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6월 2일 화요일

삶이라는 도화지에 잔잔하게 번지는 색

 삶을 어떤 색깔로 채색하느냐 하는 건 다름 아니라 마음먹기에 달여있다는 말이 있다. 이런 말을 수도 없이 들어왔기에 전혀 낯설지 않다. 하지만 그 의미를 머리로나 알지, 실제 자신의 생활에 연결하지를 못하는 게 우리 중생이 아닐까 싶다.

삶이라는 도화지에 잔잔하게 번지는 색

삶을 어떤 색깔로 채색하느냐는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해묵은 격언 앞에서, 우리는 자주 작아진다. 동서고금의 현인들이 남긴 이 말은 서점의 베스트셀러 가판대에서, 혹은 SNS의 짤막한 글귀 속에서 끊임없이 변주되며 우리를 찾아온다. 머리로는 백번 천번 공감한다. 긍정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회색빛 도심도 활기찬 은빛으로 변할 것이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면 척박한 일상도 따스한 황금빛으로 물들 것이라는 그 자명한 이치를 모르는 이는 없다.

하지만 방문을 열고 차가운 현실의 공기와 마주하는 순간, 그 찬란했던 명제는 연기처럼 흩어진다. 당장 눈앞에 닥친 피로와 걱정,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자연스레 찾아오는 몸의 무게는 마음이라는 붓을 쥘 힘조차 앗아가기 일쑤다. 결국 "알면서도 못 하는 게 인간"이라는 자조 섞인 한숨과 함께, 우리는 다시 타성이 만들어놓은 무채색의 하루를 살아간다. 진리를 머리로만 알고 삶으로 번역해내지 못하는 이 괴리야말로, 어쩌면 우리 '중생(衆生)'들이 평생 안고 가는 숙명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왜 우리는 이 단순한 연결에 늘 실패하는 걸까. 그것은 아마도 '마음먹기'라는 행위를 너무 거창하고 무겁게 받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삶이라는 거대한 캔버스를 단숨에 멋진 수채화나 웅장한 유화로 바꾸려 하니, 첫 붓을 대기도 전에 겁부터 나는 것이다.

그러나 대가들의 걸작도 결국은 작은 선 하나, 점 하나에서 시작된다. 평생의 삶을 채색하겠다는 장엄한 결심 대신, 아주 작고 구체적인 순간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어떨까. 예컨대 '오늘 하루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겠다'가 아니라, '지금 마시는 차 한 잔의 온기를 온전히 음미하겠다'는 다짐 같은 것 말이다. 발걸음을 옮길 때 발바닥에 닿는 대지의 감각에 집중하고, 창가로 스며드는 오후의 햇살을 가만히 바라보는 그 짧은 찰나야말로 우리가 실제로 다룰 수 있는 가장 알맞은 크기의 도화지다.

더불어, 무언가를 자꾸 칠해서 채우려고만 하는 욕심을 내려놓는 것도 방법이다. 온갖 감정과 걱정, 소유하고 싶은 욕망을 캔버스 위에 덧칠하다 보면 색들은 서로 엉겨 붙어 결국 탁하고 어두운 회색이 되어버린다. 진정한 채색은 때로 '비움'에서 시작된다. 마음의 방을 서서히 비워내고 여백을 만들어낼 때, 역설적이게도 내가 본래 가지고 있던 가장 순수하고 단단한 본연의 색깔이 그 틈새로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머리로 아는 지식을 삶의 실천으로 이어주는 가장 정직한 매개체는 결국 '몸의 움직임'이다. 거창한 깨달음을 기다리기보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밖으로 나가 발을 내딛고, 매일 같은 시간에 책을 펼치거나 사색하는 구체적인 루틴들이 쌓일 때, 비로소 관념은 현실의 색채가 된다. 단단하게 다져진 일상의 걸음걸이가 곧 마음의 흔들림을 잡아주는 훌륭한 지탱점이 되어주는 셈이다.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가혹하게 몰아세울 필요는 없다. 완벽하게 삶을 통제할 수 없다는 한계를 인정하고, "또 놓쳤구나" 하며 슥 한번 웃어넘길 수 있는 여유. 어쩌면 그 넉넉하고 너그러운 시선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가장 부드럽고 따뜻한 온화함으로 채색해 나가는 가장 아름다운 붓질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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