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란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것
“부부가 늙어간다는 것은, 인생의 모든 소란이 지나간 뒤 둘만 남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노년의 부부에게 ‘잘 산다’는 말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갖는다.”
이 문장을 가만히 읊조리다 보면, 삶의 시계추가 잠시 멈춰 서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그리고 마음속에 묵직한 화두 하나가 떠오른다. 과연 인생의 석양 앞에 선 부부에게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젊은 날의 부부는 언제나 소란의 중심에 있었다. 아이를 낳아 기르고, 그 아이들이 세상 속으로 당당히 걸어 나갈 수 있도록 둥지를 치열하게 일구는 일. 일터에서 자리를 잡고 사회적 성취를 이루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날들. 주변과의 수많은 관계망을 유지하며 세상의 속도에 발맞추느라, 정작 서로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볼 시간조차 부족했던 날들이었다. 그 시절의 ‘잘 산다’는 기준은 대개 집의 크기나 통장의 잔고, 자식의 성공 같은 외적인 조건들로 채워지곤 했다.
그러나 세월은 흐르고 세상의 소음은 하나둘씩 잦아든다. 그토록 애지중지 키웠던 자식들은 저마다의 삶을 찾아 둥지를 떠나고, 화려했던 사회적 명함도 빛을 바랜다. 인생이라는 거대한 무대 위를 가득 채웠던 조연들과 관객들이 모두 퇴장하고 난 뒤, 마침내 막이 내리기 직전의 무대 위에는 처음 출발했던 ‘두 사람’만이 덩그러니 남는다.
바로 그 순간부터 노년의 부부에게 ‘잘 산다’는 의미의 거대한 패러다임 전환이 일어난다.
이때의 잘 산다는 것은 덧셈이 아니라 뺄셈의 미학에 가깝다. 그동안 서로에게 걸었던 불필요한 기대와 요구를 내려놓고, 젊은 날의 서운함이나 앙금을 마음 밖으로 비워내는 일이다. 관계를 단순하게 만들고 본질만 남기는 비움의 과정이다. 이제는 거창한 대화나 대단한 이벤트가 없어도 상관없다. 거실의 적막함이 어색함이 아닌 깊은 평온함으로 다가오고, 각자의 사색과 시간을 존중하면서도 곁에 있는 존재 자체만으로 안도감을 느끼는 사이. 그것이 노년의 부부가 도달할 수 있는 가장 높은 경지의 서정(抒情)일 것이다.
결국 노년에 잘 산다는 것은, 내 인생의 모든 사계절을 온전히 목격하고 증언해 줄 수 있는 단 한 사람과의 깊은 동행이다. 내 주름의 깊이를 알고, 내 걸음걸이의 무게를 이해하며, 내가 아픈 곳을 말하지 않아도 눈빛만으로 알아채는 사람. 세상이 나를 잊어가도 마지막까지 내 곁에서 손을 잡아줄 그 한 사람과 함께 매일의 일상을 소중히 여기는 것 자체가 삶의 가장 위대한 성취가 아닐까.
모든 소란이 지나간 자리는 결코 쓸쓸하지 않다. 오히려 그곳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늑하고 단단한 두 사람만의 숲이 우거져 있다. 오늘 부부의 날을 맞아, 거친 파도를 함께 넘고 마침내 고요한 바다에 이른 이 땅의 모든 노년 부부들에게 마음 깊은 경의를 표하고 싶다. 그들이 보여주는 늙어감은 서글픈 쇠퇴가 아니라,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본질만 남기는 거룩한 성숙이다.
황혼기 부부의 삶은 생각보다 현실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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