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세의 문턱에서 돌아보는 추억
— 사라진 줄 알았는데, 마음에 남아 있었습니다
85세의 문턱에 서서 지나온 세월을 가만히 돌아봅니다.
참 많이도 살았습니다.
돌이켜보면 인생은 무언가를 끊임없이 얻어가는 과정인 줄 알았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오히려 하나씩 놓아 보내는 과정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젊을 때는 앞으로 살아갈 날이 훨씬 많았습니다.
그래서 과거보다 미래를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무엇을 더 이루어야 하는지,
얼마를 더 벌어야 하는지,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어떤 집에서 살 것인지,
어떻게 하면 남보다 조금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을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때는 몰랐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귀한 것들은 대부분 그 순간에는 귀한 줄 모른 채 지나간다는 것을.
부모님은 이제 기억 속에만 계십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부모님입니다.
젊었을 때는 부모님이 늘 그 자리에 계실 것 같았습니다.
바쁘다는 이유로 자주 찾아뵙지 못했고,
전화 한 통도 미루었고,
마음속으로는 고마우면서도 그것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했습니다.
그때는 부모님에게 시간이 많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은 기다려주지 않았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부모님이 떠나신 뒤에야 알았습니다.
그때 한 번 더 손을 잡아드릴 걸.
한 번 더 이야기를 들어드릴 걸.
별것 아닌 일이라도 함께 웃어드릴 걸.
이제는 아무리 그리워도 찾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억 속 부모님을 만납니다.
어릴 때 나를 부르던 목소리,
밥 먹으라고 재촉하시던 모습,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시던 얼굴.
사라진 줄 알았는데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사람은 떠나도 사랑은 쉽게 떠나지 않는다는 것을 이제야 압니다.
형제도 세월 앞에서는 멀어집니다
형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릴 때는 한 지붕 아래서 함께 울고 웃으며 자랐습니다.
때로는 싸우기도 했고, 서로 미워하기도 했습니다.
그때는 그런 관계가 영원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각자의 삶이 시작되면서 길이 달라졌습니다.
사는 곳도 달라지고, 형편도 달라지고, 생각도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명절이나 특별한 날이 아니면 서로의 안부를 묻는 일도 줄어듭니다.
세월은 가족까지도 조금씩 멀어지게 합니다.
그러나 오래된 사진 한 장을 보면 다시 어린 시절로 돌아갑니다.
그때의 우리는 모두 젊었습니다.
그 시절이 다시 돌아오지는 않지만,
그 시절을 함께 살았다는 사실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친구는 인생의 증인입니다
친구를 생각하면 웃음부터 납니다.
젊은 시절에는 별것 아닌 일에도 함께 웃었습니다.
돈이 많지도 않았고,
대단한 것을 가진 것도 아니었지만
함께 있으면 즐거웠습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서로 의지했고,
좋은 일이 있으면 함께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85세가 되어 돌아보니 친구 관계도 인생과 닮았습니다.
누군가는 먼저 떠났고,
누군가는 연락이 끊겼고,
누군가는 아직 곁에 있습니다.
친구 한 사람 한 사람이 지나온 내 인생의 한 장면입니다.
그래서 오래된 친구를 만나면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편안합니다.
서로가 서로의 젊은 시절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친구란 단순히 함께 시간을 보낸 사람이 아니라, 내가 살아온 세월을 기억해주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55년 미국 생활, 낯선 땅에서 살아남은 세월
그리고 미국에서 살아온 55년을 생각합니다.
처음 이 땅에 왔을 때는 지금처럼 편안하지 않았습니다.
언어도 낯설고, 문화도 달랐습니다.
무엇 하나 쉽게 얻어지는 것이 없었습니다.
살기 위해 일했고,
가족을 위해 참고,
앞날을 위해 저축했습니다.
때로는 외로웠고,
때로는 서러웠고,
때로는 내가 왜 이곳까지 와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돌아보니 그 세월이 나를 만들었습니다.
미국이라는 낯선 땅에서 넘어지면 다시 일어나고,
실패하면 다시 시작하고,
어려우면 조금 더 참고 견디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돌이켜보면 55년이라는 세월은 단순한 시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가족을 지키기 위해 치른 수많은 선택과 희생의 기록이었습니다.
그때는 하루하루가 힘들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하루하루가 모두 내 인생이었습니다.
부부는 결국 서로의 마지막 동행자입니다
그리고 아내를 생각합니다.
부부가 오래 산다는 것은
항상 행복하고 아름다운 시간만 함께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서로에게 서운했던 날도 있었고,
말을 하지 않고 지낸 날도 있었고,
생각이 달라 부딪힌 날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긴 세월을 지나고 보니 중요한 것은
누가 옳았느냐가 아니었습니다.
누가 끝까지 곁에 있었느냐였습니다.
젊을 때는 사랑을 감정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노년이 되어보니 사랑은 감정보다 책임에 가깝습니다.
아플 때 곁에 있어주는 것,
힘들 때 챙겨주는 것,
같은 이야기를 여러 번 들어주는 것,
천천히 걷는 상대를 기다려주는 것.
