내가 소설가였기 때문입니다. 소설가로서 나는 실재의 사실을 사용하여 사실을 초월 超越 하는 세계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초월하는 세계는 인간에게 사실보다 더 진실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확신을 갖지 못했다면 작가일 수 없었겠지요. 성경을 읽었을 때도 그와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19세기 이후의 성서학자들의 노력에 의하여 우리는 성경이 반드시 사실 그대로인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대로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은 내 소설과 같이 성경 저자들 (마르코, 마태오, 루카, 요한) 이 자기들의 신앙 이념에 근거하여 사실을 재구성한 것이고, 사실이 아닐지라도 인간들의 꿈을 불어넣어 (그들이 수집하여 성경에 삽입한 예수님 전승은 사람들의 기원이나 꿈이기도 했다고 생각되므로) 사실들을 나열한 것 이상으로 생명을 불어넣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나는 그 불어넣은 생명에 소설가로서 흥미를 가졌던 것입니다.

 

 

 

Q.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구체적으로 말입니까? 예를 들어 예수님이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12월 25일에 태어났는지 아닌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많은 성서학자들은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했지요. 유다인들은 구세주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는 전설을 오랫동안 믿어 왔으며, 그것이 구약에 쓰여 있으니까 그것을 신약 성경에 사용했으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 설을 인정함과 동시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탄생시키고자 원했던 그 기원 쪽에 보다 무게를 둡니다. 예수님 탄생의 바람직한 이미지라고 할까? 예수님 탄생일에는 정설이 없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겨울로 정했습니다. 성탄절의 이미지는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성탄절 이미지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 구세주가 마구간에서 말똥으로 더러워진 장소에서 탄생했다는 이미지입니다. 그것은 인간에게 ‘자기 마음속 마구간처럼 더러운 장소에서 예수님을 찾았다’는 내밀한 우리 욕망의 표현이지 않을까요? 우리 마음속 마구간과 같이 더러운 장소, 그것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아뢰야식이 아닐까요? 아뢰야식은 꺼림칙한 우리 욕망이 가득 차 있으며 말똥으로 더럽혀진 냄새 가득한 무명 無明 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곳에서 순진한 어린아이가 태어난다고, 예수님이 태어난다고, 그리고 그 냄새 나는 무명의 장소를 정화해 준다는 바람이 성탄절 전설을 만들어 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이미지는 성탄절을 눈 내리는 12월 25일로 한 것입니다. 눈은 더럽혀진 것을 순화시키고 순백으로 만듭니다.

그런 생각들에 이르면, 나는 왜 사람들이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예수님 탄생시킨 이야기를 만들어 냈는지 절실하게 알게 됩니다. 그것은 인간 영혼의 염원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영혼의 염원을 나타내는 동시에 사실을 기록하는 것보다 더욱 인간적인 진실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믿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안다는 것과 다르지요. 소설가로서 나는 그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때문에 아카이와 처럼 그리스도교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 역시 위기는 있었지요. 그 위기는 <사해 부근에서> 라는 내 소설에 농도 짙게 배어 나왔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생애>와 <그리스도의 탄생> 을 쓰면서 겨우 그 위기를 넘길 수 있었습니다.

 

 

 

Q. <예수의 생애>는 일본적 종교 감각이랄 지 정토진종 淨土眞宗 적이랄 지 예수님을 왜곡했다는 비평이 있는데 그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합니까?

 

그런 질문을 반드시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나의 예수님 상은 내가 생각하는 일본적 종교 의식(서구의 부성적 종교의식과는 다른 모성적 종교 의식) 으로 포착한 예수님 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진짜 예수님을 왜곡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요. 그럼 진짜 예수님 상을 어떻게 붙들 수 있을까요. 전에 말씀 드린 대로 현대의 신약 성서학에서는 많은 연구 결과, 성경에는 있는 그대로의 예수님 상이 쓰여 있지 않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초대 교회에도 각 그룹에 따라 각각의 예수님 상과 예수론이 존재했었다는 사실이 최근에 판명되었습니다. 각 그룹은 각각의 신앙 형태로 예수님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고, 그것이 마르코 복음이나 요한 복음이 된 갓이라는 사실은 이미 말씀 드렸습니다.

형대에도 여러 가지 예수론이 나오고 있습니다. 최근의 성서학을 근간으로 일본에서도 야기 세이이치 나 아라이 사사구, 다가와 겐조 등의 뛰어난 학자들도 예수론을 섰습니다. 아마 그분들도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예수님 상’ 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분들 역시 자신의 마음의 문제에 예수님을 끌어 붙여서 예수님 상을 만들어 놓았다는 점에서는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점에 있어서 나의 경우도 같습니다. 야기는 에고이즘을 버린 통합 의 장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했습니다. 아라이 는 트로크메 E. Trocme나 타이센 G. Theissen 등과 같이 문화 사회학 연구를 거쳐 예수님을 당신의 유다교가 돌보지 않은 사람들을 구원하고자 했던 해방론자였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작가인 나는 작가로서의 문제로 예수님 상을 그렸습니다. 작가로서의 나의 문제의식이 일본인의 종교 의식으로 예수님을 포착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생각하기 위하여 일본인 소설가인 내가 당연히 하지 않으면 안 될 내 개인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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