이런 사소한 행동들이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온 부부의 사랑이었습니다.
이제는 서로가 서로의 과거이자 현재이고,
어쩌면 남은 인생에서 가장 가까운 마지막 사람입니다.
그래서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이 소중합니다.
자녀들은 품 안을 떠났지만 마음에서는 떠나지 않습니다
자녀들도 어느새 나보다 훨씬 큰 어른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키는 것이 부모의 가장 큰 책임인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보니 부모의 역할은 결국 놓아주는 일이었습니다.
품에서 키우고,
세상으로 내보내고,
자기 인생을 살아가도록 기다려주는 것.
자녀에게 내가 원하는 삶을 강요하기보다
자기 방식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바라봐주는 것.
이제는 그것이 부모의 사랑이라는 것을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자녀가 잘되면 고맙고,
힘들어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하지만 이제는 압니다.
자녀의 인생을 내가 대신 살아줄 수는 없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필요할 때 손을 내밀어주고,
너무 간섭하지 않고,
잘되었을 때 함께 기뻐해주고,
힘들 때 돌아올 자리를 남겨주는 것뿐입니다.
지나고 나서야 보이는 것들
85세가 되어 지나온 인생을 돌아보니
성공했던 날보다 평범했던 날들이 더 많이 기억납니다.
큰돈을 벌었던 날보다
가족과 함께 식탁에 앉았던 저녁이 생각납니다.
비싼 여행보다
친구와 커피 한 잔을 마시며 웃었던 시간이 생각납니다.
큰 집보다
젊은 날 가족이 함께 살던 작은 집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평범한 하루들이 그립습니다.
그때는 그런 날들이 얼마나 귀한지 몰랐습니다.
건강하게 일어나고,
두 다리로 걷고,
가족과 밥을 먹고,
친구에게 전화하고,
저녁이 되면 집으로 돌아오는 것.
그것이 사실은 인생이 우리에게 주었던 가장 큰 선물이었습니다.
후회도 이제는 인생의 일부로 받아들입니다
물론 후회가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더 잘할 수도 있었고,
더 참을 수도 있었고,
더 사랑할 수도 있었고,
하지 말았어야 할 말을 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 모든 것을 다시 고치려고 하면
남은 시간만 아깝습니다.
과거는 수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해석은 바꿀 수 있습니다.
그때의 실수도 나를 가르쳤고,
실패도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고,
상처도 나에게 사람을 이해하는 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러니 지나온 인생을 너무 심하게 책망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때의 나는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살았을 테니까요.
이제는 남은 날을 잘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85세가 되니 욕심도 조금씩 달라집니다.
더 많이 갖고 싶은 마음보다
지금 가진 것을 잃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커집니다.
큰 성공보다 건강하게 하루를 보내는 것이 좋고,
많은 사람보다 마음 편한 몇 사람이 좋고,
화려한 곳보다 익숙한 집이 좋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늘 하루를 무사히 잘 마치는 것이 고맙습니다.
이제 남은 인생에서는
무엇을 더 이루느냐보다
무엇을 잘 지키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건강을 지키고,
부부의 정을 지키고,
자녀와의 관계를 지키고,
친구와의 인연을 지키고,
내 마음의 평화를 지키는 것.
그것이 황혼의 삶에서 해야 할 중요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사라진 줄 알았는데
오늘도 문득 한 장면이 떠오릅니다.
젊었던 부모님의 얼굴일 수도 있고,
어린 자녀의 손일 수도 있고,
친구들과 웃던 어느 저녁일 수도 있고,
미국에 처음 도착했던 낯선 거리일 수도 있습니다.
아내와 함께 고생했던 어느 날일 수도 있습니다.
그 장면들은 모두 지나갔습니다.
사람도 변했고,
세상도 변했고,
나도 변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사라진 줄 알았는데 마음에는 남아 있습니다.
그것이 추억인가 봅니다.
추억은 과거로 돌아가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받고,
얼마나 많은 사람과 함께 살아왔으며,
얼마나 많은 시간을 견뎌 여기까지 왔는지를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지나간 세월을 원망하지 않으려 합니다.
좋았던 날도 내 것이었고,
힘들었던 날도 내 것이었고,
실수했던 날도 내 것이었고,
사랑했던 날도 모두 내 것이었습니다.
그 모든 날들이 모여
오늘의 나를 만들었습니다.
85세의 문턱에서 돌아보니
결국 인생에서 가장 귀한 것은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사람과 마음을 나누며 살았느냐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 남은 날에는
더 많은 추억을 만들려고 애쓰기보다
오늘을 잘 살아서
훗날 돌아볼 수 있는 좋은 장면 하나를 더 남기고 싶습니다.
오늘 함께 밥을 먹는 사람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고,
오늘 걷는 길을 천천히 바라보고,
오늘의 햇빛을 고맙게 받아들이고,
오늘 내 곁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한 번 더 바라보는 것.
그렇게 하루를 살다 보면
언젠가 오늘도 추억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먼 훗날의 내가
오늘의 나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 그때도 참 잘 살았구나.”
그 한마디면
85년의 인생도 충분히 아름다운 결산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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